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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비 내리던 날, 인왕과 백악의 사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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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4-08-20 조회수 : 13,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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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성전에서 나와 막바로 길을 올라갔다. 갈림길이 나오는데 어느 길을 택해야 하는지 몰라 지체하였다. 인왕스카이 쪽으로 잘못 들어갔다가 다시 나와 황학정 가는 길로 들어섰다. 황학정. 이 곳은 본래 등과정의 옛터인데 경희궁 쪽에 있던 황학정이 일제에 의해 1923년 현재 위치로 옮겨진 것이라 한다. 그러니까, 이 곳은 등과정의 시대와 황학정의 시대로 크게 이분될 수 있다는 말인데, 등과정의 시대란 필운동의 등과정, 인왕산의 풍소정, 사직동의 대송정, 옥동의 등룡정, 삼청동의 운룡정이 이른바 “서촌오처사정(西村五處射亭)”으로 명성을 드날리고 있던 시대, (정확히 말하면 풍소정이 건립된 1807년 이후의 시대) 그리고 황학정의 시대란 갑오개혁 이후 무과가 폐지되어 궁술이 민간의 유기(遊技)로 쇠퇴하자 고종이 대한제국의 기백을 천명(?)하여 경희궁 회상전 북쪽에 황학정을 건립한 시대라고 생각하면 알기 쉬울 것이다. 인왕산 주변의 서촌에 사정(射亭)이 유명했던 이유는 아마도 인왕산의 호랑이가 원체 유명했기 때문에 사정(射亭) 역시 덩달아 주가가 오른 것이 아닌가(^^), 또 고종이 경희궁에 사정(射亭)을 세운 것은 을미사변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충군애국으로 무장한 궁수들을 다수 양성하여 국위를 떨치고자 한 것이 아닌가(^^), 이런 상상을 해 보았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황학정에 올라오니 비가 오는 와중에도 국궁을 하는 사람들이 서너명 활을 쏘고 있었다. 하늘을 향해 시위를 놓으면 시위에서 떠난 화살은 쏜살같이 날아가 포물선을 그리며 정말 저멀리에 떨어져 있는 과녁을 향해 날아간다. 그런데, 오늘 같은 날씨에서는 화살의 형체가 저만치쯤 해서 공중에서 사라져 버리고 조금 있다가 과녁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다들 감탄을 연발하며 활쏘는 모습을 보고 또 보았다. 양궁이 너무나 작아 보였고, 국궁이 실전 무예임을 다시 한번 체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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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학정에서 나와 우리 일행은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 했다. 인왕산 산행을 감행할 것인가, 아니면 포기할 것인가. 비는 점점 더 세게 내리고 있었고, 갈림길에서 인왕산을 향하는 길에는 미끈한 바위들이 첩첩하였다. 본래는 오전에 산행을 하고 점심을 한 다음 오후에 인왕산 주변을 본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타협안으로 오전에 먼저 인왕산 주변을 보고 점심을 한 다음 날씨를 보아 산행을 하자는 쪽으로 정리를 하였다. 결국 내리막길로 방향을 잡았다. 배화여고 가는 길. 중간에 본 사직아파트는 고색창연한 빛깔을 뿜고 있었다. 허나 그것은 고풍스러움이 아닌 비내리는 도시의 창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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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배화여고에 당도했다. 필운대. 이항복이 살았던 집. 권율이 일찌감치 사위감으로 이항복을 점찍었던 곳도 이 곳이었을 것이며, 오성과 한음의 익살스런 이야기들이 처음 퍼져나간 곳도 이 곳이었으리라. 학교 뒷편 축대 바위에 새겨진 각자 “필운대”는 이항복이 새겼다는 전언이 있거니와, “필운대” 오른쪽에는 다시 이항복의 후손 이유원이 1873년 필운대의 내력과 그 보수공사를 기록한 각석이 있다. 그리고, 공사에 참여한 명단을 밝힌 각석도 있는데, 이 명단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인물이 대원군 집정기 가단을 주도하였던 박효관이다. 1873년이면 대원군이 하야하고 고종이 친정을 선포하는 시점인데, 고종 친정기의 국정 중임을 맡았던 이유원이 하필 이 해에 필운대 공사를 한 이유가 무엇인지 자못 궁금하다. 그리고, 대원군과 긴밀한 관계에 있었을 박효관이 이 공사에 연계된 사정은 무엇인지 더욱 궁금하다. “필운대”는 지금 학교의 매점 바로 뒷편에 있어서 매점을 이용하는 학생들의 젊은 함성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백사의 혼령이 이 광경을 보면 간식거리가 가까와 나쁘지 않다고 쓴웃음을 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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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화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1895년 선교사 리드가 미국 남감리교의 지시로 한국에 들어와 선교활동을 하였는데, 리드가 기르고 있던 한국인 아이들 몇 명을 인계받아 캠벨 여사가 학교를 세워 배화의 터전을 닦았다 한다. 이 모든 내용이 이들을 추모하는 비석에 새겨져 있다. 그런데, 이 두 비석이 세워져 있는 곳에서 동쪽을 내려보는 전망이 그야말로 일품이다. 경복궁과 청와대는 물론이고 당시 웬만한 도성은 훤히 굽어볼 수 있는 자리이다. 만일 학교 건물이 없었다면 “필운대” 각석에서 똑같이 동쪽을 내려보아도 이 곳과 같은 전망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일행 중에는 비석이 있는 이 자리를 이항복의 집터로 보고 싶어 하는 의견도 나왔는데 일리가 있는 말이라 생각한다. 배화학당 추모비에서 내려보는 전망, 비록 인왕산에 올라 내려보는 전망에 비할 바가 아니겠지만 이번 답사의 소득으로 꼽고 싶다. 필운대를 본 일행은 효자동사무소를 향하였다. 예전에는 필운대 답사를 하면 으례 만리장성집 답사도 함께 했던 모양이다. 필운대 옆에 있었다는 육각현은 지금 배화 교내로 흡수되었고 육각현에 있었다는 이른바 만리장성집도 학교에 침식되어 그 자리에 학교의 과학관 건물이 들어섰다는 정보가 13년 전 역사잡지 ꡔ역사산책ꡕ에 적혀 있다. 그렇지만 지금 학교를 걸으며 막연히 느낄 수 있는 것은 학교 후문으로 내려가는 길이 언덕배기처럼 경사가 져 있어 이것이 그 옛날의 육각현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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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동사무소로 가는 길. 연무에 휩싸인 신비한 자태의 인왕산이 길의 왼편에서 건물과 건물 사이에 잠깐씩 잠깐씩 모습을 드러냈다. 흡사 베일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 잠깐씩 잠깐씩 화용월태를 비치는 격이라 할까. 인왕산 기슭의 중심은 뭐니뭐니 해도 옥계와 청풍계이다. 효자동사무소는 옥계에 진입하기 위한 전초지인 셈이며, 실은 여기가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 또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임금 융희제의 장인이었던 윤덕영의 호화스런 양옥 별장이 있던 곳이라 한다. 한 명이 안내자료를 받으러 동사무소에 들어간 사이 일행은 잠시 쉬었다. 차분히 내리는 실비를 보며 지난 역사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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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지난 역사 중에는 정선의 진경산수화가 있다. 이 곳의 동네 이름은 옥인동, 옥류천과 인왕곡을 합쳐서 만든 이름인데, 옥류천이야 정조대 중인문학 동호회였던 옥계시사의 이름을 통해 잘 알려져 있지만, 인왕곡이라는 지명이 존재했음은 정선이 50대 이후 만년에 살았던 집의 이름 “인곡유거”와 “인곡정사”를 통해서 알 수 있을 뿐이다. 최근에 간행된 ꡔ겸재의 한양진경ꡕ을 보면 당시 인왕곡의 정확한 행정 주소는 “한도(=한성부) 북부 순화방 창의리 인왕곡”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 이 곳은 북촌이다. 호랑이가 암약하고 활쏘기가 성행하는 서촌의 무(武)와는 다른, 글을 읽고 그림을 그리는 북촌의 문(文)의 분위기. 정선의 그림 “인곡정사”의 제작 경위는 그런 점에서 재미있다. ꡔ겸재의 한양진경ꡕ을 다시 보자. 주자를 사숙하고 도통을 자임한 이황은 주자학의 핵심을 요약하겠다는 포부에서 ꡔ주자서절요ꡕ를 편찬한다. 그리고, 그 서문을 친히 쓴다. 이황 친필의 서문이 이황의 손자 이안도, 이안도의 외손 홍유형, 홍유형의 사위 박자진에게 전해졌다. 박자진은 정선의 외조부이다. 그는 스승 송시열에게 이 귀물(貴物)의 발문을 받았고, 이황의 친필 서문과 송시열의 발문이 함께 있는 이 귀한 서물은 정선의 둘째아들 정만수에게 전해졌다. 정선은 이를 기념하여 그림을 그렸다. 「계상정거」(이황), 「무봉산중」(송시열), 「풍계유택」(박자진), 그리고 「인곡정사」(정선)가 그것이다. 그런가? 어쩌면 어느 의미에서 조선시대 주자학의 도통은 「주자서절요서」를 통해 이황에서 송시열을 거쳐 정선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 도통의 마지막 종착지인 정선의 집, 인곡정사 옛터에 내가 서 있다고 생각하니 사뭇 긴장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촌의 무(武)와는 다른 북촌의 문(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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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인곡정사의 옛터에 와서 받은 감동은 조금 이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인곡정사는 현재 옥인동의 군인아파트 자리이다. 진경산수화의 주역 겸재 정선이 만년에 살았던 인곡정사, 70대의 연로한 정선이 비갠 인왕산을 바라보며 그린 그림 인왕제색도.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날의 인왕산을 쳐다보니 인왕제색도 생각이 자꾸만 떠오른다. 사실 이번 인왕산 주변 역사유적 답사의 첫번째 감동은 바로 여기 인곡유거 자리라고 생각되는 군인아파트에서 느꼈다. 그 옛날의 인곡유거에 와서 그 옛날의 인왕제색도의 경관을 다시 보고 있다는 떨림. 겸재가 본 경관이 역사의 벽을 넘어 내가 보는 경관으로 연속하고 있다는 떨림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겸재는 분명 비갠 인왕산을 그리기 며칠 전에 오늘처럼 비내리는 인왕산을 응시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인왕산은 인왕제색의 붓놀림이 나오기 전에 겸재의 마음 속에서 이리저리 형상화되고 있었던 중간 그림이었을 것이다. 이 중간 그림과 마지막 그림 사이의 긴장, 나는 그런 각도에서 내 눈 앞의 인왕산과 인왕제색도의 인왕산을 부단히 대비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우리가 이 곳에서 인왕산을 바라볼 수 있는 가장 높은 전망대는 군인아파트 놀이터의 미끄럼틀이었다. 누군가 직감적으로 미끄럼틀에 올라 인왕산에 눈을 맞추니 다들 뒤따라 올라갔다. 하지만 한가지. 군인아파트의 여러 건물 중에서 과연 어느 건물이 인왕제색의 경관에 충실한 지점인지는 정밀한 진단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나왔다. 우리가 처음 감동을 받았던 지점보다는 조금 더 북쪽의 가동이 좀더 그럴듯하다는 해석도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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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아파트를 나와 길을 걸었다. 2년 전 여름이다. 대방동 전세 계약 기간이 다 되어서 이리저리 집을 보러 다니고 있었다. 대방동의 그 빽백한 다세대주택의 “모던함”에 질려 있었던 나는 팔판동과 같은 동네에 갔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기만 하였다. 처와 함께 팔판동과 인근 동네의 부동산중개업소를 찾아가 보았으나 조건에 맞는 집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옥인동 쪽에 왔다가 집을 하나 보았는데 그만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였다. 70년대의 기억 속에 항상 남아 있는 화단이 있는 일반주택의 2층이었는데, 집도 집이지만 동네 전체가 고즈넉하고 안온했으며, 집 앞의 길을 따라 사뿐히 올라가면 약수터가 나오는 곳이었다. 비록 입주하지는 못했지만 아무튼 그 때는 온통 집 구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이 매력적인 동네의 의미를 전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군인아파트에서 나와 다시 북쪽으로 조금 걷다 보니 2년전의 그 동네 어귀가 보이는 것이 아닌가? 잠시 멈추어 서서 당시의 광경을 새로 이번의 인왕산 답사 모드에 맞추어 해석해 보았다. 순간, 그것은 옥계였다. 옥계, 옥계, 달리 생각할 길이 없었다. 그렇지만, 이것이 나의 사적인 답사가 아니고 사람들과 함께 온 공적인 답사이기에 나의 순간적인 직감을 테스트하는 것은 온당한 일이 아니었다. 잠깐 멈추어서 2년 전 집보러 다니던 이야기를 하고 그냥 계속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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