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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들

안개비 내리던 날, 인왕과 백악의 사이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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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4-08-25 조회수 : 6,8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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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해 이번 답사 일정에서 제대로 형체를 갖춘 고건축을 본 것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 그 옛날의 터를 찾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표석이나 각자를 만나도 감지덕지인 형편이니. 그럼에도, 이번 답사의 최대의 묘미 중의 하나는 제법 건축기행의 기분을 냈다는 점이다. 형형색색 다채로운 온갖 집들이 가는 길마다 널려 있었다. 특히 옥인동에서 신교동 가는 길에 그런 아름다운 집들이 많았다. 우리는 과연 언제쯤 이런 집에서 살 수 있을까. 이러다가 오늘 귀가하면 적응이 안 되는 것 아니야.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걸었다.

23.
그렇게 걷다가 어떤 큰 건물을 만났는데 그것이 바로 우당기념관이었다. 아니, 이 기념관은 본래 대학로에 있었는데 언제 이리 왔을까? 1996년 2학기 대학원 수업 때의 일이다. 우당 이회영의 아나키즘을 발표하기 위해서 모학우는 이 기념관에 찾아오는 열성을 보이기까지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꼭 발표 때문이 아니라도 대학로에 가서 시간이 되면, 특히 나 같은 경우는 지금은 없어졌지만 중국도서 수입서점 삼련서점에 들렀다 오는 길에 한번쯤 들러 보곤 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우당기념관은 이 동네로 옮겨져야 될 이유가 있었다. 이회영은 이항복의 후손이었던 것. 기념관 안에 들어가 전시물을 훑어 보았다. 비록 이종찬 개인의 가문 현창의 혐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우당은 한국근대사의 굵직한 산봉우리의 하나가 아니던가. 이정규가 지은 문고판 [이회영약전]을 읽었던 1991년 나는 얼마나 이 인물에 심취해 있었던가. 답사를 마치고 귀가하여 다시 [이회영약전]을 펼쳤다. 책 끝에는 졸필로 씌어진 간단한 감상문이 있었다. 너무 오랜만에 다시 보는 나의 옛날 글, 그것은 글이 아니라 차라리 빛바랜 흑백사진이었다.

24.
기념관을 나와 산책을 계속하였다. 예정에 없던 우당기념관을 우연히 “발견”한 들뜸에 젖어 다음 목적지인 성희궁 옛터는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즐거운 상상을 하며 걸었다. 선희궁은 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 이씨를 가리킨다. 동시에 영빈 이씨를 제사지내는 재궁을 가리킨다. 기념관을 나와 가던 방향으로 계속 가면 맹학교도 있고 농학교도 있는데, 맹학교에 들어갔다가 허탕치고 농학교로 들어가니 농학교 교사 뒷편에 선희궁 건물이 있었다. 안내문을 읽고, 주위를 둘러보고, 잠깐 안에 들어갔으나 지나간 시절을 붙잡을 수 있는 정취가 느껴지지 않았다. 다시 농학교 밖으로 나왔다. 농학교 정문에서 학교 담장을 따라 걸어가다 우연히 담장 아래에 시선이 내려갔다. 순간 일행은 깜짝 놀랐다. 정말 오래되어 보이는 기단이 담장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규모가 매우 컸다. 이것이 어인 기단인가! 이 기단의 정체를 해명하기 위해 설왕설래했으나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였다. 황제에 즉위한 고종은 황실의 존엄성을 기리는 차원에서 사도세자를 장조로 추존한다. 그리고, 장조의 어머니를 제사하는 선희궁을 보수하고 여기에 어진을 봉안한다. 어진을 봉안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선희궁은 문소전이나 선원전 정도의 규모를 부여받은 것이다. 이렇게 달라진 위상의 선희궁을 설명할 수 있는 자취가 이 기단이 아닐까.

25.
선희궁터에서 나와 다시 길을 걸었다. 곧 청운초등학교에 도착하였고, 초등학교 정문 앞에는 이 곳에 옛날 정철의 옛집이 있었음을 알리는 표석이 세워져 있었다. 시계를 보니 점심시간이 되었는데 청운초등학교 부근에는 마땅히 점심을 해결할 식당이 보이지 않았다. 헉, 아까 신교동에는 주위 식당이 괜찮아 보이던데. 그러다가 문득 작년 여름에 처음 와 보았던 토속촌이 생각났다. 작년 여름 복날 삼계탕을 먹으러 왔던 곳인데. 택시를 타고 내자동사거리 부근에서 내려 입구에 가 보니 사람들 줄이 쫙 서 있는 것이 족히 30분은 기다려야 될 것만 같은 상황이다. 아니, 오늘은 복날이 아닌데도 이 정도란 말인가. 그렇지만 예상 밖으로 줄이 잘 빠져서 곧 안내를 받아 들어갔다. 김정희의 세한도는 여전히 잘 걸려 있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삼계탕 값이 11,000원에서 12,000원으로 올랐다는 것. 삼계탕 5인분에 인삼주 1병 갖다 놓고 식사를 하는데, 좋다. 좋아. 워낙 좋아하는 삼계탕이지만 여기 토속촌은 상당히 예술이다. 회비를 한 번 더 걷고 기분 좋게 나왔다.

26.
다시 택시를 타고 청운초등학교 맞은 편에서 내렸다. 오늘 오후 첫번째 답사일정은 청풍계에 가서 김상용 집터에 있었다는 송시열의 “백세청풍” 각자를 확인하는 것. 97년 답사를 왔을 적에 이 “백세청풍”을 못 찾아서 무척 애를 먹다가 극적으로 찾아냈던 기억이 있다. 그 때와 달리 지금은 번지수로 지도검색을 해서 가는 것이니까 무어 그리 대수로울 것 있으랴.
그런데, 오르막길을 다 올라오고 꼭대기쪽에서 한바퀴 돌았는데도 당체 이것이 7년 전의 그 동네인지 분명하지가 않은 것이. 무거운 마음으로 잠깐 길가에 붙어 무심히 벽을 보는데 거기에 “백세청풍”이 들여다 보였다. 여기 있었구나. 손짓하여 일행을 부른 다음에 사진찍고 한참 이야기를 하다가 천천히 내려갔다. 잠깐! 내려가다 말고 다시 몸을 돌려 “백세청풍”을 향했다. 그리고, 자료집에서 청풍계도를 찾아내 그림 속의 경관과 우리가 보고 있는 경관을 확인해 보았다. 경관이 일치하였다. 그림의 경관과 현실의 경관이 오버랩되는 신비로움에 다시 우리가 두 발로 딛고 있는 이 곳이 참으로 그 옛날의 청풍계라는 사실에 감탄을 거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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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청운초등학교로 내려왔다. 여기서 곧장 북행하면 그 옛날의 백운동이지만 지금은 길을 건너 경복고등학교를 향했다. 조원의 운강대를 찾아가는 길이다. 조원이라는 사람은 남명의 문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무척 생소한 이름이다. 아니다! 작년 개봉했던 조선남녀상열지사의 배용준이 조원이었으니까 무척 낯익은 이름이다.^^ 아무튼 효자동이라는 동이름이 조원의 효성 때문에 생겼다고 하니 기억해 두어도 나쁘지 않겠지. 허나, 경복고등학교 정문을 지나 교정을 걸으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조원의 생각은 멀어지고 이 학교의 운치에 빠져들어가고 있었다. 경복은 고등학교가 아니라 아담한 미니 대학교처럼 보였다. 교정에는 길이 있었고 - 운동장만 있는 학교가 얼마나 많던가 - 그 길은 숲 속 오솔길처럼 한적했으며, 길과 길이 갈리는 곳마다 이정표가 세워져 있었다. 운강대는 단지 터를 알리는 표석이 있었다. 하지만, 학교에 도취된 일행은 가볍게 보고 지나갔다. 백악의 베일이 드리워져 있었다.  

28.
경복고를 나와 경기상고를 향했다. 또, 학교. 그러고보니 이번 답사는 학교 답사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처음부터 끝까지 학교로 시종한다. 배화, 선희, 청운, 경복, 그리고 경기. 경기상고의 정문에서 쳐다본 백악은 더욱 장엄해 보였다. 경기상고가 왜 “백악의 정기”를 받았다고 자부하는지 알만했다. 청송당은 조광조의 제자 성수침의 당호이다. 성수침은 “隱德不仕”의 전형을 보여주는 16세기의 처사이다. 그의 은덕이 단순한 은둔인지 아니면 시대에 대한 정신적 저항인지 그 해석을 둘러싸고 그의 아들인 성혼과 당대의 대유인 이황 사이에 논란이 일지만 그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나의 관심은 솔바람소리를 듣는다는 청송에 대한 것인데, 정선의 장동팔경에 당당히 들어가 있을 정도로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청송당, 과연 얼마나 송림이 짙었길래... 우리는 학교 교사를 횡단한 다음 오른편으로 꺾어 다시 왼쪽으로 돌아 계단을 타고 위로 위로 올라갔다. 좁은 계단은 나무와 나무 사이로 가려져 있었고 마치 비밀의 화원으로 들어가는 듯하였다. 다 올라서니 이 곳이 청송당유지임을 알리는 안내판이 있었고, 그 아래에 청송당유지를 새긴 각석이 있었다. 각석을 등지고 보이는 정면에는 우거진 숲이 한없이 펼쳐져 있었고 그 위로 백악이 솟아 있었다. 겸재의 그림 그대로였다! 그대로였다! 귀를 기울여 본다. 바람소리가 들리는가. 그 옛날의 청송이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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