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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와 재난의 근대성 1 – 해상교통 - 이기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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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17-08-31 조회수 : 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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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와 재난의 근대성 – 해상교통

 

이기훈 (역사문제연구소 부소장) 

 

 

 

 

 

1. 1927년 4월 11일 

 

 

  1927년 4월 11일. 날씨는 화창했고 미풍이 불어오는 바다는 잔잔했다. 꽃놀이 하기 딱 좋은 시절, 좋은 날씨였다. <<조선일보>> 마산지국 기자 고종석(高宗石)은 점심 무렵 마산 부두로 나갔다. 동료기자 김형윤(金亨潤)과 만나 진해에서 열리는 물산공진회 취재 나가는 길이었다. 취재라고는 하지만 벚꽃놀이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인터라 들뜬 기분으로 조선기선주식회사의 여객선 천신환(天神丸)을 탔다. 갑판을 보니 공진회에서 공연이 있는 듯, 남선권번 소속의 젊은 예기(藝妓) 3명도 타고 있어 유람 분위기를 부추겼다.​1


  부두에는 천신환 외에도 여객선들이 속속 진해로 떠나고 있었다. 마산, 창원에서 진해로 가는 철도노선인 창진선이 막 개통되었지만, 마산에서 배를 타고 진해로 가는 쪽이 훨씬 쌌다. 대부분 여객선들은 보통 목조 발동기선, 흔히 똑딱선이나 통통배라고 하는 작은 배들이었다.​2 마산에서 진해, 통영은 물론이고 꽤 멀리 부산이나 여수까지 가는 항로의 주역들이 이 발동기선이었다.  

 

  천신환의 출발을 기다리던 고종석은 색다른 광경을 보았다. 작은 발동기선 한 척이 두 척의 목선을 양 옆에 연결해 놓은 상태에서 승객을 가득 태우고 있었다. 이렇게 배를 연결하는 것만을도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게다가 이미 어찌나 많이 태웠는지 승객들로 선체가 잘 보이지도 않아서 사람을 가득 실은 둥지 같은 것이 바다에 떠 있는 것 같았다. 진해기선주식회사에서 운행하는 이 배가 제3진해환(鎭海丸)이었다. 제3진해환에 연결된 목선을 타고 있던 사람 중에 박군이라는 청년이 있었다. 그는 고종석 일행에게도 이 배가 먼저 떠나니 옮겨 타 같이 가자고 했다. 언뜻 봐도 위험하고 특히 김형윤이 적극 만류하므로 일행은 천신환을 그대로 타고 있었다. 사람 둥지 세 개 같았던 제3진해환은 손님을 다 태우더니 진해를 향해 출발했다. 

 

  한 시간 가량 뒤에 고종석 일행의 배도 마산 부두를 떠나 진해를 향해 출발했다. 한참 먼저 떠났던 제3진해환을 비봉 앞 바다에서 따라잡았다. 양 옆에 목선을 두 척이나 달고 있으니 제대로 속도를 낼 수도 없었고 한 시간이나 늦게 떠난 배한테도 추월당했던 것이다. 사실 뱃삯도 제3진해환이 더 쌌다. 오후 1시 10분 고종석 일행은 진해 민간 부두에 상륙했다. 군중 사이를 헤치고 나와 걸어 보는 진해 시가는 온통 벚꽃 천지였다. 공진회 전시장으로 가 볼 법도 하건만, 고종석은 별 관심이 없었다. 그는 바로 진해 해군운동장으로 갔다. 대구 대표와 부산 대표 사이의 야구 경기가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공진회 기간 동안에 경남체육회는 “남조선 올림픽 대회”라는 것을 개최했는데, 이 야구 경기도 그 일환이었다.​3 그러나 곧 김형윤이 헐레벌떡 뛰어와 급보를 전했다. 제3진해환이 진해 군용 부두로 들어오다 침몰하여 숱한 희생자를 냈다는 것이다. 고종석과 김형윤은 바로 현동만 해군 부두로 달려갔다.

 

  거의 90년 전 식민지 조선에서 일어난 이 해난 사고를 다시 돌이켜 본다. 어디선가 익숙한 상황들이 의외로 많아 가슴이 서늘하다. 그야말로 ‘사고’이며 ‘재해’라서 피할 수 없는 일이기에 그럴까? 사고와 재난이 발생하게 되는 원인을 차근 차든 따져본다면 우리는 다른 면들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사고와 재난이 나타나는 양상은 그 사회의 역사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 일제 하의 해난 사고들을 통해서 한국의 근대에서 재난과 사고들의 양상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당대 사회의 안쪽을 들여다 보도록 하자. 

 

 

 

2. 전근대 해상 교통과 해난사고​4

 

 

  근대 해난 사고의 역사성이나 정치성을 해명하기 위해, 먼저 근대 이전의 해상 교통과 해난 사고를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정말 피할 수 없는 자연적인 재해라면 근대 이전에도 비슷한 일들이 자주 일어났을 테고, 아니라면 다른 유형의 사건들이 발생했을 것이다. 

 

  근대 사회에서는 인간들의 이동이 당연한 현상이지만, 전근대 사회에서 자기 고장을 벗어나 여행하는 일은 매우 특별한 경험이었다. 교통의 중심은 물자 수송이었고, 조선의 경우는 조세로 받은 곡물을 수송하는 것이 가장 큰 일이었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선박도 세곡운송을 담당하던 배들이었고, 이 배들은 강과 연안을 항해하는 데 적합했다.​5 광나루에서 양화진 사이의 한강 포구를 근거지로 하여 비교적 큰 상거래를 담당하던 배들을 경강선(京江船)이라고 했는데, 한강은 물론이고 연해를 항해할 수 있었다. 경강선과 대비되는 지토선(地土船)은 지방에서 사용하는 작은 선박으로 지방마다, 또 그 쓰임새마다 모양도 이름도 달랐다. 세곡 운송의 임무를 맡으면서 지토선들은 점점 커졌고, 연해나 큰 강을 오가며 행상과 어로 활동을 펼치게 되었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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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 19세기 후반 조선의 범선 (국사편찬위원회 사진유리필름 SJ0083)

 

 

 

 그림 1은 1871년 신미양요 당시 조선인 문정관들이 미국 함대를 방문하며 타고 왔던 배를 찍은 사진이다. 세곡을 운송하는 배보다 규모는 작지만 두 개의 돛을 달고 꽤 빠른 속도로 바다를 건널 수 있었을 것이다. 어로 활동에 쓰이는 배들은 비교적 작았지만, 잡아온 생선이나 해산물을 멀리 내다 파는 배들은 점점 커지고 상대적으로 먼 곳까지 항해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19세기 우이도에는 고기를 잡는 어선이 아니라 객주들이 소유한 상거래 전용의 배가 따로 있었고, 더 많은 화물을 싣고 빨리 항해할 수 있었다. ​7 날씨만 좋다면 제주도에서 전라도 강진, 해남, 영암, 흥양, 진도까지는 하루 정도면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청명한 날씨, 잔잔한 바다, 그리고 적절한 방향과 풍속의 바람이 모두 갖춰져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었고, 실제로 비가 많이 내려도, 바람 방향이 맞지 않거나 너무 심해도 항해는 불가능했고, 짙은 안개도 극히 위험했다. 1875년 강경에서 출발한 조운선단은 서울까지 오는데 25일이 걸렸고, 그 중 5일 정도는 비나 바람으로 아예 움직이지 못했다. 그래도 별 탈 없이 물자를 이 정도 일정에 운송했다면 꽤 우수한 성적을 거둔 것이었다.​8 육분의나 나침반 같은 항해술 도구가 발달하지 않았으므로 밤에 항해하는 것도 위험한 일이었다. 면포로 만든 좋은 돛을 쓰면 그나마 속도가 났지만, 자리를 엮어 만든 돛을 단 배들은 더 느렸다.​9  

 

  이런 배와 항해술로 바다를 건너야 했으므로 정기적으로 운항하는 여객선 같은 배편은 없었다. 필요한 일이 있다면 배를 세내거나 포구에서 기다리다 행선지가 같은  배를 이용해야 했다. 세곡을 실은 조운선이나 장삿배들은 언제까지 시일을 맞춰 운행해야 하기는 했지만, 그조차도 한참 여유가 있는 경우가 많았다. 거리에 따라서는 하루 이틀 혹은 며칠씩 꼼짝 못하는 일은 예사였다.  

  항해는 바람, 조류, 기상에 크게 좌우되었고, 항해하지 못하는 기간이 꽤 길었다. 배를 세내어 가더라도 바람과 기상 조건이 맞지 않으면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우선 물때를 기다려야 했다. 연안을 항해하는 배들은 강에서 바다로, 바다에서 강으로 들어가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해안의 포구도 출항을 위해서는 물때와 바람을 잘 맞아야 했다. 바람이 너무 세도, 너무 없어도 항해는 힘들었다. 불가피하면 노를 저어 가야했는데,  속도가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이동거리도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또 조선 후기의 배들은 나무못을 사용해 만든데다 선체의 구조가 강하지 못했다. 대부분이 갑판이 없고 물이 들어오는 것을 막는 치밀한 구조로 건조되지 않았으므로 큰 비가 오면 배에 물이 차 항해 자체가 불가능했다. 

 

  노련한 선원들은 기후에 민감하게 대비했겠지만 갑자기 내리는 폭우에 배가 침몰하는 사고를 아예 피할 수는 없었다. 폭풍우에 약한데다 지형지물 없이 항해하는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으므로 배들은 육지가 보이는 연안을 항해했다. 방향을 잘 잡을 수 있을 뿐 아니라 혹시 침몰하더라도 화물을 인양하기가 수월했기 때문이다. 특히 조운선들은 안전을 위해 수십 척 선단을 구성하고 육지에 바짝 붙어 항해했다. 그러나 그만큼 암초에 난파하는 사례들이 빈번했다. 수심이 깊지 않은데다 조금만 항로에서 벗어나도 암초를 만나기 일쑤였다. 좁은 해협을 통과하는 경우가 많은데 자칫하면 급류에 휘말려 배가 뒤집어 지는 일이 흔했다. 

 

  특이한 것은 이렇게 배가 좌초, 전복되는 상황에서 배에 탄 사람들의 희생은 많지 않은 편이었다. 19세기 조운선의 경우 137건의 사고로 1,807명의 선원들이 조난당했는데, 사망자는 114명으로 93.7%가 살아남았다.​10 대부분의 배에는 노련한 선원들이 타고 있었고, 일반적인 승객이 적다 보니, 잦은 사고에 비해 사망자도 적었다. 

 

  물론 고기잡이를 위해 먼 바다로 나가거나 추자도, 제주도, 흑산도와 같은 먼 섬을 오고가는 배들이 풍랑으로 침몰하거나 멀리 표류하는 일도 있었다. 개인적인 일로 여행하다 해난을 당하거나 가족 단위로 이동하다 표류, 혹은 목숨을 잃기도 했다.​11 그러나 해상을 통한 이동 자체가 많지 않은데다 정기적인 여객선도 없고, 이민과 같은 선박을 이용한 대규모 인구 이동이 없었으므로 대규모 해난 사고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정확한 통계가 없으니 숫자로 비교할 수는 없지만 배를 타고 대규모로 이동하는 일이 상대적으로 적었으니 수십 명, 수백 명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는 대형 침몰 사고 같은 일도 거의 없었다. 배가 침몰한다 해도 대부분 바다에 익숙한 선원들이고 일반 여객들이 적었으니 난파해도 생존하는 사례도 비교적 많았다. 근대의 대량 수송, 빠른 속도, 규칙적인 일정이 오히려 더 대규모의 해난 사고를 일으키는 조건이 되었던 것이다.  

  

 

 

3. 근대 해상교통의 발달

 

  개항 이후 가장 빨리 들어온 근대적 교통수단도 기선이었다. 1883년부터 조선 정부는 기선을 도입하여 세곡을 운송했으며 1893년에는 이운사(利運社)를 설립하여 기선해운업을 직영했다. 이 기선들은 개항장이나 큰 포구를 연결하는 연안 항로를 다녔지만, 일부는 진도, 고금도 – 인천등 섬에 기항하기도 했다.​12 민간인들도 1890년대부터 일본에서 기선이나 서양형 범선을 임대하거나 구입해 무역을 했다.​13 

 

   그러나 일본 자본이 본격적으로 진출하면서 확연히 우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1899년 군산이 개항하자 일본인 오오사와(大澤藤十郞)는 오사카상선주식회사 대리점을 개설하고 일본-군산 항로에 500톤급 기선을 운항하고 서해안 일대의 항구를 연결하는 항로를 개설했다.​14  사업의 규모를 계속 확대한 오오사와는 군산 지역의 대표적인 자본가이며 유력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목포의 자본가 다케우치(竹內鶴太郞) 같이 다른 지역에서도 일본인 자본가들이 속속 국가의 보조를 받으며 기선 운항 사업에 참여하기 시작했다.​15 

 

 1912년 조선우선주식회사가 설립되면서 기선들이 섬과 육지를 연결하는 식민지 연안 항로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조선우선주식회사는 1912년 부산기선주식회사, 목포운항합자회사 등 연안항로에 취항하던 일본인 자본가들이 연합하여 만들었지만, 설립 당시부터 조선총독부의 보조금을 전제로 한 회사였다. 초기 3년간 총독부 보조금이 평균 261,991엔으로 조선총독부가 지정하는 항로, 기항지, 항해 횟수를 지켜야 했으니 조선총독부가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1936년에는 총독부가 관할하는 조선식산은행이 신주 8만주를 인수하여 최대 주주가 되었다. ​16

 

  조선우선주식회사의 기선들이 본격적으로 운항하면서 정말 악천후가 아니라면 정해진 시간에 부두에 나가 표를 사면 배를 타고 떠날 수 있게 되었다. 언제 도착할지도 예측할 수 있고, 조류와 바람에 의존하지 않게 되면서 아침 배로 근처 항구도시의 장에 나가서 오후 배로 돌아올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객선과 화물선도 구분되었고, 여객선의 3등실을 타면 철도에 비해 훨씬 싼 가격에 목적지까지 갈 수 있었다. 일본 자본의 주도 하에서 대량 운송, 예측 가능한 정기적 서비스 등 현대적인 해운 산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17  조선인들의 생활은 이 해상 교통망에 의해 규정되고 지배될 터였다. 1910년대 조선우선주식회사의 기선들은 부산-여수 간 노선은 월 20회, 목포-여수 간 노선에는 월 10회 운항했다.​18 중간에 있는 마산, 통영, 삼천포, 장흥, 나로도, 완도 등을 들러 여객과 화물을 수송한 것은 물론이다. 조선우선주식회사는 부산-거제도-여수-거문도-제주도-추자도-목포까지 운행하는 노선도 월 8회 운행했다. 

 

  1920년대 들어서는 연안항로에는 더욱 많은 배들이 오고 갔다. 조선우선회사가 한달에 한두 번 정도 왕복하는 것이 고작이었던 목포-법성포 항로에 사흘에 두 번씩 왕복하고 있었다.​19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는 발동기선들이 대거 투입되면서 연안을 따라 대도시들을 연결하는 장거리 항로 외에도 단거리 왕복 항로들이 늘어났다. 배를 타고 다니는 것이 일상화되면서 자본가들이 해운 사업에 너도 나도 뛰어들면서 경쟁도 격화되었다. 특히 도나 군 등 지방 행정기관들이 예산으로 보조하는 항로들이 늘어나면서 군소 선박회사들의 단거리 노선이 더욱 늘었다.​20 진도군은 진도운수주식회사에 3,960엔을 지원하여 진도-해창-목포를 이틀에 한번씩 운항하게 했고, 완도군은 6개면이 공동으로 순항조합을 만들고 17톤의 발동선을 보유하게 했다.​21  또 이렇게 지원을 받지 않고도 민간업자들이 운임 수입만으로 운영하는 자영항로가 급증했다. 이 자영항로들은 대부분 매일 운항하거나 하루 2회 이상 운항하는 노선으로 정기적으로 운항하고 있었다.  

 

  50톤 이하의 발동기선들이 몇십 전 정도의 요금을 받고 섬과 항구 도시, 섬과 섬 사이를 연결하며 운항했다. 연안 도시와 읍, 섬들이 많은 경남이나 전남에서는 업자들이 한 노선에 경쟁적으로 뛰어들었다. 또 철도가 생기면서 사업성이 없다고 노선에도 철도가 물동량을 감당하지 못하자 기선 운항을 재개하는 경우도 있었다.​22 근대 대량 교통 체계가 완성되고 이동이 활발해지면서, ‘관광’이라는 새로운 현상이 확대되었다. 봄의 꽃놀이, 여름 피서, 가을의 단풍놀이 등이 일반화되고, 여행의 명승지들이 등장했으며 계절적 관광수요가 발생했다. 1920년대부터 관광에 따른 선박 여행도 크게 늘어났다. 이에 따라 1928년 2월 계절적인 수요에 따라 단거리 항해의 경우에 일반 정원보다 더 많은 승객을 승선시킬 수 있도록 규정이 개정되기도 했다. ​23  

 

 

 

4. 식민지의 해난 사고

 

 

  선박 운송이 활발해지자 해난사고도 늘었고 선박의 안전, 해로의 관리 등이 당연히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실질적인 통치권을 장악한 일제는 본격적으로 항로표지, 등대 관리, 항만 관리 등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국권 강점 이후 조선총독부는 이전 통신국, 탁지부, 세관으로 나눠져 있던 해사 행정을 1912년 체신국 해사과에서 일원화하여 담당하도록 했다. 또 조선선박령, 선박검사령, 조선선박검사령 시행규칙 등 제정하고   1913년에는 조선선원령을 제정했다. 일본의 선박과 선원 관련 법령을 조선에도 적용하도록 한 것이다. 또 1914년에는 조선해원심판소관제를 공포하여 해원심판소를 운영했다. 해난사고가 발생했을 때 선원들이 책임을 다했는지 조사하고 징계를 가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24  해상 교통로의 안전은 국가의 안보와도 관련된 문제니만큼 이미 1910년대부터 법령제도가 어느 정도 갖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1920년대 뱃길이 활발해지면서 해상사고와 희생자가 급증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식민지 권력은 해상 수송로를 안전하게 확보하는 데는 주의를 기울였지만, 법규를 충실히 하고 그 이행을 감시하여 식민지민들의 안전을 보호하는 데 관심이 없었다. 특히 이런 안전의 규정이 일본인 자본의 이익을 위태롭게 한다면 더욱 그랬다. 실제로 조선총독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했던 문제는, 해운 회사 간의 과당 경쟁으로 사고가 빈발할 때였다. 그조차도 안전의 문제라기보다는 회사들을 통합하여 과잉경쟁을 막고 통제를 쉽게 하려는 차원에서였다. 

 

  여객 수송이 늘면서 수십명이 목숨을 잃는 대규모 여객선 침몰 사고가 발생했다. 1923년  조선운수주식회사의 기선 진주환(晋州丸) 침몰이 충격을 주었다. 원산과 서수라를 운항하는 170톤급의 목조 기선 진주환은 1923년 11월 1일 밤 1시 어둠 속에서 980톤급 회령환(會寧丸)과 충돌했다. 승객들은 모두 깊히 잠들었던 터라 선실에서 빠져 나오지도 못했고, 차가운 동해의 바다 속으로 불과 20분 만에 완전히 침몰하고 말았다. 부유물들에 매달려 있는 생존자들을 구했지만 선원 9명과 승객 한 사람 뿐이었고, 선장과 선원 10명, 승객 30명은 모두 목숨을 잃었다. 진주환은 소형의 목조 기선일 뿐 아니라 선체가 낡아 보험 가입도 거부될 지경이었는데, 이런 선박은 연안 항로이기는 하지만 거친 동해의 원거리 항로에 투입한 회사와 감독을 소홀히 한 당국에 대한 성토가 이어졌다.​25 담당부서인 조선총독부 체신국은 총독부가 취항을 명령한 항로에서 목조선 및 소형기선 취항을 금지했지만, 조선선박검사규정을 개정해서 선령 20년 이상의 목조 기선은 1, 2 등급을 부여하지 않도록 하여 사용 범위를 제한한 것은 1925년 10월이었다.​26 심지어 진주환은 화물, 우편물 목록은 물론이고 승객 명부도 없었다.​27 

 

  연안 항로에서 자주 일어나는  사고들은 주로 정원초과나 나쁜 기상 조건 하에서 무리한 운항 등이 원인이었다. 특히 일시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장날 사고가 많이 났다. 1930년 통영에서 발생한 제일운항환 침몰 사고가 대표적이다. 1925년에 진수한 신조선이었지만 사고는 피할 수 없었다. 1930년 3월 4일은 통영 장날이었다. 거제와 통영을 오고 가던 거제운수주식회사 소유의 31톤 발동기선 제일운항환은 오후 4시 통양 부두를 떠나 거제로 출발하려는 터였다. 장을 보러 왔던 사람들은 이 배를 타야 거제로 돌아갈 수 있었고, 배가 떠나려 하자 표를 사지도 않고 앞 다투어 올랐다. 배가 잔교에서 멀어지는 순간 마지막으로 달려오던 두 사람이 배에 뛰어 올랐다. 35명의 승객과 화물로 무게 중심이 위로 가 있던 배는 이 충격에 옆으로 기울었다. 쌓아 놓은 화물이 쏟아지면서 배에 물이 들어오면서 침몰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주변에 있던 배들이 달려들어 승객을 건져 내면서 대부분은 목숨을 건졌으나 끝내 두 사람은 선실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채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28

 

   1937년 여수항 등대 부근에서 일어난 침몰 사고는 선주의 책임이 훨씬 더 크지만, 마찬가지로 장날 발생한 사고다. 여수읍에 사는 김의련은 어물중개인으로 15톤짜리 화물선을 가지고 있었다. 여수의 어물중개인 김의련은 자기 소유 15톤짜리 화물발동기선을 가지고  화물이 없거나 자리가 남으면 돌산도 섬 주민들을 여수 읍내까지 실어 나르고 돈을 받았다. 화물선이니 사람을 태울 수 있는 공간은 많아도 20여명 정도에 불과했고 돈을 받고 여객을 실어 나르는 것 자체가 불법이었다. 김의련은 이미 여러 번 적발당한 적이 있는 상습범이었다. 돌산도 근해에 나갔던 배가 거의 빈 채로 돌아오게 되자 돌산도 여러 마을에서 주민 67명을 태우고 여수항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막상 부두에 보니 경찰이 감시하고 있어 화물선이 배를 댈 상황이 못되자 배를 돌려 등대 밑의 해안으로 접근했는데, 갑자기 키를 돌려 배를 대려 하는 순간 배가 뒤집어졌고, 승객 중 36명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는 대참사가 발생했다. ​29

 

  장날 발생하는 사건, 사고는 시골 사람들의 일상을 근대적 시공간과 속도가 지배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조선 후기에도 장은 있었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멀리 떨어진 장에 가지도 않았고, 또 그날 바로 돌아오려고 하지도 않았다. 물과 바람의 때를 맞춰야 하는 돛배들이 구성하던 물류의 흐름과 속도는, 기선과 발동기선들의 엔진 소음 속에서 급속히 빨라져야 했다. 생존을 위해서는 장에 생산품을 내다 팔고, 필수품들을 사와야 했다. 자녀들에게 더 나은 삶을 보장해 주기 위해서 대처의 학교에 보내야 했고,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수입을 올려야 했다. 결국 가난한 자들은 자신의 노동을 팔기 위해서라도 배를 타야만 했다.  

 

  치열한 경쟁과 폭증하는 교통 수요는 기본적인 안전 수칙들을 예사로 어기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근대적 교통 수단의 더 많은 수송 능력과 더 빠른 속도는 더 큰 위험을 초래하게 되었다. 인간의 존엄에 대한 관심이 적고, 자본의 이익에 더 몰두하는 사회일수록 그 위험은 더욱 크게 마련이다. 물론 타이타닉호처럼 당시로서는 첨단의 기술과 항해술을 자랑하는 선박도 대형 재난을 당하기도 하지만, 다수의 해난사고들은 안전보다 이익을 중시하는 경쟁에서 발생한다.  

 

  1936년 침몰한 녹도환 사건은 그 전형적인 사례다. 녹도환은 1920년대 건조한 인천기선주식회사 소속의 28톤 목조 발동기선으로 그렇게 낡지는 않았지만 홀수선이 낮아 작은 파도에도 배가 심하게 흔들려 먼바다를 항해하는 데 적합하지 않고 많은 승객을 태울 수 없는 배였다.​30 원래는 인천-강화-부천을 왕복하는 노선에 취항하고 있었으나 중간 기항지에서 배를 제대로 세우지 않고 따라온 종선에서 승객을 승선시키는 바람에 불만을 사다가 강화군청 직원 한 사람이 물에 빠져 한때 의식을 잃는 사고를 내기까지 했다. 이후 녹도환은 취항 노선을 바꿔 서산-인천 간을 운항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1936년 여름 같은 항로에 인천 조선해양사가 새로 만든 75톤 급 예산환(禮山丸)을 취항시키자 두 배 사이에 승객 유치 경쟁이 붙기 시작했다. 배의 크기가 반도 되지 않는 녹도환이 경쟁이 불리할 수밖에 없었고, 원래 50전이던 요금은 20전까지 떨어졌다. 두 회사가 배삯을 다시 올리기로 협의했으나 오래되고 작은 배인 녹도환은 대리점을 거치지 않고 배에 바로 탄 승객들에게 싼 요금을 받는 방식으로 더 많은 승객을 유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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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물 위에 떠 있는 녹도환 선체의 일부 <<매일신보>> 1932. 7. 2 


 

  1936년 10월 2일에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녹도환의 정원이 71명이었으나 실제 승객의 수는 아무도 몰랐다. 대리점에서 표를 사지 않고 배에서 삯을 치른 승객들이 꽤 있었기 때문이다. 날씨는 아주 좋지 않았다. 항해가 금지되지는 않았지만, 관측소는 폭풍경보를 내렸다. 비슷한 시간에 출항했던 예산환 승객도 60명 정도였다. 비바람이 불었지만 선장 김성윤은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평소에도 녹도환은 예산환보다 30분 또는 1시간이나 빨리 인천에 도착하곤 했다. 갈수록 바람이 거세져 출발할 때 9m였던 풍속은 영흥도 근처에서 16m로 거칠어졌다. 배의 크기와 승객, 화물의 상태 등을 본따면 영흥도로 피해야 했다. 이 부근은 평소에도 파도가 거칠어 마의 바다로 불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장은 그대로 돌파를 결정했고, 무거운 승객과 화물을 싣고 거친 바다를 헤쳐 가던 배는 결국 문제를 일으켰다. 영흥도 부근 해상에서 기관실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폭발음이 들렸고 배는 멈췄다. 파도에 흔들리던 배는 바로 전복되었으며 승객들은 구명도구도 없이 차가운 바다에 내동댕이쳐졌다. 뒤따라 오던 예산환이 구조에 나섰으나. 결국 60명 이상이 목숨을 잃는 대형 사고가 발생했다. 피해자들은 대부분 일반 승객이었다. 승객 중 생존자가 겨우 4명에 지나지 않은 반면, 선장과 선원들은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구조되었다.​31

  

4. 권력과 재난 

  

  이제 다시 1927년 4월 11일의 진해항으로 돌아가 보자. 오후 12시 10분 경 제3진해환 자체에 적어도 80명 이상, 좌우에 연결한 종선까지 합치면 200명 가량의 승객을 태우고 출발했다.​32 먼저 도착한 천신환이 진해의 민간 부두로 들어왔던 것에 비해 제3진해환은 해군 전용 부두로 들어왔다. 공진회를 맞아 워낙 많은 배들이 몰리다 보니 특별히 군용 부두를 개방한 듯하다. 원래 정원이 51명인 배가 양쪽에 목선을 끌면서 정원의 3배도 넘는 사람들을 태우고 온 것이다. 위험천만한 항해는 오후 1시 30분 진해 현동만 해군전용 잔교에 도착하면서 끝나는 듯 했다. 워낙 위험한 상태다 보니 늦게 출발한 배들에게 추월당한 사람들은 저마다 마음이 급했다. 잔교를 100m 쯤 앞두고 선장은 속력을 떨어뜨리면서 배를 멈출 준비를 시작했다. 

 

  초만원을 이룬 사람들은 부두가 보이자 먼저 내리려고 서두르기 시작했다. 잔교에 닿기 전에 양쪽으로 묶어 놓은 배들을 동시에 풀어 균형을 맞췄어야 하는데, 오른쪽 배의 밧줄부터 먼저 풀어버렸다. 배의 무게 중심이 급격히 왼쪽으로 쏠렸다. 평소라면 크게 문제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정원의 2배 이상 탄 사람들이 내리려고 갑판에 몰려 있어 무게 중심 자체가 위로 쏠려 있었다. 배가 왼쪽으로 크게 기울어지니 당황한 선장은 왼쪽 줄도 끊어 버리라고 했다. 이제 반대편 무게추가 갑자기 사라지면서 배는 반대편으로 다시 급하게 기울었다. 좌우로 배가 요동치면서 갑판 위에 사람들은 옆에 묶여 있던 배로 뛰어 내리거나 바다로 떨어졌다. 크게 기울어진 배는 완전히 전복되면서 2분도 지나지 않아 물 속으로 가라 앉아 버렸다.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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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인양되는 제3진해환. 가운데 끌여올려지는 배다. (<<동아일보>> 1927. 4. 14)

 

 

  다행히 종선을 묶은 밧줄은 끊어졌으므로 두 배는 침몰하지는 않았고, 종선으로 떨어진 사람들도 무사했다. 바다로 뛰어든 사람들도 주변의 배들이 건져 올렸다. 사고가 해군 부두였으므로 훈련이나 경계 중이던 해군 병력들이 상주하고 있었으므로 이들도 구조에 참여했다. 많은 사람들이 구조되었지만, 선실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사람들은 목숨을 잃었다. 4월 14일까지 25구의 시신이 발견되었는데, 모두 여성들이었고 아이와 함께 발견되거나 일가족이 함께 목숨을 잃은 사례도 있었다. 승선객 명단이 제대로 없으니 정확한 희생자의 수도 파악되지 않았다. 

 

   나중에 선사 측에서 전복의 책임을 승객에게 떠넘기기 위해  “목선을 끌어서 띄어 옮기니 발동선은 뒤에서 생기는 힘 이외에 무식한 여자들이 탄 배라 차례로 내릴 생각은 하지 않고서로 다투어 먼저 내리고자 선실에서 갑판으로 와하고 일시에 몰려 올라”오면서 배가 전복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34  그러나 이미 배가 초만원인 상태였고, 희생자 대부분이 선실에서 나오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던 점을 본다면 승객들이 갑판에 한꺼번에 몰렸다는 것은 핑계일 뿐이다. 더구나 희생자들이 주로 여성일 뿐이지 승객들이 모두 여자라는 것도 억지다. 오히려 남자들이 갑판을 차지하고 힘없는 여성과 노약자들이 선실에서 기다리다 참변을 당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이 침몰사고에서 선사, 선장과 선원들의 책임은 명백하다. 일본인 선장과 조선인 선원들은 구속되어 재판을 받았고, 선사는 그대로 해체되다시피 했다. 그런데 이들은 왜 이렇게 무리한 운항을 했을까? 출항한 마산 부두를 관리한 경찰, 진해 부두를 관리하던 해군들은 어떤 책임을 졌을까? 더 나아가서는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진해로 몰려들었을까? 이 해난사고는 근대 국가 권력의 지배전략이 실질적으로 어떤 파괴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 보여준다. 또 자본주의 언론이 권력과 어떤 협력 관계를 형성하는지도 알 수 있는 사례다. 

 

 이 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진해로 몰린 까닭은 4월 8일부터 14일까지 경상남도 21개 부(요즘의 시)군이 연합으로 공진회를 개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산)공진회는 각 지방의 산업생산물을 중심으로 개최하는 일종의 박람회다. 박람회는 자본주의적 산업시설과 상품을 전시하는 이벤트이며 자본주의 문화전략이 살아 숨쉬는 공간​35이다. 제국주의 권력은 여기에 더하여 식민지 경영의 성과를 홍보하고 제국의 우월함을 적극적으로 보여주는 기회로 삼았다.​36 조선총독부와 각 도가 물산공진회는 번갈아 물산공진회를 열었다. 조선총독부의 물산공진회는 관권을 동원해 전국에서 관람객들을 끌어 모았고, 경성 구경의 기회이기도 했던 터라 대성황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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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1927년 진해물산공진회장 모습. <<매일신보>> 1927. 4. 9  

 

 

  1927년 진해의 공진회는 총독부나 경상남도가 아니라, 실제로 진해항이 속해 있던 창원군이 다른 부, 군의 협력을 얻어 주관했다. 그러나 10만엔에 달하는 거액의 예산, 조선수산협회와 경남체육회 등 단체들의 열렬한 후원, 일본 해군과 육군의 적극적인 지원 등으로 볼 때, 조선총독부 차원에서 기획하여 경상남도와 창원군에서 실행하게 했음을 알 수 있다.  

 진해 주둔 해군 부대나 육군 기지 사령부만이 아니라 육군성이나 해군성 차원에서 이 공진회 지원행사를 열었다. 육군은 평양 항공대에서 비행기가 직접 이동하여 부근 농장에 임시 착륙장까지 만들어 놓고 진해 상공에서 축하 비행을 실시했다. 해군은 4월 8~9일 사세보 기지 소속의 비행정 2대가 해상에서 출격하여 진행 항만에 도착, 대기하고 있던 구축함 두 척과 공습 및 방공 훈련 시범을 공개했다.​37 비행기 자체가 보기 드물었던 당시로서는 큰 구경거리였다. 

 

  원래 공진회라면 농업관, 면업관, 잠업관, 임업관, 축산관 등 산업 분야를 중심으로 전시관을 만들고 우수 생산품, 기구나 시설, 모형, 도면 등을 전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진해공진회의 가장 큰 구경거리는 육해군이 만든 참고관이었다. 해군의 참고관에는 각종 탄환과 포탄, 해군 하사관 복장, 수뢰, 잠수함 단면도, 탐조등, 나침반, 풍력계. 신호기, 방독면, 잠수용 물품 등 군용 물품 등이 잔뜩 전시되었다. 항만에는 구축함 두 축이 일반에게 공개되었으며 비행기들이 진해만과 행사장 위를 비행했다. 해군 군악대가 매일 연주를 했고, 저녁 때는 벚꽃으로 유명한 사쿠라 승마장에서 총독부와 육군이 선정한 활동사진이 매일 상영되었다.​38 축제 분위기를 만드는 것은 주로 육해군에서 하는 이벤트였던 것이다. 고위 당국자들도 큰 관심을 보였다. 총독부 상공과장이 출장하여 행사장을 시찰했고, 경상남도 지사도 현지를 방문해 시찰하고 격려했다.​39 

 

   이 붐에 한 몫 한 것이 언론사, 특히 언론의 진해 부근 지국들이었다. <<동아일보>> 진영 지국, 마산지국의 창원분국과 진해분국, 왜관지국, 청도지국, <<조선일보>>의 밀양지국에서 물산공진회 관광단을 모집했다. 창원분국에서는 부녀 관광단을 따로 모집했다. 당시 신문사 지국 중에서 철마다 관광단을 모집, 여행을 보내는 것으로 수익을 올리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공진회와 꽃놀이를 함께 겸할 수 있는 관광상품이었던 셈이다. 공진회 관련 기사만이 아니라 관광단 모집 공고도 훌륭한 홍보가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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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진해의 벚꽃 풍경 <<매일신보>> 1932.4.10 

 

 

  공진회 붐을 위해서는 교통수단이 확보되어야 했다. 주최 측은 철도국과 사설 철도회사로부터 할인을 먼저 받아낸 다음, 기선회사들에게도 할인을 요구했다. 창원과 진해 사이에 철도가 막 개통되었지만 철도 요금은 비쌌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배를 타고 이동했다. 결국 진해기선주식회사와 조선기선주식회사가 각각 요금의 2할, 3할 할인을 약속했다. 

 

  그 결과 4월 8일 오전 10시 물산공진회 개회식이 1,500여명 참석한 가운데 열린 이후  각지에서 관람객이 엄청나게 방문했다. 입장료가 어른 10전, 어린이 5전이었지만, 여러 전시관의 구경거리는 물론이고 새로 만든 수족관도 볼 수 있었고 조선과 일본의 예기들이 춤과 노래를 선보이기도 했다. 벚꽃이 한창일 때라 꽃구경을 겸한 관광객 수만 명이 몰려들어 진해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들 했다.​40 초유의 호황에 신이 난 진해의 유지들은 공진회 기간을 20일까지 연장하자는 진정서까지 제출했다. ​41

 

  다른 선사들과 한참 승객 유치 경쟁을 벌이며 수익 악화로 고전 중이던 진해기선주식회사는 그야말로 대목을 만났다. 게다가 관이 주최하고 일본 해군이 적극적으로 후원하는 행사가 아닌가? 어지간한 정원초과는 묵인되었다. 승객들이 출발하는 마산 부두에는 경찰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입항한 부두는 진해의 민간 부두도 아닌 군용 부두였다. 그렇다고 해도 이 위험천만한 항해를 감독하고 통제하는 부서는 아무도 없었다. 사건 직후에 언론에서 감독 책임의 문제를 거론하기는 했으나, 이 사건 수사를 감독책임이 있는 마산경찰서에서 했다.​42 제대로 조사가 될 턱이 없었다. 

 

  진상이 조사되지 않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희생자들의 시신도 천대받았다. 다시 고종석의 시선으로 돌아가 보자. 김형윤이 사건 경위 취재를 맡고 고종석은 시신들이 모여 있는 창고로 갔다. 일본 경찰들은 “일본인이 한 사람 밖에 없어 다행”이라면서 소지품을 조사하기 위해 시신을 뒤지고 있었다. 조선인 부인들은 가지고 있던 돈도 거의 없었다. 공진회를 구경간 사람도 있겠지만, 이 대목에 뭐라도 팔아서 살림에 보태려 집에서 재배한 것들을 가지고 떠났던 아낙네들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인 경찰들은 사망한 일본인 여성에게는 정중히 대하면서도, 조선인 희생자 시신의 치마를 발길로 걷어차 뒤적이며 저희들끼리 키득거리고 있었다. 분을 참지 못한 고종석이 그렇게 웃을 수 있느냐고 따져 들었더니 못들은 척한다. 이때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진해경찰서장이 다 봤으면 나가라고 했다. 조선일보 마산지국이라면 그 전 해인 1926년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기자들이 줄줄이 체포된 그야말로 빨갱이 소굴이 아닌가?​43 그렇지 않아도 눈의 가시인데다 이 사건으로 시끄러울 것을 생각하니 더욱 보기 싫었을 테다. 고종석은 항의하며 취재를 계속 하려다 그대로 멱살을 잡혀 끌려 나왔다.​44 

 

  그러나 이 때 가장 주류 한글 신문인 <<동아일보>>는 경찰이나 군, 총독부 관계자들의 책임문제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했다. 마산 지국 기자들이 취재했던 <<조선일보>>나 <<중외일보>>, 심지어 총독부 관영 매체인 <<매일신보>>도 이 문제를 언급할 정도였는데도, <<동아일보>>는 별다른 취재도 없이 넘어갔다. 주최 측이 공진회 개최 전에 경성에서 일간지 기자들을 초대했던 것이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언론사, 특히 <<동아일보>>가 홍보성 기사들을 많이 내보내고 지방 지국들이 관광단을 모집했으니, 이 참사에 책임 없다 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사건 현장에서 시신 수습 현장을 취재하고 경찰에 항의하며 「진해만 조난기」를 기사로 내는 등 적극적으로 활약했던 <<조선일보>> 마산지국 기자들은 넉달 뒤인 1927년 8월 전원 교체되고, 마산지국 자체가 거의 새로 구성되었다.​45   

 

  다른 사건에서도 대규모 해난 사고 이후 인양된 시신들에 대한 대우는 참담했다. 침몰 사고 이후 인양된 시신들은 마찬 하나에 시신 6, 7구를 짐짝마냥 포개 실어서 안치장소까지 운반했다. 심지어는 해상에서 표류하고 있는 시신을 발견해서 배에 끌어올리지 않고 발목에다 밧줄을 묶어서 항구까지 끌고 온 사례도 있었다.​46 

 

  진해의 축제 분위기는 이 사건으로 한 번에 사라졌다. 바로 옆 항만에서 배를 인양하고 시신 찾는 수색 작업을 한창 하는데다 유족들의 통곡이 끊이지 않으니 흥청망청 축제를 계속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주요 교통수단이던 여객선 운항이 중단되다시피 하고, 모두가 기차를 타러 몰려드는 바람에 역이 몸살을 앓았다. 벚꽃은 더욱 유명해졌지만, 이 사건의 기억은 꽤 오래 갔다. 일제하 진해에서는 소규모의 전시회 외에 더 이상 대규모 축제는 열리지 않았다. 

    

 

 

 5. 2016년 4월 

 

 

  꽃들이 아름다운 계절에 참담한 사고들도 같이 일어난다. 불시에 일어난 자연 재난이 아니라 대량 수송 체제와 대중적 소비 사회에서 나타나는 근대적 재해다. 근대 국가가 수행해야 할 기본적인 과제 중의 하나가 이런 대형 사고로부터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다. 국가가 모든 국민의 안전을 책임진다는 것은 민주주의는 물론이고 국민국가의 이념이다. 그러나 권력의 정치적 목적이나 자본의 이익을 위해 안전을 외면하는 일은 허다했다. 남자들에게 밀려나 선실을 벗어나지 못했던 희생자들은 “무식한 여자”들로 모욕당했다. 관리 책임을 져야할 경찰서나 부두 관계자들은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으며, 언론은 이 사건을 잊어버리거나 왜곡했다. 사건에 관심을 가진 기자들은 빨갱이로 취재 현장에서 쫓겨나고 신문사 지국에서도 밀려 났다. 이 기시감은 도대체 무엇인가? 

 

 

 

 

 

주석 

1) 「진해만 조난기 1~3」, <<조선일보>> 1927. 4. 16~4. 20 기사 원문은 千里龍이라는 필명으로 작성되었으며, 동행한 기자도 김군이라고만 되어 있다. 이 무렵 조선일보 마산 지국은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지국장 김상주를 비롯한 김형선, 김직성, 김종신 등 다수 기자들이 체포되거나 도피 중이었다. 체포되지 않은 김씨 기자는 1926. 1 임명된 김형윤이 유일하다. 김형윤도 마산 노동조합과 청년동맹에서 활약하다 옥고를 치르지만 1927년 4월에 구속되지는 않았다. 고종석은 1926년 12월 조선일보 마산지국 기자로 임용되었는데(<<1926. 12. 1), 그가 천리룡이 고종석이라는 확증은 없으나 불과 넉 달 뒤인 1927년 8월 조선일보 마산 지국이 총무 및 기자단을 전원 교체하는 것으로 보아 이날 취재했던 기자들은 고종석과 김형윤일 가능성이 높다.  (<<조선일보>> 1927. 8. 12)

2) 세미 디젤 엔진인 소구(燒球hot bulb)기관을 장착한 배들이다. 소구기관은 공기만 흡수한 후 연료를 직접 분사하는 것은 디젤 기관과 같지만, 디젤기관보다 분사 압력이 낮아 시동할 때 미리 버너 같은 것으로 실린더 헤드에 있는 소구를 가열해야 두어야 한다. 출력이 높지는 않지만 15~20마력부터 60~70마력 정도의 엔진에 적합했고 소형 어선이나 화물선에 많이 사용되었다.  2행정 기관이 외부에 노출되어 있으니 엔진이 돌 때 시끄러운 왕복음이 났고, 통통배니 똑딱선이니 하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김재근, <<續韓國船舶史硏究>>, 서울대 출판부, 1994, 236쪽; 정찬문, 배태열, 문훈영, 이철승, <<신 자동차 가솔린엔진>>, 골든벨, 2009, 35쪽 ; <<화학대사전>>, 세화, 2001 

3) <<동아일보>> 1927. 3. 16

4) 전근대와 근대 해상 교통 상황에 대한 서술은 이기훈, 「일제강점기 도서 지역의 교통과 일상생활」, <<도서문화>> 45, 2015의 내용 중 일부를 수정, 정리한 것이다. 

5) 나애자, <<한국근대해운업사연구>>, 국학자료원, 1998, 20쪽

6) 최완기,  <<한국의 전통선박 한선>>, 이화여대 출판부, 2012, 122~127쪽

7) 최성환,  <<문순득 표류 연구-조선후기 문순득의 표류와 세계인식->>, 민속원, 2012,, 98쪽

8) 임종길, <<조선의 해운경제-조운 시 해난사고를 중심으로->>, 위드스토리, 2011, 88쪽

9) 나애자, 앞의 책, 1998, 158쪽 

10) 임종길, 앞의 책, 125쪽

11) 정성일, <<전라도와 일본-조선시대 해난 사고 분석>>, 경인문화사, 2013

12) 나애자,  앞의 책, 1998, 55쪽 

13) 나애자,  위의 책, 235쪽 

14) 森川淸人 편, <<朝鮮總督府施政二十五周年紀念表彰者名鑑>>, 表彰者名監刊行會, 1935, 988쪽

15) 桀見熊吉, 平岡寅治郞 등이 영업을 처음 시작한 업자들이다.  木浦誌編纂委員會, 1914, <<木浦誌>>, 327쪽

16) 朝鮮郵船株式會社, <<朝鮮郵船二十五年史>>. 1937, 40~41쪽 ; 201~207쪽

17) 해운 산업의 현대화란 화물을 찾아 떠돌아 다니는 무역선들이 정기선 서비스로 전환하여 지정된 항구 사이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고정된 서비스를 제공하며 공동의 소유권이나 경영권 하에서 운항되는 것이다. 어니스트 페일 지음, 김성준 옮김, <<서양해운사>>, 혜안, 2004, 317~318쪽

18) 朝鮮郵船株式會社, 1937, 앞의 책, 119쪽

19) <<동아일보>> 1927. 5. 2

20) 행정기관이 보조금을 지급하며 특정 회사나 개인에게 정기적으로 취항하도록 지시한 항로를 명령항로라 한다. 선박의 크기와 취항횟수 등을 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총독부 명령항로, 도 명령항로, 군이나 부 명령항로 등이 있다. 

21) <<동아일보>> 1922. 5. 16

22) 군산선 철도가 개통된 이후 기선이 끊겼던 강경과 군산 사이에 1928년부터 영암운수창고회사가 20톤급 기선 月出丸을 투입하여 매일 1회 왕복하며 여객은 60~70전, 화물은 100근에 10전을 받았다. <<동아일보>> 1928. 1. 30

23) 「조선선박검사령 시행규칙(1928. 2. 1 개정)」 67조

24) 손태현 저, 임종길 편, <<한국해운사>>, 위드스토리

25) <<동아일보>> 1923. 11. 3 : 1923. 11. 4 :1923. 11. 5 

26) <<동아일보>> 1923. 11. 5 「朝鮮선박검사규정」

27) <<동아일보>> 1923. 11. 5: 1923. 11. 26 

28) <<동아일보>> 1930. 3. 4 ; 1930. 3. 5

29) <<조선일보>> 1937. 3. 23 ; 3. 25

30) <<매일신보>> 1932. 7. 2

31) <<매일신보>> 1936. 10. 16

32) 얼마나 많은 승객을 태웠는지도 정확하지 않다. 같은 신문에서도 기사에 따라 승선인원이 달라진다.<<동아일보>> 1927. 4. 13자는 약 160여명, <<조선일보>> 1927. 4. 12자는 약 200명, <<중외일보>> 1927. 4. 14일자는 본선에 170여명, 양쪽 배에 100여명을 태웠다고까지 보도하고 있다.  <<동아일보>> 보도는 회사측 주장을 근거로 한 것이지만, 검찰 조사 결과를 토대로 한 후일의 보도를 보면 약  200명 정도를 태운 듯하다. <<조선일보>> 1935. 3. 19 

33) <<중외일보>>  1927. 4. 14 : <<매일신보>> 1927. 4. 13. 

34) <<조선일보>> 1935. 3. 19

35) 국성하, 「일제 강점기의 박람회」, <<내일을 여는 역사>> 47, 2012

36) 신주백, 「박람회-과시  선전  계몽  소비의 체험공간 」, <<역사비평>> 67, 2004

37) <<매일신보>> 1927. 4. 9

38) <<매일신보>> 1927. 3. 14 ;  <<동아일보>> 1927. 3. 16

39) <<매일신보>> 1927. 3. 9

40) <<동아일보>> 1927. 4. 12 

41) <<동아일보>> 1927. 4. 10 

42) <<중외일보>> 1927. 4. 14 : <<매일신보>> 1927. 4. 15

43) 지국장 김주성이 도당 책임비서, 기자 김형선이 고려공청 책임비서였으며 기자 김직성과 김종신도 모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이귀원, 「1920년대 전반기 마산 지역의 민족해방운동」, <<지역과 역사>> 1, 부경역사연구소, 1996, 29~30쪽) 고종석과 김형윤도 마산청년동맹 등에서 활동한 사회운동가였다. 

44) <<조선일보>> 1927. 4. 19~1927. 4. 20

45) <<조선일보>> 1927. 8. 12 

46) <<매일신보>> 1936. 11. 20


- 이 글은 <<문화과학>> 2016년 봄호 (통권 제85호)에도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