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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철도의 또 다른 얼굴 : 사고, 재난과 민중 통제 - 이기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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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17-09-27 조회수 : 12,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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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철도의 또 다른 얼굴 사고, 재난과 민중 통제

 

 

이기훈 (역사문제연구소 부소장)

 

 

 

1. 철도, 근대의 상징

 

 

  장대한 체구를 이끌고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벌판을 가르고 달려가는 열차는 근대를 대표하는 풍경이다. 강철 궤도 위를 달려가는 증기기관차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속도와 수송능력을 과시했고, 다른 산업의 연쇄적 발전을 선도했다. 석탄, 철광석, 면화 등 산업원료를 엄청난 규모로 실어와 대규모 생산이 가능해졌고, 생산한 물품들을 멀리, 신속하게 판매할 수 있었다. 철도의 건설과 운영 자체가 근대 산업과 노동 시장 형성의 중요한 계기였다. 철도를 건설하는 데 철강 등 엄청난 자재가 필요했으므로 제철과 토목 산업이 급속히 발전했다. 철로를 깔고 역을 건설하고 기차를 운행하기 위해서 수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 기차역을 중심으로 교통 중심지가 새롭게 형성되기도 했다. 미국처럼 아예 철도 건설이 국가의 지역적 통합과 국민 의식 형성에 기여한 나라들도 많았다.비교할 수 없이 빠른 속도, 강력한 힘, 거칠 것 없이 직선으로 달려가는 시각적인 효과만으로도 철도는 진보와 활력, 문명과 산업화의 첨병이며, 상징이었다.

 

  그 저돌성만큼 철도는 위험한 교통수단이었다. 무게가 늘어날수록, 속도가 빨라질수록 사고가 났을 때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처음 대규모 교통수단으로 등장한 철도에서 안전은 거의 고려되지 않았다. 철도의 시작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을 수 있겠지만, 보통 증기기관차가 역과 역 사이의 철도노선을 정기적으로 운행하는 것을 철도의 시작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1825년 조지 스티븐슨이 만든 로커모션호가 스톡턴-달링턴 사이의 40km 구간을 운행한 것이 첫 철도일 터이다. 영국의 자본가들은 1930년 영국의 리버풀과 맨체스터 사이 50km 구간에 철로를 부설하고 콘테스트를 통해서 조지 스티븐슨과 로버트 스티븐슨 부자가 만든 로켓호를 열차로 선정했다.​2


  리버풀-맨체스터 철로가 본격적인 철도의 시대를 열었다 할 수 있는데, 바로 이 구간 개통 축하 운행에서부터 사고가 났다. 1830915일 철도 개통 축하 열차가 초대 손님들을 태우고 리버풀을 떠나 맨체스터로 갔다. 기차의 속도는 시속 20km 정도였고, 철로에 별다른 시설도 없었으니 철마(Iron horse)라는 말 그대로 당시 영국인들도 기차를 아주 큰 마차 정도로 생각했다. 중간 역에 잠깐 정차했을 때 승객 중에 한 사람인 허킨슨 경은 맞은 편에서 웰링턴 후작을 발견했다. 허킨슨 경은 평소 마차가 다니던 대로를 건너가던 것처럼 스스럼없이 선로를 가로질렀지만, 그 선로에는 맨체스터에서 리버풀로 오던 로켓호가 진입하고 있었다. 마차라면 즉시 멈췄겠지만, 초기의 열차는 제동장치가 제대로 없었다. 기차는 그대로 허킨슨 경을 덮치고 말았다.​3 이후 브레이크, 무선, 신호기 시스템 등이 개발되면서 철도 안전 문제도 개선되었지만, 20세기 초까지도 안전보다 속도와 힘, 거리가 우선이었다. “문명이란 전쟁터이며, 기기에선 모두가 싸움에 승리하고 전진하기 위해서 희생자도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4

 

  일본에서는 1872년 도쿄의 신바시(新橋)와 요코하마(橫浜) 사이 운행되었는데, 일본에서도 크고 작은 교통사고는 많이 일어났다. 대표적인 것이 190010월 도치기현에서 일본철도회사의 열차가 강으로 추락하는 바람에 20명이 목숨을 잃고 45명이 다치는 사건이다. 그러나 초기에는 승객이나 보행자보다 철도 종사자들이 차량 연결 작업을 하면서 다치는 일이 아주 많았다. 1914~19152년간 차량 연결에 종사하는 직원 1,810명 가운데 사상자가 537명이나 발생했다고 한다.​5 종사자들의 피해가 많다 보니 1910년 이후 조선총독부가 철도 사고의 통계를 낼 때에도 승객, 종사자, 통행자 등 일반인들의 피해를 따로 산출했다.

 

  한국에서는 서양이나 일본보다 한참 늦은 1899918일 서울과 인천을 잇는 경인선 철도가 처음 개통되었다. 그러나 곧 지구상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이후 철도는 한국 근대의 결정적인 풍경 중 하나가 되었다. 한국의 철도 건설과 운영은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결정되었다. 청일전쟁 이후 러시아와 경쟁하던 일본은 대륙침략과 식민 지배를 위해 한반도를 관통하는 철도 부설을 서둘렀다. 그 결과 경부선과 경의선이 1905년과 1906년 완공되었고 일제는 통감부에 철도관리국을 두고 본격적인 철도 경영을 시작했다.​6


  한국에 철도가 완공되고 기차가 다니면서 바로 사고소식이 전해지기 시작했다한국에 철도가 완공되고 기차가 다니면서 바로 사고소식이 전해지기 시작했다<<황성신문>> 19011216일자에는 경인철도 기차가 부평역을 통과할 때 일본인 한 사람이 선로에 투신 사망했다는 기사가 처음 등장하며, 이후 중국인 행상이나 한국인 보행자들이 기차에 치여 사망했다는 기사들이 종종 등장한다. 또 경부선 철도가 개통된 이후에는 더운 여름에 철로를 베고 자다가 기차에 치여 사망했다는 소식이나 수레나 말을 끌고 철로를 건너나 변을 당하는 사례들도 나타난다.​7  이 무렵 철도는 일본 침략의 첨병으로 의병의 공격대상이 되었다. 1907년 마곡사 부근에서 의병들이 소정리역을 공격했고, 1909년에는 이원역을 공격하기도 했다.​8


  한편 일제는 경부선과 경의선 철도망에 주요 도시와 항구들을 연결하는 간선도로도 만들기 시작했다. 개항장과 주요 도시, 간선도로를 연결하는 도로망 건설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일제는 1905년 조사단을 파견하여 한반도의 도로 노선을 조사하도록 했고, 1906년부터 신작로 건설 사업에 착수했다. 1907~08년 군산-전주선 등 7개 노선에서 공사가 시작되었으며 1909~1014개 노선에서 도로개수사업이 시작되었다.​9 이어 1910년부터 1914년까지 한반도 전체를 망라하는 철도망을 구축하기 위해 호남선과 경원선을 부설했다. 이후 식민지 근대 조선사회에서 철도사고가 어떻게, 얼마나 발생했고 사람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자.

 

 

2. 식민지 조선에서 철도사고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조선총독부통계연보는 1910년부터 1931년까지 매년 철도 사고 현황에 대한 통계를 냈다. 우선 피해자의 신분에 따라 열차에 탄 승객, 철도에 고용된 직원, 그리고 일반인으로 구분했다. 일반인(원래 표에는 公衆)은 보행자나 주민 등 승객이나 철도 종사자가 아니면서 사고를 당한 모든 사람들이 포함된다. 그리고 다시 사고의 원인에 따라 사고, 과실, 자살, 원인불명(원래 통계표에는 不詳으로 처리되었다)으로 구분했다. 조선총독부 철도국의 규정에 따르면 철도 사고는 營業사고, 運轉사고, 庶務사고로 나뉘는데, 일반적인 사고란 운전 사고를 뜻한다.​10 통계연보의 자료에서 사고는 천재지변 등 불가항력의 경우나 기계 결함 등을 가리키는 듯하며, 과실은 피해자 혹은 종사자의 과실을 포함하는 듯하다. 사고의 원인을 철도 당국의 책임이 아닌 듯하게 보이려는 술책이지만, 이 분류에 의한 철도 사고 피해의 추이를 정리하면 다음 표 1, 2, 3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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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드러진 특징은 압도적으로 일반인들이 많다는 점이다. 철도 종사자는 물론이고 승객보다 일반인들의 피해가 훨씬 많다. 통계에는 자살의 방법으로 철도를 택한 자살자들도 포함되어 있어 순전한 사고 피해라고만 볼 수는 없으나 자살자의 수를 빼더라도 일반인 사고피해자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다. 식민지 조선에서 철도 사고가 대부분 기차와 보행자, 또는 주민들 사이에서 일어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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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원인불명의 사고도 많다. 특히 사망사고가 많은데, 원인을 알 수 없거나 밝혀내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1923년 일반인 철도 사망자 중 원인불명이 32명이나 된다. 밤늦게, 혹은 새벽에 열차 사고가 발생했을 때 기관사 등이 모르고, 무시하고 지나쳐 버리면 다음날에나 처참한 시신으로 발견된다. 예를 들어 19186월 용산 육군 창고 뒤 열차 선로에서 일본인 모녀의 시신이 발견되어 자살로 처리되었지만, 다른 곳에서 살해되어 유기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11  1018일 아침 신용산소학교 뒤 철로 선로에 두개골이 파열되고 허리가 부러진 시신이 발견되었다. 탐문 끝에 만주철도주식회사 경성 관리국의 일본인 직원으로 밝혀졌지만, 과실인지 자살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12 1933년 경성의 서빙고와 한강리 사이 철길에서 서빙고리에 사는 성원길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전날 동네 상갓집에서 밤을 새우고 돌아가는 길이었다는데, 자살로 처리되었지만 역시 알 수 없는 일이다. ​13

 

  승객들이 사망하거나 부상하는 사고는 대부분 기차가 충돌하거나 탈선하는 사고들이다. 1911429일 경부선 왜관에서 열차가 정면, 충돌해서 21명의 중경상자가 생긴 사고, 19221119일 경의선 남시(南市)-차련관(車輦館) 구간에서 공사 중인 선로를 지나던 제2열차의 기관차와 객차 두 대가 전복, 추락하여 승객 1명과 기관사가 즉사하고 40여 명이 중경상을 입은 사고가 대표적이다. 이 무렵 열차들은 속도가 그렇게 빠르지 않아 충돌로 인한 사상자는 요즘보다 적은 편이었다. 오른쪽 사진은 화물열차가 인천으로 가던 여객열차를 측면에서 충돌하여 기관차가 넘어지고 객차들이 탈선한 사고 현장인데, 15명이 경상을 입는 데 그쳤다.​14



  192338일 새벽 경부선 밀양-삼랑진 구간을 부산행 급행열차 운행 중이었다. 봄이 왔지만 아직 선로 옆 야산의 경사면은 아직 얼어있었는데, 전날 비가 오면서 토사들이 녹기 시작해 산사태가 일어났다. 바위와 흙이 열차를 덮쳤고, 기차는 30피트의 절벽으로 추락했다. 승객 1, 기관차 승무원 2명이 사망하고 29명 중상, 27명이 경상을 당했다. ​15 1934827일 함경북도 나남과 경성을 운행하던 열차가 탈선, 전복되어 8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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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충돌로 탈선한 경인선 열차. <<동아일보>> 1929.8.5.

 

 

 

  한편 1930년대 후반에는 버스 통행이 많아지면서 열차와 자동차 사이의 교통사고가 자주 일어났다. 19385월 대구에서 열차와 자동차가 충돌하여 2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한데 이어, 12월에는 북청에서 함흥으로 활동사진 구경을 갔다 돌아오는 승객을 태운 버스가 화물열차와 충돌, 2명이 사망하고 25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근무자가 없는 무인 건널목을 지나던 버스를 임시 화물열차가 그대로 충돌하면서 참사를 일으킨 것이다.​17  얼마 지나지 않은 1216일에는 함북선 열차가 산간지역을 통과하다 탈선 전복되었다. 해발 330m의 차수령 중턱인데다 급경사 지역으로 4명이 목숨을 잃고 40여 명의 중경사자가 발생했다.​18

 

  그러나 가장 많이 일어나고 피해가 컸던 것은 열차가 보행자나 피서 중인 주민들을 덮치는 경우였다. 한국에 기차가 달리기 시작한 이후 1980년대까지 계속 철로 피서는 사고의 중요한 원인이었다. 특히 레일을 베고 자거나 철길에서 피서를 즐기다가 사고를 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요즘 같으면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일이지만,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철제 레일, 침목, 자갈로 만든 철로가 온도가 빨리 내려가니 해가 지고 나면 차가운 레일이 시원했던 탓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철로 자체가 천변의 자연 제방이나 긴 구조곡 등에 건설되다보니 철로 주변이 가장 시원한 곳이었던 경우가 많았다. 즉 주민들의 입장에서는 철로를 무단 점거하여 피서를 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주민들이 다니던 길이나 바람을 즐기던 장소를 철도가 차지하고 못 들어오게 막고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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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1935년 함흥의 철도 사고 현장. <<동아일보>> 1935.8.12(3)

 

 

   1935년 함흥에서 일어난 대형 철도 참사가 이런 사례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193589일 저녁을 먹고 난 흥시내 북부정 주민들이 함경선 철길 주변에 모여 앉아 많은 사람들이 모여 앉아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제방 위에 함경선 본선과 조철선(朝鐵線)이 놓였지만, 원래 강바람이 부는데다 저녁이 되면 철길의 온도가 빨리 내려가면서 주변보다 한결 시원했다. 제방 자체가 바람을 막으니 마을이 더울 수밖에 없었던 함흥부 본정 5정목 주민들은 늘 저녁을 먹고 철로 제방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산보를 즐겼다. 기차에 주의하라는 팻말이 있기는 했지만 오른쪽 사진에서 보듯이 진입을 막는 울타리도, 보호 시설도 전혀 없었다. 기차들이 이 지점을 통과할 때면 옆 선로로 비키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9일 밤 함흥에서 경성으로 가는 급행열차가 평소보다 7분 늦게 출발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함경선 본선에는 급행열차가, 경편 기차선로인 옆의 조철선 선로에는 오로리(五老里)로 가는 기동차(rail car)가 나란히 달려오게 된 것이다.​19 급행열차 기관사는 주민들에게 경고하기 위해 기적을 울리며 달려왔으나 주민들은 평소처럼 조철선 선로 쪽으로 피했고, 300여명의 승객을 싣고 어둠 속을 달려오던 전동차 운전수가 이들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15명이 목숨을 잃었고, 16명이 부상을 당했다. 가족들이 함께 나왔다 한꺼번에 목숨을 잃기도 했다.​20


  다음은 19314월에서 6월 사이의 철도 사고 통계다.​21 가장 많은 것은 철로를 통행하다 기차에 치이는 사고들이다. ‘통행이라고는 하지만 철로를 횡단하는 것은 물론, 철길을 따라 걷거나 어린이들이 철길 주변에서 놀거나 방황하다 일어나는 사고까지 모두 포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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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5, 6월로 접어들어 날씨가 더워지면서 사고가 더 늘어나는 면을 보인다. 폭염 속에 걷기 쉬운 철길을 따라 걷거나 레일을 베고 자는 사례들이 늘기 때문이었다. 더운데 철길을 따라 걷다니 지금으로서는 상상이 되지 않는 일이지만, 이 무렵 철길들은 예전부터 사용하던 대로들이나 하천의 제방과 같이 자연스럽게 형성된 통행하기 쉬운 통로들 위에다 만든 경우가 많았다. 특히 밤이 늦어 더 이상 기차가 다니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사람들은 자리까지 깔고 드러누워 더위를 피하기도 했다. 1933710일 새벽에 대전에서 호남선 남행 임시열차가 편성되었다. 이 기차는 새벽 1시가 넘어 논산-강경 구간을 고속으로 통과했는데, 아침에 다음 열차가 지나면서야 비로소 끔찍한 사고 현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마도 강경역 전의 강경천 철교 부근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미 기차는 다 지나갔다고 생각한 주민 세 사람이 강바람을 맞으며 철로를 베고 잠들었던 모양이다. 한 사람의 시신은 심하게 훼손된 상태로 철교 아래에서 발견되었고, 나머지 두 사람은 천 가운데에서 겨우 찾아냈다.​22

 

  일제 당국도 이런 사고가 너무 자주 일어나니 사고 방지를 위해 전단을 살포하기도 하고, 단속도 시행했지만, 무엇보다 우선되었던 것은 기차를 예정대로 계속 다니게 하는 것이었다. 19261123일 밤 함경남도 정주에서 27세의 청년 김명오가 부근 잔칫집에 다녀오다 술에 취해 철도 레일을 베고 잠들었고 기차에 치여 목숨을 잃었다. 열차가 사고를 수습하면서 연착한 시간은 약 10분이었다.​23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은 1927123일 오후 5시 함경남부선에서 황소가 열차 정면으로 뛰어드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를 수습하고 열차가 지연된 시간은 15분이었다.​24 사람보다 소 사고 수습에 더 시간이 많이 걸린 것은, 소가 훨씬 더 컸기 때문일 것이다. 인명사고가 밤에 발생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소 사고 쪽이 두 배는 더 걸렸을 수도 있겠다. 사고가 났다는 것, 정시 운행에 차질이 생겼다는 것이 문제지, 극단적으로는 사람이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사실 철도 종사자들은 정시 운행과 사고 배제에 극단적인 스트레스를 받았다. 매포역 선로관리를 담당하던 일본인 관리자는 임시급행열차의 탈선 사고에 책임져야 한다는 의식에 시달리다 신경쇠약과 정신분열을 일으켰다. 결국 그는 자기 가족을 모두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25




3. 교통 규율과 통제 - 규칙, 법령, 취체

 

  철도가 제공한 속도는 더 많은 이익을 축적할 기회를 제공했지만, 그 기회는 제한되어 있었다. 또 이 속도를 활용할 정보와 재력을 지니지 못한 사람들에게 철도와 신작로, 자동차 같은 빠른 속력과 가공할 힘의 근대적 교통수단들은 위험한 공간이었다.​26 기차를 타고 여행하거나 자동차로 신작로를 다닐 수 있다면, 근대 권력과 자본이 제공하는 속도와 안전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안전과 속도는 자본과 지식을 함께 요구했다.

 

  승차권 없이는 기차에 오를 수 없었다. 무임승차는 엄격히 금지되었고, 철로와 철교는 기차가 독점했다.​27 철도 교통을 위협하는 행위들은 엄격히 처벌되기 시작했다. 이미 1900년 대한제국 정부는 철도사항 범죄인처벌례(鐵道事項 犯罪人處斷例)를 공포했다. 철로나 기차에 직접 위해를 가하는 행동은 당연히 중형에 처해졌고, 단순히 철로를 침범하거나 기차가 운행 중에 승하차하기만 해도 벌금이나 태형에 처해졌다.​28 일본 본국처럼 철도경찰 제도를 운영하지는 않았으나 부분 일본인들이 근무하던 철도국 직원들은 조선 민중들에게 경찰과 같은 존재였고, 자칫하면 철도의 차장이나 선로 감독에게 횡액을 당하기도 했다. 나주군 평동면에서는 호남선 철로를 넘어가는 조선인 노인을 일본인 선로감독이 지니고 있던 철봉으로 때려서 목숨을 잃게 만든 사건이 대표적이.​29


  기차는 정시에 항상 출발했으니 시계가 없다면 기차를 제대로 탈 수도 없었다. 또 더 멀리 여행하려면 다른 곳의 기차 시간, 배 시간도 함께 알아야 했으니 신문과 관보와 같은 정보매체들을 입수하고 읽을 줄도 알아야 했다. 인구의 70% 이상이 문맹이었던 식민지 조선에서 이런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였다. 특히 공공장소와 운행 시각표 등 근대적 시간과 공간 규율, 철로와 철교 통행금지 등 교통 규율을 이해하고 적응하기 위해서는 규율된 신체와 계몽된 의식, 비용을 지출할 경제적 능력을 모두 갖추어야 했다.

 

  교통사고 희생자들 가운데는 술에 취한 사람들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어린이나 노인, 장애인 등 정보와 규율 습득에 불리한 사회적 약자들이었다. 어린이 중에서도 가난한 도시빈민 자녀들의 희생이 많았다. 철로 변에서 놀거나 방치되었다가 사고를 당한 것이다.​30 노인들이 철교를 건너다 사고를 당하는 일도 빈번했다. 특히 노인들은 철도의 원리 자체를 수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193912월 숙천의 한 노인은 경의선 철로 위에서 기차가 오기를 기다렸다. 멀리 기차가 보이자 손을 흔들기 시작했고, 기적을 울려도 비키지 않았다. 결국 기차는 서야 했고, 노인은 기차에 탔다. 자동차는 손을 흔들면 세워 주는데, 기차는 왜 안 되느냐는 것이었다.​31 극단적인 사례기는 하지만 근대적인 교통 규율을 근본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례들은 꽤 많았다.

  

  특히 철도와 철교가 보통 도로와 다르다는 점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실제 일제가 부설한 철도와 신작로는 이왕 발달해 있던 지역들을 연결하는 경우에는 대체로 기존 대로 위에 건설하거나 바로 옆에다 만드는 경우가 꽤 있었다. 예를 들어 전남 지역은 조선시대부터 노령(갈재)를 넘어서 장성-광주-나주-영함-해남을 연결하는 해남로가 주요한 길이었는데, 1914년 완공한 호남선 철도도 갈재를 넘어오는 해남로를 활용하여 건설했다. 다만 고개를 넘어오는 것이 아니라 두개의 터널을 뚫고 장성으로 진입하는 점이 달라졌지만, 노인들의 입장에서는 원래 다니던 길에 철로가 놓였는데 왜 못 지나다니는지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32 게다가 시-분으로 나누는 시각표 개념은 더 어려웠을 터였다.

 

  이런 점은 조선총독부의 관영매체인 <<매일신보>>조차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철도 사고의 가장 다수를 차지하는 것이 교량의 무단 통과인데, 이는 철교는 생겼지만 사람들이 통행할 다리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신문 기사에는 간단히 나오지만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33 단순히 사람이 건너갈 교량이 없어 불편한 정도가 아니었다.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을 대표하는 영화가 임자 없는 나룻배. 이규환이 감독한 이 영화에서 나운규가 맡은 주인공 춘삼은, 농촌에서 토지를 잃고 밀려나 경성에 와 인력거를 끌고 생계를 유지한다. 그러나 아내가 병에 걸리자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도둑질을 하다 감옥에 가게 되었고, 출옥해 보니 아내는 다른 남자와 살고 있다. 절망한 춘삼은 고향에 돌아와 나룻배 사공이 되었으나 강에 철교가 생기면서 나룻배 사공의 생계조차 위협받는다. 결국 춘삼은 행패를 부리던 공사 감독을 죽이고 뛰쳐나가 도끼로 철교를 부수려하다 기차에 치여 목숨을 잃는다. 강가에 임자 없는 나룻배만 남는 것이다.

 

  철교가 생기면서 나룻배들이 다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실제 물동량의 상당 부분이 사라졌으니 타격이 클 수밖에 없었을 터였다. 많은 사람들이 철교를 건너다 사고를 당했다. 기차나 자동차를 이용할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겠지만, 기차 시간을 잘 아는 젊은이들도 무난히 철교로 강을 건넜다. 그러나 점심참을 이고 가던 부녀자, 노인 행상, 장을 보러 가던 자매 할머니, 소지품조차 없는 떠돌이, 두부장수 행상들이 철교 위에서 기차에 치이거나 기차를 피해 강으로 뛰어들다 목숨을 잃었다.​34

 

 

4. 스피드의 희생자들 강기문의 경우

 

  그런데 그들은 왜 반드시 강을 건너거나 철로를 따라 걸어야 했을까? 물론 철도가 생활공간을 강제로 나누면서 위험을 무릅쓰지 않을 수 없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를 마중 나간 소년이 기차에 치이거나 새참을 건네기 위해 철교를 건너는 경우가 대표적이겠다. 그러나 철도로 대표되는 교통수단의 급격한 발달이 민중들이 생존을 위해 더 많이 이동하지 안 되는 조건을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당연히 먼 거리의 이동을 위해 필요한 조건을 갖추지 못한 민중들은 이동에 따른 위험과 노력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예를 들어 보자. 1930년 전남 장성군 북상면 용곡리에 살던 강기문(姜基文)은 농사만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었다. 지금은 장성댐 아래 수몰된 용곡리는 백양사로 들어가는 긴 골짜기 초입에 있는 마을로 논밭이 별로 없었다. 그나마 1920년대 이후 소작권 이동이 많아지면서 농사만으로 먹고 살기는 힘들었다. 강기문은 용곡리 주변의 목재를 구해다가 밥상이나 소반을 만들어 장에 내다 파는 일을 했다. 그가 성장기를 보내는 동안 세상은 엄청나게 변했다. 그가 어릴 때만 해도 이제 막 호남선 기차가 다니는 정도였는데, 이제 전라도 곳곳에 기차와 자동차들이 다니고 있었다. 그만큼 장사를 하려면 멀리 돌아다녀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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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두 지도에서 보듯 1917년 경성-송정리-나주-목포를 연결한 호남선 철도와 대표적인 신작로인 광주-목포 간 1등도로(오늘날의 국도 1호선), 목포-해남간 2등도로(오늘날 국도 2호선)만 연결되어 있었을 뿐이다.​36 그러나 1922년 송정리에서 광주를 거쳐 담양까지 운행하는 광주선 철도가 개통되었고,​37 193012월 광주-여수를 잇는 광려선이 완공되었다. 193612월에는 이리(현재 익산)-전주-남원-순천을 잇는 전라선이 완공되어 전남 전체를 포괄하는 철도와 신작로 교통망의 틀이 갖추어졌다. 기차로 물건을 옮길 수 있는 상인들이 거침없이 시골 장까지 다닐 수 있으니, 행상들은 더 멀리 더 열심히 돌아다녀야 했다. 강기문은 광주 비아장을 거쳐 송정리에서 하룻밤을 묵고 나주장까지 가서 상을 팔기로 했다. 원래 나주가 소반 등이 더 유명한 곳이니 그곳에서 장사를 하는 것이 더 유리할 것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장성에서 나주까지 기차삯만 6원이다. 이 무렵 가난한 농민들은 연소득이 100원이 못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당연히 걸어가야만 했다.

 

  그러나 나주 근처까지 와서 보니 큰 비가 내려 원래 건너다니던 나무다리가 물에 잠겼다. 장에 가는 걸 포기할 수 없었던 강기문 일행은 상을 짊어지고 철교를 건너기 시작했다. 이때 나주역에서 송정리역으로 가던 호남선 기차가 다가오고 있었다. 열차는 철교 바로 앞에서 급히 멈춰 섰다. 일본인 열차 차장이 다리를 건너 땅으로 내려온 이들을 뒤쫓았고 결국 물가에서 잡힐 지경이 되었다. 너무 놀란 강기문을 짊어지고 있던 상을 버리고 강물에 뛰어들었다 목숨을 잃고 말았다.​38

 

  이 사건은 근대적 교통수단이 급속히 확산되는 가운데 소외된 자들의 고통을 여실히 보여준다. 원래 그 기차는 그가 타고 집으로 돌아가야 할 기차였다. 그러나 상을 팔러 다니는 행상인으로서는 도저히 그럴 여유가 없었다. 결국 장성에서 송정리까지, 다시 송정리에서 나주까지 걸어서 갔다 걸어서 돌아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원래 기차를 타고 지나가야만 하는 길을 가난한 민중들은 걸어서 건너려 했다.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고, 원래 다니던 길이었지만 불법이었다. 민중들에게 순사와 차장은 크게 구분되지 않았다. 식민지 권력의 폭력에 대한 공포 속에서 강기문은 목숨을 잃었다. 돌진해 오는 기차나 그를 잡으러 뛰어오는 열차 차장이나 그에게는 마찬가지였던 것일 터였다. 철도와 같은 근대 교통체제의 변화는 일상의 원리를 변화시켰다. 그런데 이 변화된 원리, 규율체제를 빨리 수용할 수 없었던 민중들에게 그 변화는 자칫 목숨이 걸린 문제가 되었다. 수많은 식민지 조선의 철도 사고들은 이런 고통의 흔적들이다.







 

주석 


1) 정재정, 2005, 「일제침략과 한국철도』서울대 출판부, 1999

 

2) 백남욱이상진『철도관련큰사전』골든벨, 2007

 

3) 야마노우지 슈우이치로 저김해곤 옮김『철도사고 왜 일어나는가』논형, 2004, 27~29.

 

4) 야마노우지 슈우이치로 저김해곤 옮김『철도사고 왜 일어나는가』논형, 2004, 33.

 

5) 한국철도기술연구원 엮음『일본 철도의 역사와 발전』북갤러리, 2005, 160~161차량을 연결하는 자동연결기가 도입된 후 직원 사망자 수가 급격히 줄었다고 한다.

 

6) 정재정「근대로 열린 길 철도」『역사비평』 760, 2005, 223~225.

 

7) 『황성신문』  1902. 5. 19(2) 『황성신문』 1908. 2.23(2) 『황성신문』  1908. 7. 28(2) 『황성신문』 1909. 3. 10(2).

 

8)「汽笛 들린 지 三十年 十二」『동아일보』 1930. 12. 6(2).

 

9) 이기훈「일제하 전라남도의 육상교통망 형성과 일상의 변화」『지방사와 지방문화』, 13-2, 2010.

 

10) 「鐵道事故는 엇지하야 생기나 一」『매일신보』 1929. 5. 21(2).

 

11) 『매일신보』 1918. 6. 15(3).

 

12) 『매일신보』 1918. 10. 20(3).

 

13) 『매일신보』 1933. 7. 13(7). 

 

14) 『동아일보』 1929. 8. 5(3).

 

15) 「汽笛 들린 지 三十年 十二」『동아일보』 1930. 12. 6(2).

 

16)  동아일보 1934. 8. 31(3).

 

17) 『동아일보』 1938. 12. 4(3).

 

18) 『동아일보』 1938. 12. 17(3).

 

19) 보통의 열차는 기관차가 스스로 승객이나 화물을 싣지 않고객차와 화차를 끌고 운행한다철로 위를 운행하지만 기차관차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소형의 디젤 혹은 가솔린 엔진을 장착한 차량이 직접 승객과 화물을 싣고 운행하는 것을 기동차라고 했다

 

20) 『동아일보』 1935. 8. 10(3) ; 8. 12(3) : 1935. 10. 4(2).

 

21) 『매일신보』 1931. 9. 9(2).

 

22) 동아일보 1933. 7. 12 (3) 여름 철로에 주의.

 

23) 『시대일보』 1926. 11. 25(3) ; 『매일신보』 1926. 12. 2(3).

 

24) 『매일신보』 1927. 1. 26(2) 철도사고의 원인 보통교량.

 

25) 『동아일보』 1939. 4. 27(3).

 

26) 이 무렵 교통선전가 등을 만들어 전단으로 배포했는데마차와 자동차자전거가 오고가니 도로의 규칙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동아일보』 1921. 8. 3.

 

27) 철도를 운행하면서 일본정부는 1872년 태정관 포고 61호 鐵道略則 및 태정관 포고 147호 鐵道犯罪罰令 공포했다철도약칙은 1조에서 열차를 이용할 때는 누구나 먼저 운임을 지불하고 승차권을 구입해야 한다고 하여 근대 사회에 있어서 철도 이동의 기본 규칙을 확인했으며, 2조에서 검표의 원리, 4조에서 부정승차 금지, 5조에서 운전 중 승차 금지 등을 확정했다(한국철도기술연구원 엮음, 2005, 앞의 책 62~65).

 

28) 日省錄 光武 3 12 23日 高宗實錄 光武 4 1 23  官報 光武 4 1 25이 법령은 1912년 조선형사령 시행과 함께 폐지되고 일본의 철도관련 법령들이 적용되었는데교통방해죄 등이 적용되면서 처벌이 더 강화되었다.

 

29) 『중외일보』 1927. 8. 9(3).

 

30) 도시 거주 5세 이하 아동들이 많았다. 1934년의 몇 사례들만 보아도 『매일신보』 1934. 4. 7(5) ; 『매일신보』 1934. 8. 9(5) ; 『每日申報』 1934.10. 16 등이 있다.

 

31) 노인은 원하는 대로 기차에 타기는 했으나 숙천읍내에서 경찰에 넘겨졌다『동아일보』 1939. 12, 23(6).

 

32) 도도로키 히로시『도도로키의 삼남대로 답사기』성지문화사, 219~223.

 

33) 『매일신보』 1927. 1. 26(2).

 

34) 『동아일보』 1929, 12, 31(3) ; 1931. 6. 23(3) ; 1931. 10. 7 (3) ; 1933. 5. 16(3) ; 1933. 9. 16(7).

 

35) 이기훈「강기문씨 따라가기-식민지 한 행상의 삶과 길」『역사문제연구』 28, 2012 참조.

 

36) 그림은 이기훈, 2010, 앞의 글, 92.  현재의 국도 1, 2호선과 일치하지는 않는다최근 국도 구간들이 대부분이 직선화되고 구간별로 자동차 전용화되면서 이전 국도는  폐쇄하거나 지방도가 되었는데이 도로들이 과거 신작로들이다

 

37) 원래는 사설철도였으나 1928년 조선총독부가 국유화하고 전남선으로 이름을 바꿨다경전선 구간으로 사용하다 광주시 외곽으로 이전함으로써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38) 『중외일보』 1930. 5. 1.

 



- 이 글은 <<문화과학>> 2016년 여름호 (통권 제86호)에도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