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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와 재난: 한국 근대의 두 얼굴 - 이기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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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17-12-07 조회수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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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와 재난 한국 근대의 두 얼굴

 

 

이기훈 (역사문제연구소 부소장)

 

 

1. 197010월의 수학여행

 

 

그런 때가 있다. 유난히 대형 사고가 많이 나는 시절이. 1970년이 그랬다. 정말 어이 없는 사고가 많았다. 197048일 아침 마포구 창천동 산 1번지 와우아파트 제 155층 건물이 그야말로 폭삭 내려앉았다. 18세대 65명이 입주해 있던 이 건물이 형체도 없이 무너져 내리면서 입주자들은 생매장되었고, 급히 구조를 했지만 결국 33명이 목숨을 잃었다. 인천제철의 용광로가 준공 13일 만에 열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녹아 내려 10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고, 1215일 서귀포에서 부산으로 가던 정기여객선 남영호가 여수 앞바다에서 침몰하여 326명의 승객이 목숨을 잃었다.

 

1970년은 현재 한국을 형성해 온 압축된 근대 프로젝트의 과정에서 개발에 필연적으로 결합되어 있던 위기가 폭발적으로 드러나는 시기였다. 무절제한 개발과 통제되지 않는 이익 추구, 엄청나게 높은 노동 강도, 권력과 자본의 어두운 결탁, 고질적인 부패가 초래한 위기는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오는 연속적인 재난으로 귀결되었다. 그런데 1970년의 사고 가운데 유난히 수학여행과 관련된 대형 참사들이 많았다. 그 전에도 수학여행에서 사고가 나는 일이야 있었지만, ‘참사라고 해야할 정도로 큰 희생이 나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19701014일 한창 수학여행과 단풍놀이가 절정일 무렵 서울 경서중학교 3학년 학생 들은 아산현충사에서 돌아오고 있었다. 9개 반 475명의 학생에 교사가 11명이니 480명이 넘었지만 버스는 7대밖에 빌리지 않았다. 좌석 46, 입석까지 포함해 62명이 정원인 버스 한 대에 근 70명 이상 태워야 했다. 버스 6대는 경남관광회사 소속이었지만, 나머지 한 대는 연흥관광 소속이었고, 연흥관광 버스 기사는 연이은 근무에 혼자만 따로 있어야 하는 조건에 불만이 많았다.

 

아산 현충사에서 천안을 거쳐 서울로 가기 위해서는 모산역 부근에서 장항선 철도를 가로 질러야 했다. 현충사의 성역화 이후 이 모산 철도건널목은 차량 통행이 부쩍 늘어 많을 때는 하루 5,000대의 차량이 지나는 곳이라 입체 교차로를 만들 계획까지 수립해 놓았으나 이날까지 아무 조치도 없었다. 그래서 차단기도 없이 일단 멈춤 표시판과 경고등, 자동경보기만 있는 상태였다.

 

오후 420분 경서중학교 학생들을 실은 버스들이 이 곳에 접근했다. 원래대로라면 1호차가 먼저 와야 했지만, 3학년 3반과 4반 학생들을 태운 연흥관광 소속 5호차가 먼저 달려 왔다. 4반 담임교사가 착각한 것도 있고, 5호차 운전기사가 서두른 탓도 있어 5호차에는 교사가 탑승하지 않은 상태였다. 기사는 원래 순서보다 먼저 출발해 버렸고, 다른 버스들이 그 뒤를 따라 왔다. 학생들은 함께 노래를 부르며 수학여행의 마지막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이 모산 건널목 옆에는 15미터 높이의 방앗간 건물과 민가들이 늘어서 있어 천안에서 장항으로 가는 기차가 잘 보이지 않았다. 또 기차 쪽에서도 곡선 구간인데다 이 정미소 건물로 버스가 접근하는 것이 잘 보이지 않았다. 경보등의 빨간 불이 깜빡이고 자동경보기가 울렸지만 버스는 시속 60로 건널목을 통과하려 했다. 목격자들은 기차가 달려오는데 버스가 들어 왔다고 했다. 서울발 장항행 151열차의 기관차가 버스의 왼쪽 가운데 부분을 그대로 들이 받았다. 기관사는 급제동을 걸었지만 버스와 충돌한 채 80여 미터나 가서 멈출 수 있었고, 이미 버스의 연료 탱크에서 흘러 나온 휘발유에 불이 붙어 앞쪽부터 불길이 치솟았다. 기차는 멈췄지만 화재는 치명적이었다. 소방대가 오기까지 약 1시간 동안이나 화재가 계속되었다. 충돌 순간에 차 밖으로 튕겨져 나온 학생들은 중상을 입긴 했어도 목숨을 건졌고, 불이 그나마 늦게 번진 뒤쪽의 학생들은 차 밖으로 탈출할 수 있었지만, 나머지 학생들은 불길을 피하지 못했다. 운전기사와 경서중학교 학생 45명이 숨지고, 30명이 중경상을 입었으며 단 두 명만이 무사히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주변의 주민들이 급히 달려와 구조했지만 시간도 거의 없었고, 불을 끄고 난 뒤 드러난 사고 현장은 희생자들의 시신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 사고 다음날인 1015일 서울시 교육위원회는 버스로 수학여행과 소풍 가는 것을 일단 금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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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  모산 건널목 사고 현장. 왼쪽이 사고 버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

 

 

  불과 사흘도 지나지 않은 19701017일 오전 1057분 서울발 경주행 77 여객열차는 원주역에 들어섰다. 이 열차에는 서울 인창고, 보인상고, 보성여고 학생 700여명이 타고 있었다. 버스 수학여행이 금지되기도 했고, 이 때까지만 해도 경주 수학여행은 중앙선 열차를 타고 가는 일이 많았다. 중앙선 철도에는 당시 기술로는 첨단 장치였던 열차집중제어장치(CTC) 시스템이 설치되어 있었다. 망우리에 있는 타워(관제센터)에서 열차들의 이동 상황을 파악하고 신호기, 전철기들을 작동시켜 열차 운송을 원활하게 통제하는 장치다. 그런데 77열차가 대기하고 있어도 원주역 신호기에 녹색신호가 들어오지 않았다. CTC의 신호 통제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출발 신호가 떨어지지 않으니 원주역에서 타워에 보고했고, 망우리 타워는 수동으로 선로를 열어 기차를 출발시키도록 했다. 1110분 신호가 바뀌자 77여객 열차는 출발, 치악산을 올라갔다.

 

중앙선은 단선 철도였으므로 한 방향에서 기차가 오면 반대 방향 기차가 충돌하지 않도록 교행하는 지점의 역에서 대기해야 한다. 원주역 다음의 교행 간이역인 유교역에는 1508호 화물열차가 대기 중이었다. 119분경 유교간이역의 선로개폐신호기에 녹색 신호가 들어왔다. 당연히 화물열차는 그대로 출발해 버렸다. 원주역의 신호가 정상 작동했다면 여객 열차는 이미 통과한 시점이지만, 실제로는 맞은편에서 달려오고 있었다. 원주역의 신호를 수동으로 전환해서 늦게 출발시켰으니, 유교역에서도 화물열차가 출발하지 못하게 했었어야 하는데 이를 놓친 것이었다. 게다가 CTC를 도입한 것은 좋았으나, 당시의 중앙선 열차에는 무선전화가 없었다. 원주역에 연락해 여객열차를 멈추라고 했으나 이미 열차는 출발한 뒤였다. 원주역 직원들이 뛰어서 쫓아가 보았지만 따라 잡을 턱이 없다. 달리고 있는 열차를 멈출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하필 중간에 터널이 있어 기관사들이 상황을 파악할 수도 없었다. 터널 안에 진입해서야 기관사들은 상대방 열차를 확인하고 비상 제동을 걸었지만, 열차는 충돌했다. 인창고등학교 2학년 1, 2반 학생들이 타고 있던 첫 번째 객차는 충돌 이후 뒤로 밀리는 듯하더니 위로 솟구치며 찌그러져 버렸다. 열차의 전등이 꺼지고 비명 소리만이 들리는 가운데 기관사와 승무원, 교사와 학생, 승객들이 달려와 구조를 시작했다. 인솔 책임자인 교감 선생님은 중상을 입은 가운데서 학생들에게 침착하라고 외쳤으나 곧 숨을 거뒀다. 교감과 담임교사를 포함해 12명이 목숨을 잃었고, 오십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열차마저 대형 사고를 내자 서울시에서는 수학여행 자체를 일시 중단시켰고, 장관들이 사의를 표하는 등 한동안 소란스러웠으나 제대로 된 대책은 나오지 않았다. 1971년에도 수학여행 사고는 계속되었다. 19711013일 남원국민학교 6학년 어린이들은 군산으로 수학여행을 떠났다. 새벽 일찍 남원역에 모인 어린이들은 태운 기차는 순천에서 용산까지 가는 192호 보통열차였다. 어린이들은 전라선과 장항선을 통해 군산역까지 갈 예정이었다. 640192호 열차는 남원역을 출발했다. 그런데 653분 남원역으로 진입하던 유조열차 기관차에 급박한 열차 무전이 들어왔다. 192호 열차가 남원역 바로 앞의 오르막 커브를 오르다 기관이 멈추면서 급브레이크를 걸고 고장 부위를 찾고 있지만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유조열차 기관사는 713분 역에 도착하자 상황을 보고했고, 구조 작업을 수행하라는 순천철도국의 지시를 받았다. 기관사가 대기선으로 유조 열차를 옮기고 연결되어 있던 유조 탱크를 분리한 다음 사고가 났다는 곳으로 기관차를 출발시키려는 순간, 192호 열차가 마지막 객차부터 거꾸로 역 구내로 들어 오고 있었다. 고갯길에 기차를 세우고 있던 기관사는 침목으로 기차 바퀴를 고정시키는 안전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것이다. 30분 이상 정차하면서 브레이크의 공기는 빠져 나가고 있었고, 갑자기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후진하기 시작한 기차는 마지막 순간 거의 50가까운 속도로 역에 진입했다. 당황한 기관사는 경고하는 후진 기적조차 울리지 못했다. 또 남원역도 다른 기차의 통행을 막거나 선로를 조절하는 예방조치를 쥐하지 않고 있었다. 마구 달려 내려온 열차는 막 출발하려던 유조열차의 기관차와 충돌했다. 7호 객차와 8호 객차가 연이어 충돌하면서 8호 객차에 타고 있던 남원 국민학교 학생들이 참변을 당했다. 그 자리에서 남원국민학교 학생 15명과 남원에서 전주로 통학하던 전주공고 학생 3명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고, 36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대형 참사에 가려졌지만, 식중독 같은 수학여행 안전 사고도 많았다. 이 두 참사가 난 바로 그 시점이다. 197010월 서울로 수학여행 온 충남 연기군의 연남, 연양 두 국민학교 6학년 학생 209명과 인솔교사 9명이 식중독을 일으켰다. 이 두 학교는 숙박비를 싸게 하려고 서울역 건너편 여인숙 밀집 지역에서 숙소를 찾았다. 당시 주소로는 중구 도동, 현재 용산구 동자동이다. 1950년대부터 사창가로 유명한 곳이었으니 호객꾼들이 손님을 끌고 취객들이 드나드는 어느 모로 보나 수학여행 숙박지로는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다. 19708월부터 경찰이 21차례나 단속을 펼쳐 268명의 여성들을 보호 시설에 수용하고 포주 등을 입건했으며, 무허가 숙박업소과 식당이 허가를 받도록 했다. 이렇게 한참 단속 중이니 그나마 수학여행 온 국민학생들이 머물렀겠지만 곧 사단이 났다. 두 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은 여인숙 부근 무허가 식당에서 도시락을 주문해 먹었다가 모두 토하고 쓰러지는 사태가 벌어졌다.

 

 

 

2. 학교의 폭발과 재난의 근대

 

 

그런데 왜 하필 수학여행에서 이렇게 정신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연속해서 대형사고가 나타날까? 사실 수학여행은 대한제국기 학교에서부터 시작되었고 일제 강점기나 1950~60년대에도 꽤 먼 거리까지 수학여행을 다녔지만, 이런 대형사고는 나지 않았다. 흔히들 안전 불감증을 탓하지만 그 전에 없던 안전불감증이 갑자기 집단적으로 유행할 리 없다.

 

근대의 재난과 희생은 그 사회의 구조적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 어떤 사람들은 근대 재난을 사고일 뿐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지난 1년간 재난의 근대성을 연재해 오면서 살펴본 것처럼, 우리가 겪는 많은 사고와 재난은 근대 산업 사회의 산물이며 도시 문명의 구조적 결과이다. 특히 1970년은 60년대부터 진행된 한국 사회의 압축 성장, 국가 중심의 산업화의 결과가 현실 속에서 확연히 드러나는 시점이다. 현대 한국 사회. 오늘날 한국인들이 살아가는 일상의 근대성이 형성되었다는 뜻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가장 크게 느끼는 삶의 조건, 가치, 목표들이 이때 고착되기 시작했다.

 

오늘날 한국인의 생활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끄는 문제는 무엇일까? 아마도 주거일 것이다. 그리고 그 주거의 수준과 조건을 결정해 주는 것은교육교통이다. 한국 현대 도시는 급격한 산업화의 토대 위에 구축되었지만, 그 내부에서 삶의 수준과 중심성은 교육을 통해 재구성되었다. 대중교육의 실현과 고등교육의 확산은 20세기 후반 전세계적 경향이지만, 1960년대 이후 한국에서는 더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교육폭발이라고 할 정도로 학교에 대한 수요가 늘었고 상급 학교에 대한 욕망은 더욱 확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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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중반 50%도 안 되는 중학교 취학률이 1970년대 말 거의 100%가 되었고, 고등학교 취학률도 3배 이상 늘었다. 그리고 이런 급증은 도시 지역에 집중되었다. 서울 인구 밀집 지역에서 학급 당 학생 수는 거의 70명에 이르렀다. 학급 당 학생수도 문제지만 학교에 학생이 지나치게 많았다. 1977년 서울 시내애 전교생 3,000명 이상인 중학교가 20여개가 넘었다. 특히 서울 시내 중학 신입생들이 해마다 늘고 있는데 신설되는 학교는 도저히 따라가지 못했다. 이렇게 학생 수가 많아지면서 함께 사용해야 하는 운동장, 음악실, 과학실 등 설비가 크게 부족했다. 전교생이 다함께 모이는 조회나 운동회는 꿈도 못 꾸는 일이었다. 1학년이 22학급에 1,510명이나 된 공항중학교는 교직원만 60여명이라 1학년 교사들이 교무실을 따로 써야 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한국의 교육 폭발은 거의 학부모가 부담하는 비용을 부담하는 가운데 확대되었다. 1960~70년대 이후 한국의 중등 교육은 수익자 부담사학 진흥의 두 가지 기조에 의해 운영되었다. 이것은 국가가 감당해야할 공교육의 책임을 학부모에게 넘긴 것이며, 공교육의 수준과 안전 등 국가가 관리해야 할 필수적인 가치를 방기하는 것이었다.

 

사립학교들은 재정적인 여력이 없는데도 학생 정원을 계속 배정받았고 심지어 늘리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무자격 교사를 채용하고 학급당 학생 수도 늘었다. 교사와 교실 수는 맞추더라도 운동장과 과학실, 음악실, 실습실 등 특수교실은 태부족이었다. 부산 시내 한복판에 있는 한 실업계 여학교는 운동장이 전혀 없는데도 197210학급을 증설하여 학생 수가 4,000명으로 늘었다.

 

학벌을 향한 경쟁이 격화되면서 입시경쟁은 지옥으로 변해갔고, 당연히 극심한 사회문제를 야기했다. 치맛바람, 과외열풍 등의 문제가 커지자 정권은 평준화를 실시하여 대응했다. 그러나 중학교 고등학교의 평준화는 최종적 경쟁만 더 강화시킬 뿐이었다.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1970년대 고등학교 평준화였다.

  

1970년대 중반까지 일류 고등학교가 아니라면 대학 입시 준비는 가고 싶어 하는 학생들의 문제였다. 이류나 삼류로 분류된 학교에서도 열심히 공부해서 명문대학에 가는 학생들이 있었지만, 주로 개인적이 노력이었다. 어차피 일류부터 삼류까지 고등학교들의 서열이 매겨져 있는 상황에서, 학교 전체가 나서서 학생들의 입시 경쟁을 진두 지휘하는 양상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평준화는 상황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학교, 학부모, 학생들 모두 대학입시에 전력을 기울일 조건이 조성되었다. 학생과 학부모로서는 학벌을 형성할 수 있는 기회가 대학만 남게 되었으니, 대학입시가 인생을 결정하는 셈이 되었다. 학교는 동일한 수준의 학생들을 확보함으로써 입시에서 경쟁할만한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 학군제가 실시되면서 서울의 신흥 주택지역에 위치한 학교들로서는 최선의 학생들을 받아들이게 되었으니 신흥명문을 노릴 수 있게 된 것이다. 특히 이때 막 늘어나던 사립 고등학교들이 입시의 강자로 떠오를 수 있는 절호의 조건이었다.

 

서울의 일부 고등학교들이 급속히 학습 강도를 강화하고 학력평가 시험을 거듭해 치르면서 학생들에게 수험 준비 태세를 빨리 갖추도록 독려했다. 사립학교 교사들은 학교 주변을 순찰하고 다녔으며, 분식점조차 드나들지 못하게 했다. 남자고등학교에서 아침 저녁으로 매타작을 벌이는 일이 늘어났다. 197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학교 교사들의 별명은 더 독하고 강한 캐릭터들이 되었다. 치타, 뺑이, 빠삐용, 꼴통, 미친개, 고릴라, 독사, 황금박쥐 등은 흔한 별명이었고, 생김새보다는 평소의 언행에서 나온 이름들이었다. 특히 어느 학교나 미친개혹은 독사라는 별명을 가진 학생 담당 교사는 있게 마련이었고, 이 별명들은 대체로 구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한 학생은 3년간 가장 인상 깊었던 일이 교사에게 하도 맞아, 꿈속에까지 그 선생이 나타나 진땀 밴 것이라고 했다.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는 이 시기의 강남 사립학교를 배경으로 하고 있거니와, 실제로 폭력은 학교 생활 곳곳에 더욱 강하게 스며들었다. 폭력은 위에서 아래로 확산되었으니, 교내 선후배 사이에도 폭행은 빈번해졌다.

 

이제 수학여행으로 돌아가 보자. 입시경쟁에 지친 중고등학생들에게 몇 안 되는 탈출구 중의 하나가 수학여행이었다. 그러나 사실 이 무렵 수학여행의 교육적 효용에 대한 논란은 많았다. 중학교나 고등학교 취학이 늘어나면서 전보다 상대적으로 가난한 학생들이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소득수준이 다른 학생들이 한 학교에 다니게 되면서, 집안 형편으로 수학여행을 못 가는 학생들이 더 늘어났다. 이들은 수학여행 기간 동안에도 학교에 나왔으나 따로 수업도 없었고 도서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학교에서 하루 정도 주변의 산업시찰 등을 보내 주기도 했으나 운 좋은 경우에나 그랬다. 대규모 여행이 반드시 필요한지, 괜히 말썽만 일으키는 것은 아닌지 우려도 많았고, 교사들도 학생들 감시는 달갑지 않았다.

그러나 앞서 보았던 대형 사고 속에서도 수학여행은 계속 실시되었다. 왜 그랬을까? 1960년대부터 수학여행 코스는 대부분 경주나 설악산으로 정해져 있었다. 시골 학교들은 물론 서울로 가는 것이었고. 그런데 1970년 무렵부터 조금씩 변했다. 1960년대 경주-합천 해인사를 다녀오던 코스가 어느새 경주-울산 공업단지로 변했다. 속리산을 목적지로 잡으면 현충사에 들러야 했다. 197010월 울산 공업단지에는 보통 하루에도 7, 8개 학교 2,000여명의 수학여행단이 찾아왔다. 1973년 서울시 학교들의 60%가 경주-울산, 30%가 설악산, 10%가 속리산-현충사 코스를 택했다.

 

사고만 나면 내리던 수학여행 금지는 얼마 가지 않았다. 학생들에게 일상으로부터 탈출구를 열어 두기 위해서 그랬던 것은 물론 아니었다. 모든 학생들이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워야 하던 이 때, 수학여행은 충효교육, 근대화 지상주의를 실현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문교부는 수학여행 행선지로 공업단지와 현충사 등을 장려했고, 이 코스들을 반드시 집어넣다 보니 여행 일정에 무리가 생기기도 했다. 경서중학교 수학여행단도 아산 현충사를 다녀오는 길이었고, 설악산으로 떠난 인창고등학교 학생들도 오죽헌을 들러야 했을 것이다.

 

일정도 마찬가지였다. 학교 교육의 최우선은 입시였으니 수학여행을 가는 시기도 다 똑 같았다. 시험 기간 피하고 3학년들의 입시 준비에도 방해되지 않고, 그리고 모든 학급이 한꺼번에 떠났다가 돌아올 만한 날자는 거의 뻔했다. 전국의 모든 초중고교가 다 같은 시기에, 비슷한 목적지로 한꺼번에 떠날 때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 뻔했다. 사고를 피할 대안은 어렵지 않았다. 소규모의 학급 단위 여행, 또는 학생들의 자율적인 여행으로 수학여행을 대체하면 된다. 그러나 문교 당국도 없었고, 일선 학교에도 그럴 생각은 없었다. 국가 중심의 근대화 프로젝트는 교육에서도 대량의 근대화 역군을 양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갑자기 폭증한 학교와 학생들, 천편일률적인 목적지와 일정. 이것들이 사고 위험을 높였다.

 

 

 

3. 근대 교통 체계와 재난

 

 

참혹한 재난은 두 가지 요인들이 함께 작용했다. 한쪽에서 급격히 확대된 부실하고 도식적인 학교 교육이 관리할 수 없는 과도한 수요를 만들었고, 다른 쪽에서는 안전과 노동에 대한 배려 없이 확대되기만 근대 교통체제가 툭하면 참사를 일으키고 있었다.

  

애초 한국 근대 교통로의 주역은 철도였다. 1960년대 말까지도 서울로 가는 여행은 여전히 기차를 떠올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1968년 유현목 감독의 영화 <수학여행>은 열차가 이동의 대표적인 수단이었던 시절의 풍경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1969년 전남 신안군의 장산동 국민학교 저도(楮島)분교 어린이 23명은 저도에서 진도까지 나와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목포로 나와 기차를 타고 밤 11시에나 서울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 생산량과 인구 이동이 늘어나면서 수송수단의 획기적 전환이 필요하게 되었다. 박정희 정부는 고속도로에 주목했고, 대통령이 직접 철도를 고속도로로 전환할 것을 지시했다. 19673월 경인고속도로가 착공되었고, 196712월 경부고속도로 추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박정희는 직접 고속도로 추진위원회의 업무를 지휘하면서 일부 노선을 직접 선정하는 등 대단한 열의를 보였다. 19707월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되었다. 이후 고속도로의 비중이 점점 늘었다. 호남 고속도로의 대전-전주 구간이 개통했던 1973년까지 고속도로의 차량 이용 비율은 연 평균 28%씩 증가했다. 1970년은 이렇게 도로교통의 비중이 점점 확대되는 시점이었다.

 

그러나 확대된 고속도로와 철도, 버스에 대한 안전원칙은 제대로 확립되어 있지 않았다. 원래 1962년 제정된 도로운송차량보안기준령 45조에는 승차정원 11명 이상의 자동차에는 소화기를 비치하도록 규정되어 있었고, 자동차 승차정원도 좌석과 입석에 따라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모산 사고에서 알 수 있듯, 실제로는 정원도 소화기 규정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희생자들의 대부분은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서 화재로 목숨을 잃었다. 이후 소화기 규정이 강화되었지만, 이후에도 여객 정원과 소화기 조항은 여전히 잘 지켜지지 않았고, 안전에 대한 요구는 기업들의 불편을 초래한다며 거부되었다.

 

학교 자체에서 일어나는 사고는 어떻게든 통제할 수 있었지만, 학생들의 대규모 이동 상황에서 부실한 교통망과 안전장치는 언제든지 사고로 나타날 수 있었다. 철도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 무렵 철도는 정부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었고, 수학여행 코스였던 중앙선이나 전라선, 장항선은 그 중에서도 소외된 노선이었다. 안전 장치나 통제 시설에 대한 투자는 부족했고 철도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조건에 시달렸다. 1917년 당시 철도원들은 연간 100명 이상 순직, 50명이 공상을 입었다. 10년 근속해도 기본급이 29,000원 정도에 불과했다. 기관사들은 기관차를 운전해야 하므로 합숙소나 대기소에서 잠을 자야 했는데, 이들의 평균 수면 시간은 집에서 4시간 41, 합숙소에서 2시간 17, 대기소에서 18분으로 합숙소나 대기소에서 피곤한 밤을 보내는 일이 많았다.

 

대규모 수학여행을 중단할 수 없었던 이유 중 하나는 관광업체들의 이해관계 때문이기도 했다. 고속도로가 건설되었을 때 전국이 1일 생활권이 되었다고 선전했지만, 실제로 1일 생활권이란 서울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용어였다. 특히 버스 관광은 사람들에게 1일 생활권을 실감하게 되었다. 온양온천, 현충사, 속리산 등은 하루 만에 다녀올 수 있게 되었다. 가을에는 내장산이 고속도로로 서울에서 4시간이면 갈 수 있는 곳으로 소개되었다. 1973년 호남, 남해 고속도로가 전면 개통될 무렵 유신고속관광은 일간지 하단에 호남 남해고속도로 개통을 축하하면서 전국 일주 관광 상품의 광고를 내기 시작했다. 유신고속관광은 유신고등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했는데, 유신고는 수학여행을 고속도로 전국 일주로 다녀왔다. 유신고속관광 외에도 많은 회사들이 국토일주여행 상품을 개발하여 경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수학여행 금지는 관광버스 회사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197010월 참사 이후 버스 수학여행이 금지되자 서울 시내 관광버스 업체 18개의 가동률이 20%까지 하락했다. 여행업계는 사활이 달린 문제. 별다른 개선책 없이 슬그머니 대규모 수학여행 재개했던 것이다.

   

대규모 재난은 비일상이라고들 생각한다. 우연하고 불운한 사고일 뿐이라는 것이다. 불운한 것은 맞지만 비일상적인 재난들은 일상의 구조적 문제 속에 형성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또 일상적인 조절과 위기 대응의 기능이 전혀 갖춰져 있지 않다는 것은, 그 사회의 구조와 기능에 대한 심각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나 1970년 이런 재난에 대한 반성은 근대화의 벅찬 발걸음 그 응달에 숱한 생채기가수준에 그치고 있었다.

 

 

 

4. 재난과 희생자들을 바라보는 시선과 태도

 

 

온 국민이 배가 가라앉는 상황을 지켜 봐야 했던 2014년 같지는 않았겠지만, 1970년의 참사도 큰 충격을 주었다. 이 사건에 대한 정부의 대응은 수학여행 금지, 성금 모금, 말 바꾸기, 실무자들에게 책임 지우기 등이었다. 서울시 교육위원회는 우선 버스 수학여행을 금지시켰고, 원주 터널 사고 이후에는 원거리 여행을 모두 중지시켰다. 희생자들의 가족에게 당시 최고 수준인 1인당 200만원의 위로금을 약속했지만, 실상 사고를 낸 버스 회사는 그럴 능력도 없었다. 각급 학교에서는 자발적인성금 모금이 시작되었고, 문교 당국은 절대 강제적인 것은 아니라고 부정했으나 실제로는 징수에 가까운 모금이 실시되었다. 부상당한 경서중학교 3학년 학생들을 고등학교 입시에서 배려할 수 있도록 고려하겠다고 해놓고 시간이 지난 다음 특혜는 없다고 말을 바꾸었다.

그리고 일선의 실무자들에게는 엄격하게 책임을 물었다. 당국은 경서중학교 학교장 교감 과 사고난 반의 담임 등 4명의 교사가 파면되고, 6명의 교사가 해직되었다. 그러나 고위직으로 서울시 교육감과 철도청장이 인책 사퇴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1972년 교감이 제기한 파면처분 취소청구 소송에서 승소함했다. 사실 사고 직후에 교사들에게는 사실을 확인하지도 않은 일방적인 매도가 쏟아졌다. 5호차에 담임교사가 없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학생 수에 비해 너무 적은 차량을 배차한 것도 책임을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학생들의 차를 홀로 먼저 보내고 교사들은 맨 뒤차에 함께 타고 있었으며, 사건 현장에서도 누구 하나 불 속에 뛰어 들지 않았다는 매도는 사실과 다르다. 아침에 출발했을 때와 오후에 돌아갈 때 담당 차량이 바뀌었던 탓에 교사들이 착각하기도 했고, 해당 차량 운전기사가 먼저 급히 출발하기도 했었다. 사고 현장 주변에 있던 주민들이 구조한 것은 사실이지만, 불길이 너무 급히 번져 현장의 주민조차 누구부터 먼저 구해야할지 모를 정도로 급박했다. 교사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고의 책임은 운전부주의 불안전한 건널목 등에도 있지만 학교 내에서나 마찬가지로 학생지도에 살신 희생까지는 안 되어도 최소한의 노력은 했어야할 교사들의 책임이 가장 큰 것이며 교사들의 경거망동한 행동은 사회의 규탄을 받아야 한다는 논리 속에 정부의 책임이나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성찰은 사라져 버렸다.

 

아들과 형제를 잃어버린 유족, 그리고 부상자들에 대한 사회적인 배려는 거의 없었다. 당국은 당시로서는 최고 보상금인 200만원 설을 언론에 흘렸고, 언론은 이를 크게 보도했다. 그러나 중상자를 포함한 경서중학교 부상학생 30명은 서울시내 병원에 입원했지만 치료비에 대한 대책이 없어 한동안 응급치료만 받고 제대로 치료조차 받지 못했다. 경서중이나 인창고 학생이나 큰 부상을 입고 장기 입원한 경우 3등 병실에서 푸대접 속에 신음해야 했고, 보상문제는 시간을 끌고 있었다. 모산 사고의 경우 연흥관광은 고작 2700만원, 경남관광은 250만원을 내놓고 책임을 다했다고 선언했다. 문교부는 자발적으로 성금을 갹출하게 해서 해결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경서중학교 생존자 27명 가운데 13명만이 전기 고등학교에 합격했고, 나머지 학생들은 모두 탈락했다. 서울시 교육위원회는 원래 고교 진학을 위한 조치를 강구하겠다고 해놓고 시간이 지나자 특혜는 없다고 입장을 바꿨다. 경서중학교 학생 가운데 한 희생자는 만 1년 이상을 입원한 경우도 있었다. 전신 중화상으로 긴급 응급 수술 외에도 10시간씩 걸리는 대수술 4, 1972년까지 두 번의 대수술을 더 해야 했다. 그렇게 해도 왼쪽 손은 신경마비로 불구가 되는 것이 확실했고, 얼굴의 화상도 회북할 수 없었다. 수술한 머리의 상처가 허전해서 항상 모자를 쓰고 있어야 했다. 심리적 상처 또한 영원히 가실 수 없었던 것이다.

 

희생자와 가족들에 대한 사회적인 위로가 있었을까? 모산 사고 위령비는 몇 곳에 세워졌다. 제일 먼저 세워진 것은 학생들이 묻힌 김포의 묘역에 사고버스 회사가 공사비 140만원을 내 만든 것이다. 19701230일 위령비를 제막하려 했으나 부실공사로 탑이 기울고 석재 받침 부목도 떼지 않은 상태에서 식을 하려 했다. 사회적 비난을 줄여 보려는 심산이었을 텐데, 유족들의 상처만 더 크게 했다. 유족들의 항의로 제막식은 무기 연기되었다. 모산사건 희생자 유족들은 위자료에서 460만원을 거둬 장학회를 만들었고 1971년 남원에서 사고가 났을 때 성금을 보내기도 했다. 희생자들끼리 서로를 위로할 수밖에 없는 사회, 그것이 한국적 압축 성장의 결과였고, 그 잔혹함은 여전하다.

 

 

맺음말

 

1970년의 참혹한 참사가 있었지만 압축성장과 폭력적 근대화의 메카니즘은 변하지 않았다. 한국 사회는 유신의 암흑기와 5.18의 희생을 다시 겪어야 했다. 1970년만이 아니다. 사실 재난이라고 하면 1994~1995년을 빼놓을 수 없다. 성수대교가 무너져 무학여고 학생들이 참변을 당했고, 충주호에서 유람선에 화재가 나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아현동에서 가스가 폭발했고, 삼풍백화점이 무너져 엄청난 사람들이 생명과 가족을 잃었다. 다시 대구 지하철 공사장에서 가스가 폭발했고, 시프린스호가 침몰하여 엄청난 기름이 유출됐다. 무너지고 터지고 가라앉는 대형 참사가 끊이지 않았다. 한국 사회는 그 재난 이후 무엇을 바꿨던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리고 한국은 IMF를 맞았다. 2014년 세월호라는 대참사 이후, 우리는 지금 무엇을 바꾸고 있는가?

 

 

 

---주석---

 

1) <<동아일보>> 1970. 4. 18(1) 

2) <<동아일보>> 1970. 12. 30 

3)사고를 일으킨 연흥관광 버스에는 78명이 타고 있었다. 

4) 음주를 했다거나 다른 버스 기사들과 다퉜다는 증언도 있었다.<<경향신문>>1970. 10. 17(7)

5) <<동아일보>> 1970. 10. 14(1) ; 1970. 10. 15(7) :<<경향신문>> 1970. 10. 15(7),(8)

   고기환,<<체욱/스포츠 안전사고 법이론과 판례>>, 홍경, 2005, 255쪽

6) <<경향신문>> 1970. 10. 15(7) 

7) <<경향신문>> 1970. 10. 17(7) ; 1970. 10. 19(2), 9(7) :<<경향신문>> 1970. 10. 15(7),(8)

   고기환,<<체욱/스포츠 안전사고 법이론과 판례>>, 홍경, 2005, 255쪽 

6) <<경향신문>> 1970. 10. 15(7)

7) <<경향신문>> 1970. 10. 17(7) ; 1970. 10. 19(2), 9(7) : <<동아일보>> 1970. 10. 19 (7) ;<<매일경제>> 1970. 10. 19(3) 

8) <<동아일보>> 1971. 10. 13(7) : 1971. 10. 14(7) 중상자 중 2명이 곧 숨을 거둬 14일 사망자가 20명이었다. 

9)  <노은주 임형남의 골목 발견 서울 동자동>,<<조선일보>> 2016. 9. 22  

10) <<경향신문>> 1970. 10. 30(8)

11) <<경향신문>> 1970. 10. 19(7) 무허가 식당이라고 표현했지만, 사창가 안에 있는 6평 남짓한 판자집에서 운영하는 식당이었다.  

12) <<동아일보>> 1977. 3. 19  

13) 김기석, <유상 중등 교육의 팽창>, 김신일 외,<<한국교육의 현단계>>, 교육과학사, 1989

14) <<동아일보>> 1972. 10. 16 

15)  부산동고등학교,<<동맥>> 1, 1975 ; 서라벌중고등학교,<<서라벌>> 17 ; 여의도고등학교,<<여의도>> 4, 1977 등 참조 

16) <<동아일보>> 1970. 10. 21(7) 

17) <<동아일보>> 1973. 10. 18(3)

18) <<동아일보>> 1970.10. 16(7)

19) <<경향신문>> 1969. 10. 22  

20) <<동아일보>> 1967. 8. 11(3) 

21) 이기훈, <차별의 실체 – 호남고속도로의 건설과정>,<<이화사학연구>> 46, 2013

22) 도로운송차량보안기준령 47조. 1970. 11. 27일부 개정

23) 승용차와 고속도로를 운행하는 모든 자동차에 안전벨트 부착을 의무화한 것이 1979년 4월부이었는데 여기에 대해 정부 내에서도 반발이 심했다. 자동차 전용도로에서 운전자의 안전벨트 착용이 의무화된 것은 1986년이었다. <<매일경제>> 1980. 3. 31 (7),<<경향신문>> 1986. 6. 13(11) 

24) 1971년 섬유노조가 산출한 5인가족의 최저생계비는 38,900원이었다. 김경일, <산업투사에서 민주투사까지-도시로 간 여공의 삶>, 김성보, 김종엽, 이혜령, 허은, 홍석률 기획,<<한국현대생활문화사 1970년대>>, 창비, 2016, 73쪽

25) <<동아일보>> 1971. 10. 14(7)

26) <<동아일보>> 1970. 6. 29(3)

27)  유신고속관광은 육사 5기로 준장으로 예편하고 경기도 지사 등을 지낸 박창원이 1968년 설립한 회사로 1976년 코오롱 그룹에서 인수하여 코오롱고속관광회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경향신문>> 1973. 2. 8(5) ; 1977. 1. 5(2) 

28) <<경향신문>> 1975. 4. 3(7)

29) <<매일경제>> 1970. 11. 19(7)

30) <<동아일보>> 1970. 12. 30(&)

31) <<매일경제>> 1970. 12. 15(7) 

32) <<경향신문>> 1970. 12. 24(3) 

33)  사회부장 이효식,<<동아일보>> 1970. 10. 19 (3)

34)  고기환, 2005, 앞의 책, 255쪽

35) <<동아일보>> 1970. 10. 22(3) 독자 투고 

36) <<매일경제>> 1970. 10. 20 

37) <<매일경제>> 1970. 12. 15(7) 실제로 여기저기에서 성금들이 모여 전달되기도 했으나 책임의 규명과 보상과는 거리가 멀었고, 후유 장애나 심리적 안정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었다.

38)<<동아일보>> 1971. 2. 15(8) 

39) <<동아일보>> 1971. 10. 25(7)

 


* 이 글은 <<문화과학>> 제89호에도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