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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그들의 1960년대 ⎯ 대안적 앎의 공간으로서의 전공투 1 / 심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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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17-11-10 조회수 : 8,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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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1960년대 - 대안적 앎의 공간으로서의 전공투 1 

                                                                                                            :  9월26일 역사문제연구소 <전공투: 대안적 앎의 공간>

 (후지이 다케시) 강연후기

                                                                                                                                                                                                                                      

 

 

 심아정 (수유너머 104) 

 

 

 

 

0. ‘포츠담 자치회’를 넘어서 ⎯ ‘기존의 대표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을 구성하기 


     평일 저녁인데도 생각했던 것보다 상당히 많은 수의 사람들이 모였다. 대충 둘러봐도 100 여명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믿고 듣는 후지이 다케시 선생님의 강의이기도 했지만, 최근에 야마모토 요시타카의 『나의 1960년대』(돌베개)가 출간된 후 전공투에 대한 현재적 의미에 대한 관심이 커진 데다가, 국내에서는 좀처럼 관련 자료를 찾아보기 쉽지 않은 운동의 현장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동료들과 함께 수강 신청을 하게 되었다.

     강의는 전공투에 대한 ‘오해’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되었다. 원래 전공투는 ‘전학공투회의’의 줄임말인데, 한국에서는 줄곧 ‘전국학생공동투쟁’의 줄임말로 알려져 왔다. 이러한 ‘오해’는 전공투 정도의 대규모의 운동이라면 반드시 전국적 조직이 있었을 것이라는 선입견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의 반증일 것이다. 그러나 전공투는 어디까지나 대학, 즉 학교 단위의 조직이었고, 나중에 운동이 거의 소멸 단계에 이르렀을 때 ‘전국전공투연합’이라는 것이 형식적으로 생겨나긴 했지만, 이내 사라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학교 단위였던 전공투 운동은 기존의 학생회를 중심으로 한 운동과 어떤 점에서 달랐을까? 이 물음은 1960년대 그들의 전공투를 지금-여기에 소환하여 우리의 공부와 활동에 대한 하나의 제언으로써 뒤늦게-다시-만나기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모든 학생을 회원으로 하는 학생회는 그들 중에서 대표를 뽑고, 집행부가 그들을 대신하는 방식으로 운동을 이끌어 나간다. 이러한 수직적 조직체로서의 학생회에 대해서 당시의 전공투는 ‘포츠담 자치회’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일본의 전후 민주주의가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이면서 생겨났기 때문에, 전형적인 일본의 전후 민주주의를 비판하려는 의미에서 사용된 표현이라고 한다. 이렇듯 학생회 운동은 관료제처럼 절차가 우선시되고, 다수의 지지를 받아야만 움직일 수 있는 시스템인 반면, 전공투는 그러한 대의제민주주의, 간접민주주의를 비판하고 넘어서는 방식으로 직접민주주의로서의 운동을 만들어 나갔다는 점에서 학생회 운동과는 차별화된다.

     사실 일본의 학생운동 하면 떠오르는 것이 1948년에 생겨난 전학련(전국학생회자치총연합)인데, 아직까지도 그 이름은 남아있다. 전공투는 멤버쉽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 운동을 하고자 했다는 점에서도 학생회를 통한 학생운동을 해왔던 전학련과는 다른 결을 갖는다. 학생회 운동을 하려면 그 학교의 학생이라는 자격이 요청되지만, 전공투가 되기 위해서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고 한다. 동경대 전공투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동경대 학생일 필요가 없었다는 소리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그 전까지의 대표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을 구성하려는 시도로서 전공투의 운동을 자리매김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전공투는 자격없는 자들의 몫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전공투와_고양이.jpg   전공투2.jpg   
<"사실 전공투는 인간이 아니라 그 안에 있던 고양이가 한 운동이라는 걸 보여주는 결정적 사진"이라며 후지이샘이 제공해 준 사진 ㅎㅎㅎ / 강연 웹자보>

 

 

1. 살아있다, 살아있다, 살아있다, 바리케이트 안에서- 일본대 전학공투회의 

 

  전공투하면 으레 동경대를 떠올리기 쉽지만, 사실 그 시작은 일본대였다. 일본대는 당시 일본 최대 규모의 대학이었다고 한다. 1968년 5월 27일, 일본대에서 5천 명 가량의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일본대 전학공투회의가 만들어졌다. 일본대는 19세기 말에 세워진 일본 법률학교가 그 전신인데, 상당히 우익적인 성향이 강했고, 1949년에 제정된 학칙 제1조에 일본정신 운운할 정도였으니 패전 이후로도 성향면에서 달라진 것이 없었다.

     일본 국내의 대학생 수는 1960년대 후반에 급속도로 늘어나는데, 일본대도 그러한 추세에 따라 1955년에 3만명이었던 학생 수가 일본대 투쟁이 벌어질 당시에는 8만5천명으로 늘어난다. 학교가 그런 식으로 학생 수를 늘리다 보니, 500명에서 많게는 2000명 단위의 대규모 강의가 늘고, 해마다 인상되는 등록금에 비해 편의시설은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학생들의 불만이 누적되고 있었다. 학생들을 돈벌이의 수단으로만 취급할 뿐만 아니라, 교수들에 대해서도 사상통제가 매우 심했다고 한다. 게다가 우익적 성향을 가진 응원단이 학교당국의 앞잡이가 되어 자치적으로 학생운동을 파괴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학생들이 자주적인 활동을 하거나 학교 당국에 대해 약간이라도 비판적인 모습을 보이면, 우익학생들이 공격을 해오는 식이었다. 대학은 마치 아무런 자유도 누리지 못하고 주눅이 든 학생들이 수감된 감옥처럼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 상황속에서 1968년 1월에 어떤 교수가 부정입학의 대가로 5천만엔을 받고 탈세를 한 것이 발각된다. 국세청의 조사로 드러난 일본대 비리금액은 3억엔. 지금 물가로 계산한다면 500억 이상이다. 학교 당국이 우익학생들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돈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조사 과정에서 회계과 담당과장은 실종되고, 여직원들이 자살하는 일까지 벌어졌고, 이러한 상황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던 학생들이 마침내 들고 일어서게 된다. 사회적으로도 이미 ‘문제화’되어 있어서, 일본대 학생들의 투쟁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5월20일. 처음 움직인 건 경제학과 학생들이었다. 처음엔 20명이 토론회를 열었다. 그때까지는 소규모 토론회까지도 일일이 학교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했다. 그러나 그들은 무허가로 토론회를 열었고, 그러자 곧바로 우익학생들이 쳐들어왔다. 급기야 23일에는 동원된 우익학생들이 토론회를 위해 모인 학생들을 학교 밖으로 쫓아내는 사태에 이르게 된다. 쫓겨난 학생들은 학교 밖 근처의 공원에 모여서 항의 집회를 하고 거기서부터 학교까지 ‘200미터 시위’라 불리는 일본대 최초의 시위를 하게 된다. 이 시위가 여느 일본의 학생운동이었다면 인터내셔널가를 불렀겠지만, 모인 학생들 대부분이 이 노래를 잘 몰랐기 때문에 결국엔 교가를 부르며 행진했다고 한다. 일본대는 그때까지 학생운동의 불모지였고, 그래서 처음엔 어설프게 시작되었지만 운동은 순식간에 확산된다. 건물과 건물 사이를 학생들이 완전히 메울 정도의 대규모 집회가 계속되는 와중에 우익학생들에 의한 공격이 심해지면서 학생들의 분노는 드디어 폭발한다.

     이후로 집회 규모는 계속 커져서, 한 번 집회를 하면 1만명 이상이 모이게 되었다.  6월 11일, 집회를 하던 도중에 건물 위에서 책상, 소화기, 의자 등이 날아왔다. 부상자가 속출했지만, 경찰들은 가해 주체들을 구속하는 일 없이 시위 학생들을 해산시키는 것으로만 이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학교 당국에 포섭된 우익학생들에 의해 실제로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경찰은 자신들을 지켜주지 않았다는 경험으로부터 시위 학생들은 본격적인 싸움을 해야 할 필요성을 깨닫고 건물 점거를 결심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바리케이트로 학교를 봉쇄하고 점거하는 하나의 방식이 만들어졌고, 그렇게 바리케이트 안에서 하나의 새로운 공간이 출현했다.

        점거 이후 학생들이 함께 지내게 되자, 자율성 확보를 위한 기본적인 몇 가지 규율들이 만들어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이러한 규율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반드시 준수했던 건 아니라고 한다. 통치 혹은 통제를 위해 신체화된 규율로는 작동하지는 않았다는 얘기다. 2월 이후에는 항상 1천명 이상의 학생들이 이 건물에서 숙식을 하면서 점거가 유지되는데, 이때부터 학생운동은 함께 생활하는 것을 동반한 운동으로 방향이 바뀌게 된다.

     일본대의 경우엔 행동대가 따로 있었는데, 그들의 시간표를 통해서 바리케이트 안의 생활이 어떠했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7시 기상 후 아침 훈련, 8시 반 아침식사, 10시부터 오후 2시까지는 자주 커리큘럼에 따라 공부하면서, 자신들 스스로 구체적인 대안적 앎의 공간을 만들고자 했다. 처음엔 대체로 외부 강연자의 강의나 영화 관람이 주를 이루었지만, 점차 ‘다른 무언가’를 배워보려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자유시간 후 5시부터 7시까지는 토론이 이어지고, 저녁식사 후 총괄회의가 있었다. 바리케이트 안에서는 토론과 회의가 절대적으로 중요시 되었다. 그들에게 토론에 참여하는 것은 하나의 의무이자 권리이기도 했다. 모두가 모든 것에 대해 말하기. 토론과 회의는 대표를 두지 않고 모두가 자기 의지로 참여하는 직접민주주의를 실험하는 장(場)이었다. 앞으로의 방침은 미리 정해져 있지 않았고, 기나긴 회의와 토론 시간을 거쳐 서로를 설득하며 결정되었다.

     우선, 학생들이 학교측에 요구한 것은 학교 당국과의 ‘대중적인 단체교섭’이었다. 학생회 대표 몇몇이 학교당국을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학생들이 참여한 가운데 교섭해야 된다는 주장이다. 이런 요구는 학교의 민주화를 누군가에게 위임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 각각이 주체가 되어 학내 민주화를 구현해 보려는 시도였다. 9월에 드디어 학교 당국자들과의 ‘대중적 단체교섭’이 이루어졌다. 이때 참여한 학생 수는 무려 4만 명. 12시간 동안 교섭이 진행되었고, 이사진의 총사퇴, 회계 공개, 집회 자유의 보장 등을 약속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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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대중단체교섭에 일본대생은 모두 집결하라'는 제목의 벽보>

 

 

     그런데 바로 다음날, 학교 당국의 대표자와 아주 친했던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당시 일본 수상이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문제화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하면서 사태는 일변한다. 대학 내부의 문제를 일국의 수상이 정치문제이고 치안문제라고 언급한 것이다. 이에 따라 이사회도 하루 만에 태도를 바꾸어 단체교섭의 결과를 학생들의 폭력에 의해 강요된 것이라며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발표한다. 국가권력이 본격적으로 개입하면서 전공투 간부들에게도 체포영장이 발부되었다. 실제로 대대적인 탄압이 진행되었고, 지도부들은 지하에 들어가게 되는 상황이 되어, 결국엔 일본대 투쟁도 흐지부지 되고 만다.

     결과만 놓고 보면 실패한 운동으로 여겨질 수 있지만, 운동의 과정에서 그들이 겪은 경험이 일상의 태도로써 혹은 자신들의 언어로써 확보되었다는 점에 주목해 본다면 결코 실패라는 말로 담아낼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사실 후지이 선생님은 전공투 운동을 공정하게 평가하려는 것 따위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지금까지도 회자되곤 하는 갖가지 부정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바리케이트 안에서 만들어냈던 하나의 가능성을 지금-여기 우리 앞에 소환하여 어떻게 전유해야 할 지를 묻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이 싸워낸 시공간 속에서 뒤늦게-그러나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

     일본대 전공투는 기본적으로 대학 내부에 존재하는 권위주의적인 체제에 저항하는 일종의 자율주의 운동이었다. 그들은 이제까지와는 다른, ‘살아있다’는 새로운 삶의 촉감을 바리케이트 안에서 비로소 느낄 수 있었다. 바리케이트 안에서는 어느 누구도 나를 대신하지 않고 스스로를 통치하며, 자주 강좌를 통해 조우한 다른 삶들에 촉발되어 ‘다른 앎’을 모색하는 것이 가능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벗들과의 토론을 ‘청량음료’에 비유할 만큼 중요하게 여겼다. 바로 여기에 모두가 모든 것에 대해서 말하고, 모두가 결정하는, 직접민주주의를 실험하는 장(場)으로써 일본대 전공투를 의미화해야 할 이유가 있다. 그렇다면 바리케이트에 대한 의미도 애초에는 외부로부터의 폭력적 진압에 대한 봉쇄나 자기방어라는 리액션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지라도, 그 안에서 함께 생활하며 대안적인 앎을 모색하는 과정을 통해 학생 개개인이 정치적 주체화의 과정을 경험하게 만드는, 스스로 통치하고 구성하는 힘을 흠뻑 머금은, 액션의 장소라는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해 볼 수 있지 않을까?

*** 일본대 전공투 관련 참고 동영상 링크: <일본대 투쟁의 기록> https://www.youtube.com/watch?v=Y2w7utTezy4

 

 


 

 

2. 노동 수탈의 일상화에 대한 거부로부터-동경대 전학공투회의 

 


 

      그렇다면 또 하나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동경대의 경우는 어땠을까? 동경대의 경우는 시작부터 일본대전공투와는 그 운동 양상이 달랐다. 발단이 된 것은 의과대학의 인턴 문제였다. 애초에 위계와 노동 수탈의 일상화를 거부하는 노동문제로 시작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래서 청년 의사들이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인턴제도의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연수의 제도였는데, 그래도 여전히 젊은 의사들이 수탈의 대상이 되었고, 그들은 병원과 연수의 사이에 협약을 제대로 맺어 보려고 했다. 일방적으로 대학 쪽에서 정하는 사항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도 하나의 주체로서 협약에 ‘개입’하려고 했던 것이다. 요구의 관철을 주장하면서 동맹 휴학에 들어갔지만, 대학당국에서는 대화를 하려고 들지 않았다. 그러던 중 대화를 방해해 왔던 의국장을 추궁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이 과도한 처벌을 받게 된다. 퇴학처분 4명을 포함해서 17명에 대한 징계였다. 패전 직후 미군정에 의한 레드 퍼지(Red Purge) 이후 최대규모였다고 한다. 그 자리에 없었던 학생들까지 표적 삼아 징계하는 학교당국의 처사에 항의하기 위해서 학생들이 야스다 강당을 점거하게 되었고, 총장은 곧장 학교로 경찰을 불렀다. 이것을 계기로 의대 중심의 운동이 전학규모로 확대되었다. 이제 인턴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학자치라는 공동의 문제로 번져 나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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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다 강당 점거투쟁의 풍경과 야마모토 요시타카의 『나의 1960년대』(돌베개, 2017년)>

 

 

     7월에는 전체 학생 규모로 야스다 강당이 점거되고, 그 속에서 동경대 전공투가 결성되었다. 건물 앞 광장에서 다양한 행사와 모임이 만들어지고, 대학전체를 바리케이트로 봉쇄하면서 그곳은 일종의 '해방구'가 되었다. 동경대 투쟁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대학원생들의 역할인데, 의대의 경우에도 인턴들을 중심으로 움직였던 것과 유사하다. 전공투 결성에 앞서서 대학원생 조직으로 전학투쟁연합(이하 ‘전투련’)이 만들어졌고, 이들이 전공투를 만드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당시 물리학과 박사과정에 있었던 야마모토 요시다카(山本義隆)라는 인물이 중심이 되었다. 대학원생들과 연구체계의 가장 말단에 있는 조수들, 그리고 학부생. 이렇게 삼자가 결합해서 만들어졌다는 데에 동경대 전공투의 특징이 있다.

     일본대의 경우에도 그렇지만 특히 동경대의 경우, 지도부 없는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향했다. 동경대에는 ‘조수공투’도 만들어져 있었는데, ‘조수공투’에서는 개인의 주체적 결의에 의해서만 참여할 것이 합의되었다.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참여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판단에 따르며, 지도부를 두지 않고 모든 것을 전부 토론으로 결정했다. 주체적인 참여도가 낮아져 모이지 못하게 되면, 그때는 더 이상 조직 유지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조직은 일체의 강요없이, 주체적 결의에 의해서만 유지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자기를 대표해 주는 지도부를 따로 두지 않고, 모두의 토론으로 사안을 결정하는 직접민주주의의 원리는 조수공투 뿐 아니라 전공투 전반에도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후지이 선생님은 재미있는 사례를 하나 소개했는데, 동경대 전공투에서도 무언가 결정해야 할 때 ‘대표자회의’라는 게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회의는 어떤 단일대표가 아니라, ‘아무나’ 참여할 수 있는 자리였다. 참여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내가 대표’라고 하고 나가면 되는 ‘무대표 대표자 회의’인 셈이다. 게다가 결정된 사안에 대해서도 그다지 강한 구속력이 없었기 때문에, 결정이 나도 안 하고 싶으면 안 해도 된다. 어떻게 보면 이런 점은 조직 운동의 결집력이나 효율성의 면에서는 약점으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철저하게 민주적이라는 점에선 강점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전공투는 ‘조직’이라기 보다는 ‘끊임없는 조직화과정’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시스템 하에서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생길 때마다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이 얼마나 재미있는 것인지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를 위해 항상 긴 토론이 있었다. 매일매일 토론과 회의만을 반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부분이 과거 학생운동과 결정적인 차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전의 학생운동은 학생회 조직이었던 전학련이 중심이었고 어디까지나 당위에 기반하여 동원되는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전공투에서는 개인적인 결단에 의해서 행동하는 방식으로 운동을 지속시켰다. 당시 일본에는 신좌파 조직들이 아주 많았음에 불구하고 전공투의 이러한 운동 방식은 신좌파로 하여금 운동을 지도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래서 전공투 자체를 어떤 조직이 장악하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음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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