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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공공역사’이며 무엇이 ‘공공역사’인가 - 백승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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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0-04-28 조회수 : 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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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공공역사이며 무엇이 공공역사인가

 

1. 어쩌다 공공역사인가

 

연구소 상임연구위원들이 주도하는 토론장 난장판은 최근 두 차례 모임에서 공공역사를 다뤘다. 201910월에 있었던 제2회 난장판에선 정병욱 상임연구위원이 <반일종족주의> 붐에 대한 대응 차원에서 공공역사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새해 들어서 열린 제3회 난장판은 이동기 연구위원을 초청해서 공공역사의 개념과 실천을 집중적으로 다뤘다. 상임연구위원들을 중심으로 공공역사를 연구소의 새로운 의제로 제시하려는 움직임이 점차 구체화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2회 난장판이 열릴 당시에 <반일종족주의>는 교보문고 광화문점 베스트셀러 코너 1위를 몇 주째 유지하면서 역사학 관련 도서로는 이례적으로 10만 부 이상 팔리는 등 화제를 모으고 있었다. 이 책이 정식으로 출판되기 전부터 일본군 위안부동원이 당사자들의 선택과 의지에 따른 것이라는 식의 주장은 저자들의 강의형식으로 제작되어 유튜브를 통해 퍼져나갔다. 출판이라는 전통적인 매체를 통하지 않고서 새로운 매체를 통해 전파되는 형식은 책의 진부한 주장과 대조적으로 참신했다. 그렇다면 <반일종족주의>의 인기는 새로운 매체를 활용한 혁신의 승리인가? 아베에게 사죄한다는 태극기집회 지지자들의 입맛에 맞는 주장을 해서 소위 우파 코인이 몰려든 것은 아닐까? 판단은 어렵지만 무언가 새로운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하기엔 충분했다. 2회 난장판은 연구소 구성원들이 벽사당을 가득 채울 만큼 높은 관심 속에 진행되었다.

 

이 날 난장판은 <반일종족주의>에 대해서 깊게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는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중들의 관심을 끄는 것이 곧 돈이 되는 주목경제의 시대에 <반일종족주의>처럼 자극적인 주장을 내세운 책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 일일지 의심스럽다. 그것이 설사 비판이라고 해도 말이다. 게다가 민간에서 내놓은 대중서에 대해서 규탄성명을 한다거나 긴급하게 반박하는 행사를 개최하는 것은 대상 도서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만 더 높이는 결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2회 난장판에서 발제자가 <반일종족주의>에 대한 논평 대신에 역사지식의 대중적인 수용에 초점을 맞춘 것은 이런 점에서 적절한 대응이었다.

 

제가 학계의 민족주의나 국민국가 비판에서 제일 아쉬운 점은 진태원도 지적했듯이 국민 또는 대중을 수동적 예속적 주체로 그린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이라면 개인이나 어떤 구성원이 국가나 민족주의에 규정당하면서도 어떻게 그것을 전유하면서 살아내는지 탐구할 여지가 없습니다……저는 민족주의 자체보다는 행위주체의 관점에서 민족주의를 역사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고, 왜 대중은 고대사를 그렇게 전유하는지 탐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병욱에게 한국사학계에서 민족주의 비판은 한국의 모든 문제가 마치 반일 종족주의때문이라고 주장하는 <반일종족주의> 저자들의 태도를 연상시킨다. 반일 종족주의 때문에 숨 쉬듯 거짓말을 하고 샤머니즘에 빠져서 물질주의와 육체주의에 물들고……이런 논리처럼 민족주의 비판자들도 민족주의가 한국의 모든 병폐를 만들어낸 근원이라는 식으로 규정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2019년 봄에 연구소에서 주최했던 학술대회 국가정통론의 동원과 역사전쟁의 함정역시 마찬가지 문제가 있다. 시민 다수가 임정법통론을 받아들이고 이에 대해 자부심까지 느낀다면 이에 대한 분석이 있어야 하지만 학술대회의 발표들은 국가를 비판하는 데만 집중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정병욱은 역사연구자들이 원론적 비판을 넘어서 대안적인 정체성 형성을 위해 진흙탕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공공역사는 진흙탕에 뛰어들자는 제안의 다른 이름이다. 정병욱은 역사연구자가 역사 지식을 널리 퍼뜨리고자 할 때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정확성을 꼽는다. 그의 공공역사 구상에 따르면 역사연구자가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기 때문에 매체를 통해 전파하거나 유통하는 역할은 해당 분야 전문가들에게 맡기고 다만 매체활용에 간접적으로 관여하는 편이 좋다. 역사연구자들이 역사지식 생산에서 정확성을 담보할 수 있다면 기념물, 박물관, TV 사극, 만화, 웹툰, 영화 등에 대해 비평하는 방식으로 사회와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

 

2. 무엇이 공공역사인가

 

역사연구자들이 사회와 소통해야 한다는 주장에 이견이 있을 사람은 없다. 대학에 몸담고 있는 연구자가 역사연구를 사회 속에서 고립된 실험실에서 수행할 때 가장 순수하게 해낼 수 있다고 믿는다면 순진함을 넘어서 무책임하다. 대학에서 연구비는 국가 재정에 주로 기대고 있다. 작년 한 해 한국연구재단에서 연구개발비로 지출된 예산은 인문사회 분야에 2315억 원이었다. 이 금액이 전체 연구개발비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턱없이 낮기 때문에 대학의 위기로 이어지고 있다는 비판이 있지만 이 역시 대학의 연구비가 그만큼 국가 재정에 기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연구자는 재정을 매개로 항상 사회와 소통 중이다. 연구자는 연구비를 지원받기 위해서 자신의 연구가 얼마나 공공에 이익이 되는지를 반드시 설득해야 한다. 국민 세금을 모아서 연구비를 지원하는 만큼 연구 활동이 사회적 쓸모를 입증해야 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게다가 대학운영에서 국가재정이 차지하는 비율을 고려한다면 대학에 자리를 잡은 전임교수들에게 지급되는 연봉 역시 국가재정에서 지출되는 비용이라고 볼 수 있다. 한 번 정교수가 되면 그 뒤론 연구활동을 거의 하지 않던 분위기가 팽배했던 시절은 벨 에포크가 아니라 모럴 헤저드의 시대다.

 

공공역사라는 개념이 지닌 지향은 역사지식의 사회적 쓸모에 대해 다시금 주목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반갑다. 그런데 의아함도 생긴다. 1987년 민주화를 전후해서 역사의 대중화라는 기치를 내걸고 창립한 여러 연구소들이 이제는 한국사학계의 주류가 되었다고 하지 않나. 역사문제연구소도 1986년 문을 열면서 우리 역사의 여러 문제들을 공동연구하고 그 성과를 일반에 보급함으로써 역사발전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내세웠다. 지금도 대중강연을 비롯해서 영화상영회, 답사, 구술기록 등 다양한 방식으로 사회적 활동들을 해나가고 있다. 하지만 공공역사에 대한 제안은 이전에 해오던 사업들에 공공적 성격이 부족하다는 비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공공역사가 지향하는 새로운 공공이란 무엇인가?

 

3회 난장판은 이러한 질문을 다루기 위해서 이동기 연구위원을 초청하여 진행했다. 그에 따르면 공공역사는 전문적인 학술연구의 장인 역사학과 대학 그리고 학교 너머에서 이루어지는 공적인 역사 서술과 재현의 모든 형식이다. 여기서 핵심은 너머에 있다. 공공역사(public history)는 역사연구자들이 연구실 안에서 해오던 학계 역사(academic history) 영역 바깥에서 벌어지는 역사 서술과 재현 행위인 것이다.

 

그렇지만 공공(public)이라는 개념이 워낙 방대하고 추상적이기 때문에 공공역사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기 여전히 어렵다. 발제자 역시 공공역사 개념 규정이 다양하고 복합적이며 가변적이라고 말한다. 이는 공공이 단일한 총체가 아니라 다양한 주체가 행위하는 사회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는 공공역사 개념의 모호함을 걷어내기 위해서 소거법을 사용한다. 우선 공공역사가 아닌 것부터 선을 긋자는 것이다.

 

첫째, 공공역사는 사적인 것(les private)’에 대비되는 공적인 것(les publica)’을 다루는 역사가 아니다. 둘째, 공공역사는 학교 역사교육 등을 통해서 재생산되는 역사의식의 재현인 역사문화와 비슷하지만 이러한 틀로 포괄하지 못하는 더 다양한 역사 재현과 활용을 함께 아우른다는 점에서 다르다. 셋째, 공공역사는 역사작업장 운동으로 대표되었던 민중사(popular history)와 달리 대학의 전문 역사연구자들이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대중의 역사화같은 지향과 다르다.

 

이처럼 공공역사가 아닌 것들을 소거했는데 이상하게도 개념이 명확해졌다기보다는 더욱 모호해진 느낌이 든다. 이동기에 따르면 공공역사는 연구실 바깥 모든 공적인 역사 활동을 포함하며 모든 기대를 포괄한다. 세부 영역과 양식 역시 1) 역사 관련 기사들과 역사 기획물, 역사 다큐멘터리 등 역사 관련 프로그램 제작 2) 역사박물관이나 역사 주제 전시관의 역사 전시 기획 3) 정치나 행정을 위한 역사자문과 프로젝트 수행 4) 기업의 역사 활용 또는 마케팅, 지방사와 가족사와 생애사 전문 저술 작업 등 역사 서술과 재현에 해당하는 모든 영역을 아우른다. 학술논문 쓰기와 학술발표, 교육과 대중강연처럼 역사연구자들이 전문적으로 해온 영역을 제외한 모든 활동이 공공역사에 포함되는 것이다. 사실상 학계 역사(academic history)의 여집합이 공공역사란 공식이 성립하는 셈이다. 심오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 같지만 학계 역사의 전문성만 강조할 뿐 구체적으로 지시하는 내용이 없어 텅 빈 느낌이다.

 

이동기는 이 지점에서 공공역사 개념을 정의하는 것을 오히려 유보한다. “어디든 공공역사는 아직 실험 중이다. 개념과 이론을 둘러싼 논의도 더 필요하겠지만 당분간은 실제 공공역사의 실천 또는 양상에 대한 경험적 분석과 비판적 조명이 더 시급하다. 규범과 당위를 성급히 내세우기 보다는 공공역사의 여러 발전 양상과 논쟁 과정과 결과와 영향에 대한 분석과 성찰이 더 중요해 보인다.” 하지만 그가 주로 분석하고 있는 사례가 현대사박물관에 국한되어있다 보니 공공역사라는 실천이 학예학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인다. 현재 전시기획 등을 맡고 있는 학예사들 역시 역사학을 전공한 학계 역사가들이며 역사콘텐츠학과가 이미 개설 중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공공역사가 어떤 의미에서 새로울 수 있는지 이해하기가 여전히 힘들다.

 

3. 공공역사는 무엇과 싸우는가

 

이동기는 공공역사 개념을 제안하면서 학계 역사의 전문성을 유독 강조한다. 그는 이 지점에서 임지현이 1999<역사비평>에 기고했던 권력의 역사학에서 시민의 역사학으로에서 제안했던 대중의 역사화가 자신의 공공역사 개념과 전혀 다른 차원과 맥락이라고 철저하게 구분한다. 공공역사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동기의 소거법을 따라서 대중의 역사화가 어떤 제안이었는지를 다시금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대중의 역사화에 앞서 역사의 대중화가 있었다. 1980년대 후반 민중사를 주창했던 젊은 역사학자들이 역사학의 과학화와 대중화를 내걸고 역사문제연구소 등을 만들었다. 1990년 구로역사연구소가 출판했던 <바로 보는 우리역사 1, 2> 같은 대중서는 역사의 대중화가 이루어낸 결실로 평가받았다. 이 책의 출판 당시 역사문제연구소 상임연구원이었던 김성보는 이 책에 대한 서평에서 민중의 역사를 실제 한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다뤘다는 점에서 대중화실현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인정했다. “민중의 역사에 대한 알 권리와 요구에 부응하였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는 것이었다.

 

1980년대 말부터 익숙해진 역사의 대중화는 한국사학계에서 새삼스러운 지향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1990년대 말에 역사의 대중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들이 갑자기 커지기 시작한다. 이는 1995년 교육개혁위원회 출범 이후 국가가 주도하는 대학개혁이 가속화했기 때문이다. 특히 IMF를 겪으면서 지적자산을 통해서 미래 먹거리를 확보해야 한다는 요구가 대학 전반을 휩쓸었다. 오늘날 대학을 위기로 내몰고 있다는 교육의 시장화가 힘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인문사회과학 분야는 돈이 전혀 안 되기 때문에 분과학문의 존재 이유 자체가 의심 받는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반면에 이공계 분야는 돈이 너무되기 때문에 산학협력처럼 급격히 시장화로 학문성격이 왜곡될 위험에 처했다. 1990년대 말에 양측 모두에서 역사의 대중화’/‘과학의 대중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진 것은 대학 지식생산체제가 공통적으로 처한 위기상황에 따른 것이었다.

 

대중의 역사화역시 마찬가지 위기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제안이었다. 당시 임지현은 이렇게 제안했다.

 

역사학이 시민사회에 자신의 입지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먼저 역사학의 학문적 존재이유를 사회권력의 주체인 민중들에게 납득시켜야 한다. 이 글에서 대중의 역사화라고 이름붙인 작업이 바로 그것이다. 대중의 역사화는 대중을 역사지식의 전파대상으로 삼는 역사의 대중화를 넘어, 역사학이 대중의 일상생활 속에 깊이 침투하여 뿌리내리는 것을 지향한다. ‘대중의 역사화에서는 대중이 지식의 일방적 전파대상, 즉 단순한 객체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역사 연구자와 공동주체가 됨으로써 전문 연구자와 대중이 함께 텍스트를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대중이 위계적으로 짜여진 조직에 의해 정치적으로 동원되는 것을 거부하고 스스로가 행동의 주체가 되고 행위주체들을 수평적으로 한데 묶는 네트워크 운동에 역사학이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대중의 역사화가 참조모델로 삼는 것은 1970년대부터 스웨덴에서 시작된 네가 서 있는 곳을 파라!’ 운동과 영국의 역사작업장 운동이었다. 전자는 노동자들이 스스로의 역사를 쓰자는 운동이었다.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노동과 관련해서 가장 전문가이기 때문에 전문 역사가들보다 자신의 역사를 더 잘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운동에서 전문 역사가들은 원칙적으로 배제되고 다만 인식론적 문제를 해결해주는 보조자 역할에 머물 뿐이었다. 반면에 후자는 대학의 성인교육프로그램을 통해서 전문 역사가와 대중들이 만나는 과정에서 지역사 프로젝트, 민중사, 이야기역사,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연극, 영화, 수필, 주민박물관 등으로 역사의 시야를 넓혔다. 임지현은 이 대목에서 역사작업장 운동에서도 전문 역사가들이 역사 서술에서 배제된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대중의 역사화가 모델로 삼았던 유럽 좌파 역사운동이 역사 서술과 재현에서 노동계급의 기억과 계급문제에 대한 대중적 인식을 끌어내기 위한 도구였을 따름이라고 비판할 수는 있다. 임지현이 당시에 대중의 역사화라는 개념을 통해서 비판했던 권력의 역사학에는 노동계급 의식을 선험적으로 전제했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도 포함된다. 역사작업장 운동 역시 이러한 선험성에 기반을 두고서 노동자들의 저항성과 연대를 발굴하고자 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흥미로운 역설이 발생한다. 역사작업장 운동이 노동자 개개인의 기억에 천착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노동계급 의식에 대한 선험적 규정이 지닌 모순을 도드라지게 했다. 일상사가 알프 뤼트케가 역사작업장 운동에 참여했다가 일상사 연구로 전환하게 된 것은 이러한 임계점 때문이었다. 일상은 일반모순이나 주요모순 등이 일반적으로 관철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양한 권력들이 교차하며 상이한 상황들을 만들어내는 무대라는 인식을 이끌어낸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일본군 위안부문제 연구를 보면 처음에는 민족문제로 접근했던 생존자 구술작업이 진척되면서 이 문제가 계급, , 인종 등과 관련한 권력들의 흐름들이 교차하는 가운데 만들어졌다는 인식으로 나아갔다. 민중에 대한 관심이라도 노동자, 피해 생존자들의 경험 속에서 다양성과 타자성을 발견한다면 이것을 인습적인 민중사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

 

이동기가 자신의 공공역사 제안을 대중의 역사화와 구분하면서 전문성에 대해 특별히 강조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 특히 정치인들에게 민원을 넣어서 교과서 서술이나 역사연구기관의 연구를 자신들의 입맛대로 좌지우지하려는 집단들이 많아지는 것을 보면 시민들이 단순히 참여를 많이 하는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과학기술학자 해리 콜린스와 로버트 에번스 역시 과학기술 논의에 시민들의 참여가 좋을 것이라는 환상을 어느 정도 걷어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당시에는 과학기술학 일각에서 목양농이나 에이즈 활동가 등 공식적인 과학 교육이나 자격이 없는 사람들도 과학 지식 생산에 기여할 수 있다는 주장이 어느 정도 힘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콜린스와 에번스는 이와 같은 비전문적 전문성주장이 전문성을 무시하는 지나친 비약이라고 비판했다. 이 같은 방식의 과학의 민주화는 오히려 과학기술의 전문성을 회화화하고 과학기술이 낳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오히려 문제 해결을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었다. 이들의 논의는 "누가 전문가로 간주되어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도록 만들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 이동기가 공공역사를 대중의 역사화와 구분하면서 전문성을 강조한 것 역시 마찬가지 의의가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콜린스와 에번스가 과학자들의 전문성을 강조함으로써 전문적 과학과 민주주의 정치를 분리했다는 점은 다시금 과학기술의 가치중립성이라는 낡은 명제를 부활시키려는 것이라는 우려를 불러일으켰다. 또한 이들은 전문성이 어떻게 구성되고 사회적인 신뢰를 받게 되는지에 대해서 다루지 않기 때문에 학계를 특권화할 수 있는 위험도 있다. 이동기가 공공역사를 제안하면서 학계 역사의 전문성을 강조할 때도 전문성을 주어진 것으로 제시함으로써 전문성을 물신화할 위험이 있다.

사실, 이동기가 대중의 역사화와 선을 긋고자 할 때 강조하려는 문제가 무엇인지 불분명하다. 그는 공공역사가 역사작업장 운동과 다른 점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공공역사는 그런 아래로부터의 역사전통을 이은 실천적 역사서술과 재현을 배제하지 않는다. 다만 공공역사는 그것 외에도 더 다양한 사회 속 과거의 현재화 욕구에 조응하고 개입해 역사의 공적 활용의 지평을 확장하는 것을 말한다. 아울러 대학에 종사하는 학자들의 참여가 공공역사에서 배제될 이유도 없다. 오히려 공공역사는 대학의 전문 역사가들과 공적 영역의 비전문적 역사가들과 다양한 사회적 행위 주체들이 함께 협력하는 일이기도 하다.”

 

공공역사의 문제의식을 더욱 분명하게 이해하려면 다양한 과거의 현재화 욕구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다루어야 한다. 차라리 역사작업장 운동에서는 노동자라는 분명한 행위자가 보였다. 반면에 이동기가 제안하는 공공역사 개념에서는 전문 역사가와 학예사 정도를 제외한다면 박물관에 방문하는 익명의 대중들 밖에 보이지 않는다. 과거 마르크스주의 변혁 전망의 선험성이 인습적이었다면 대중의 역사화에 대한 이동기의 비판은 공공이라는 텅 빈 명분하에 학계 역사의 사회적 영향력만 확대하려고 한다는 비판을 받을 여지가 있다. 민중운동이 제시했던 과학성이 더 이상 전망이 될 수 없으니 이를 대체한 것이 공공이 아닌가. 연구자들의 지도라는 일방성이 공공이라는 용어에 의해서 민주적 정당성을 획득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야말로 앞선 역사 대중화가 이루지 못한 욕망이 아니었던가?

 

4. 역문연의 공공역사

 

공공역사에서 이야기하는 공공은 다양한 행위 주체를 전제한다고 하지만 학계 역사의 전문성을 강조하다보니 지식의 전파라는 일방성이 계속 우려된다. 박물관 전시기획만 하더라도 가장 민주적이고 개방적인 소통과 결정 과정학계 역사의 전문성과 어떻게 병행될 수 있는지 의문이다. 문재인 정부에서 원전 가동중지 등을 두고서 운영했던 공론화위원회가 의사결정 방식을 둘러싸고 또 다른 갈등을 불러일으켰던 것을 고려한다면 더욱 그렇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공공은 모호하고 전문성은 강력하게 주장하니 공공은 자꾸만 단일한 대중(the public)처럼 보인다. 구체적인 얼굴을 가진 개개인이 아니라 익명의 덩어리로서 소비자 대중 말이다. 사정이 이러니 공공역사에 대한 이야기는 유튜브와 같은 새로운 매체를 활용하는 이야기만 거치면 자꾸만 사업아이템을 발굴해야 한다는 식으로 흐르게 된다. 공공역사 논의가 시간이 조금 흐르면 대중역사(pop history)로 귀결되는 것이다.

 

공공역사가 엄밀하게 정의될 수 없는 것이기에 공공역사로 분류할 수 있을 실천과 양상에 대한 경험적 분석과 비판적 조명이 시급하다는 주장에 공감이 가는 면도 있다. 돌이켜보면 역사문제연구소 역시 공공역사의 문제의식과 통하는 여러 사업들을 진행해왔다. 세월호 참사 관련 구술기록사업, 청량리 프로젝트, 옥바라지 골목 연대사업, 평화기행 등 사회적 필요에 응답하기 위해 전개했던 사업들은 지속적으로 있었다. 공공역사의 문제의식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라도 역사문제연구소가 주로 만나온 집단은 누구인지, 그들과 만나면서 어떤 경험을 했는지에 대해서 연구소 구성원들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공공역사의 실천 방향과 전략을 구체적으로 고민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이와 같은 사업 경험을 고려한다면 지금 제안되고 있는 공공역사 개념은 너무나 조화로운 협력을 그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서 평화단체들과 함께 진행했던 평화기행과 같은 경우 연구소 연구자들의 역할이 매우 모호했다는 평가가 있다. 평화기행은 해외 연구자들을 초청하여 남북대치 상황 등을 보여주며 한국 현실을 환기하려는 목적이 컸다. 이런 점에서 국내 연구자들의 역할은 기행 기획과 진행에서 매우 제한적이었고 다만 해외 연구자들과 교류하는 상대로서만 초대받을 따름이었다. 다른 사업들에서도 즉각적인 캠페인과 언론대응을 원하는 활동가들의 기대에 어긋나서 연구자와 활동가들이 갈등을 빚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다. 이처럼 대학에서 생산되는 전문적인 역사지식에 대한 사회적 수요는 연구자들이 기대하는 바와 어긋날 때가 많다. 연구소 구성원들이 피부로 느꼈던 현장에서의 장애물은 무엇이었나? 연구자들이 공공영역에 개입할 때 요구받았던 바는 무엇인가? 연구자들이 공공역사에 나서기 전에 연구실 내에서 하는 연구는 사회적 필요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새로운 역사비평과 관련하여 한 가지 의문을 덧붙이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정병욱과 이동기 모두 학술적인 역사연구뿐만 아니라 박물관 전시, 다양한 매체의 역사물 등을 적극적으로 리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학회지에 부록처럼 한두 편 끼어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질 것이 아니라면 사람들이 많이 읽는 대중잡지 같은 새로운 매체가 필요하다. 프랑스에선 1978년에 창간한 역사전문 대중월간지 <역사(L'Histoire)>가 매달 꾸준하게 발행하고 있다. 역사라는 주제를 가지고 40년 넘게 꾸준하게 발행하는 월간지가 있다는 사실은 대단하게 느껴진다. 이 잡지를 읽어 온 사람들이 그간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공공역사라는 개념이 새삼스럽게 소개되기 전부터 자리를 잡아온 것이다. 이처럼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문화로 자리를 잡은 매체가 버텨준다면 논문 형식이 아닌 글쓰기도 좀 더 활발하게 시도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역사비평>이 그런 역할을 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는 앞선 세대의 평가와 성찰이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