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기동통신]시민K들 (박은영,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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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0-06-30 조회수 : 3,348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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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K들
박은영(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K1
방역당국은 ‘필수적이지 않은 모임은 자제하라’는데, K1은 오늘도 대여섯 명이 모여 사는 연구실에 나와 앉아있다. 연구실에 나가는 건 필수적인가?
집에서도 읽기와 쓰기는 가능하다는 문장은 틀렸다. 적어도 K1에게는. 읽기와 쓰기가 가능한 장소는 사람마다 그야말로 ‘케바케(case by case)’라는 건 상식이다. 그러므로 ‘나는 연구실에서 써야 잘 써진다’는 K1의 명제에는 누구도 반박할 수 없다. 아니다. 사실 어디서건 글은 써지지 않는다. 글이 써지도록 하는 건 단 하나, 빛보다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마감밖에 없다. 그러므로 다시, K1의 연구실행은 다시 ‘필수’의 지위에서 쫓겨난다.
하지만 왜 굳이 이 시국에 연구실에 나가는지 다시 묻는다면 K1은 여전히 할 말이 많다. 우선은 집과 학교 외엔 오가지 않는 동료들의 동선에 대한 굳건한 신뢰가 있어서일 것이다. 그 외에는, 혼자 밥 먹기 싫어서, 혹은 이 ‘헛짓’을 자기만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하고 싶어서, 아이스 라떼를 챙겨가기 위해,
오늘 지도교수를 만난다던 A의 이야기가 궁금해서, 공부 말고 딴짓하고 싶은데 집에서 딴짓하면 밤에 침대에 누워 자신을 더 많이 구박할 테니까…….
이유를 대라면 이렇게 무궁하게 나오는 게 또 이유란 거 아니겠나.
사회적 거리두기 기간이 끝났을 때, 함께 만나 즐기러 간 젊은이들이 왜 클럽이나 노래방에 갔는지, K1은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얼마나 자연스러운 인생들의 반응인가. 오히려 거리두기를 하나 안하나 행동반경이 전혀 변하지 않은 자신에게 이유를 물었다. 의지적인 신중함과 공부 때문이었을까? 써야 할 글의 목차도 2주째 안 떠오르는 판에 속 시원한 답이 나올 리 없었다. 글로 돌아가기 위해 가까스로 찾은 답은 겨우 모카 프라푸치노뿐이었다.
하지만 K1이 굳이 공들여 이유를 찾지 않는 행선지도 있었다. K의 통장을 채워주는 사람들이 있는 곳. 그는 그곳에 갈 때 가장 많은 사람과 부딪히지만 죄책감도 망설임도 없다. 당연한 일이라고 K1은 생각한다. 동시에 손세정제가 보일 때마다 손을 소독하고 체온계가 보일 때마다 체온을 재면서도 굳이 연구실에 가는 건 자신의 반항심 때문이라고, 혼잣말을 해본다. 삶은 통장에 꽂히는 돈과 바이러스 수용체로만 환원되지 않는다는 최소한의 표시라고. “참, 버스에서 내릴 때 손 소독을 했었나?”
K2
만성질환자나 장애인들에게 그렇듯이, 뇌병변 장애인 K2에게도 확진자에 대한 낙인이 상시적으로 ‘자행’되고 ‘예비 확진자’에 대한 규율이 강화되는 이 상황은 낯설지 않다. K2에게 낙인과 규율은 골목 어귀에 앉아 매일 아이들을 나무라는 동네 할아버지 같은 존재다. 익숙하면서도 끝내 불편해 항상 도망칠 준비를 하지만, 매번 어느새 그 앞에 서있게 되는 그런 존재.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K2가 말귀를 알아들을 때부터, 의사선생님은 “운동을 열심히 해야 해.”라고 인자하게 말하곤 했다. 청소년기와 청년기에 할 일이 많아져 재활운동은 뒷전으로 밀어둔 K2를 보며, 부모는 “너 계속 운동 안하면 나중에 늙어서 아파”라며 걱정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K2에게 가장 무서운 협박은 아플 거라거나 지금보다 기능이 저하될 거라는 사실은 아니었다. ‘내가 아프면 누군가에게 의존해야 하고, 그에게 지금보다 더 민폐를 끼치게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과 자신의 나태가 그 가능성을 현실화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만큼 K2를 효과적으로 압박하는 건 없다.
‘최대한 민폐를 끼치지 않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 ‘사회의 유용한 일꾼’이 되거나 그걸 못하겠으면 최소한 ‘귀감’이라도 되는 것. 평생 K2가 자신의 장애에 대해 들은 각종 담론들을 다 추려본다면 아마도 그의 가장 큰 책임은 ‘사회의 귀감이 되는 것’일 것이었다. 그나마 “귀감은 귀신에게서나 찾아라”라고 소리치고 돌아설 수 있지만, ‘민폐가 되지 말라’는 말에는 할 말이 없다. 애초에 세상에서 제일 자존을 위태롭게 하는 일이 돌봄 받는 일인데, 사람들은 그 일을 혐오하기까지 하여 ‘민폐가 되느니 존엄사를 하겠다’는 말을 교양인의 증거라도 되는 양 서로 맞장구치고 있었다. K2로서도 ‘지금보다 더 민폐를 끼치는’ 존재가 되는 건 최대한 뒤로 미루고 싶은 상황이다. 2020년, ‘민폐’의 대명사가 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수많은 시민들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K2와 그가 아는 장애인이나 만성질환자들은 수많은 영양제 목록 중 하나쯤은 고의로 누락하고, 가끔 여유가 있는 주말에도 운동을 미루고 안 좋은 자세로 드라마를 완주하며, 채식하라는 의사의 ‘엄명’을 듣고 온 날에는 햄버거나 스테이크를 먹는다. 물론 반항은 오래 가지 못한다. 잔소리꾼은 사실 그들의 외부가 아닌 내부에 있으므로. 그걸 알면서도 굳이 ‘그 짓’을 한 번쯤은 꼭 하는 것은, 그들이 100% 환자만은 아님을 확인하고 그들은 의사의 ‘지시’를 받은 것이 아니라 의사의 ‘서비스’를 받은 것이라고 입증하려는 하나의 의례 같은 것인지도 모르다.
K2가 다녀만 오면 불안에 떨며 체온을 몇 번씩 확인하는 장소가 있다. 종합병원 내에 있는 재활병원이다. 웃기게 들리겠지만, K2는 놀다가 확진된 사람과 재활병원에 가는 자신 중 누가 더 경솔한지 비교했다. 그게 무슨 이상한 말이냐고? 사실 장애인들에게 재활병원은 ‘뭔지는 모르겠으나 안 다니는 것보다는 낫겠지’라는, “믿음으로” 평생 오가는 그런 곳이다. 치료를 받나 안 받나 체감하는 몸 상태는 거기서 거기란 얘기다. 그러니 치료를 받을지 안 받을지 선택권은 대개 의사가 아닌 환에게 있다.
물론 질병관리본부에서도 밝혔듯이 만성질환 관리는 매우 중요하며, 만성질한자와 장애인이 일상적으로 보건의료 서비스를 받는 것은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왜 하필 이 시국에 매일 이곳저곳을 오가야 하는 상황에도, 바이러스에 취약한 이들만 몰려있는 대형병원에서 굳이 치료를 받겠다고 했을까? 비율상 젊은 층들이 많을 장소에서 놀았던, 과도한 스트레스에 상시적으로 노출되어있는 10-20대들과 자신 중에 누가 더 무모했는지, 혹은 무엇이 필수이고 무엇이 아닌지, K2는 도무지 명확한 답을 할 수 없었다.
시민K들
K2가 점점 더 성실하게 운동과 영양제를 챙기듯, 반년 만에 사람들은 성실한 방역의 수행자들로 변신했다. ‘전쟁이 터져도 예배는 드려야 한다던’ 종교인들의 목소리도 잦아들고, 한국인들이 목을 매던 교육도 바이러스 앞에 다 부차적이 되어버렸다. 방역만이 왕좌를 차지하는 데 성공했고, 이제 강력한 방역사회를 건설할 모범적인 시민들을 주조하고 있다.
시민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규율화하는 수단은 이번에도 ‘민폐’라는 단어다. 이 단어는 ‘죄책감’을 일으키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며, 모두를 복종시킬 수 있는 절대반지다. 하지만 이는 모든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존재조건이기도 하다. ‘인간은 서로에게 민폐를 끼쳐야 생존 가능하다’는 문장은 ‘인간은 사회적 동물’라는 추상적 명제에 대한 가장 정확한 설명이지만, 이 만큼 사람들이 격렬하게 저항하는 문장도 없다. 그렇게 밀접접촉을 통한 보살핌이 필요치 않은 K들은 노약자들을 ‘배려해’ 오늘도 더욱 ‘강력한’ 방역사회를 만드는 데 동참한다. 스스로 알아서 모범적으로. 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시민K들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