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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실감나는 역사책 좀 없나요? - 김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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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4-07-28 조회수 : 6,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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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영화판(보통 영화 일에 종사하면서 자신을 비하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 ‘판’이라는 용어를 많이 쓴다. 좀 있어보이는 듯한 말로는 영화‘계’라고들 하더라)에서는 새로이 사극붐이 부는 듯한 인상이 짙다. 곧이어 개봉할 일련의 영화들, <역도산>이나 <바람의 파이터>라던가, 좀 웃기기 하지만 개그맨 서세원이 제작하고 감독한다는 <도마 안중근>(조폭 마누라 같은 안중근을 보게되는 건 아닐까 걱정이군.), 최초의 여성 비행사 박경원의 일대기를 그렸다는 <청연>(근데 이 영화는 만든다고 소문난지 3년은 된 거 같은데 찍긴 다 찍었나? 갑자기 궁금해지는구만.)까지. 사실 따지고 보면 <실미도>도 <태극기 휘날리며>도 사극이었긴 하다.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극이니깐. 얼만큼 근거하여 제대로 찍었는지에 대해선 뭐 넘어가기로 하고.
  영화판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일한 지는 한 5년쯤 되어 가고 아주 오래 전 대학원에서 역사학이라는 것을 공부했던 나로서는 이런 소식을 듣고 있으면 뜬금없는 의무감에 살짝 마음이 무거워 지기도 한다. 대체로 드라마를 쓸 때도, 지금 영화 일을 하면서도 계속 알콩달콩한 멜로물만 써왔지만. 그러면서도 마음속에는 아 언젠가는! 괜찮은 사극하나 써야 할텐데 하는 미련이 남아 있는 것이다.
  물론 이전에 전혀 시도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영화 일이란 것이 혼자서 연구하고 혼자서 쓰는 작업이 아니고, 복잡하게 작가, 감독, 제작자, 배우 등등의 난항이 겹치다보니, 소위 말해 ‘엎어지는’ 일이 비일 비재라 그중 나의 사극 시나리오도 한 두편 쯤 엎어져서는 다시 일어날줄을 모르고 있다. 그중에는 내가 쓰다가 도저히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그만둬 버린 놈이 하나 있었는데, 사실 이 시나리오를 준비하면서 느낀 바를 살짝 토로해볼까 하는 것이 이 글의 원래 의도다. 말을 꺼내기는 무척 어려워 이리저리 빙글빙글 돌다보니 서론이 너무 길어졌다. 그러므로 이후는 간략하게 할 말만 속사포처럼 털어놓고 서둘러 끝을 맺으려한다. 주인공 나오기 전에 배경 설명 엄청 하고 나서 주인공 나오자마자 교통사고 나서 죽고 끝나버리는 엽기적인 영화쯤이라고 생각하셔도 된다.
  내가 쓰려던 시나리오의 배경은 1930년대였다. 인물사극(하나의 인물을 다루는 것이라면 그 인물의 전기적인 사실에만 충실하면 되니깐 조금 더 쉬웠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은 아니었고 그냥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한 모던걸과 모던보이의 사랑을 그린 멜러물(여전히 멜러물!)이었다.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놉시스도 쓰고 트리트먼트도 쓰고 좋아 좋아 고고 하면서 프로듀서와 짝짜꿍 즐겁게 작업을 해나갔다. 그러다가 이제 진짜 캐릭터 디테일 뿐만 아니라 시대상까지도 정교하게 고려해야하는 시나리오 단계에 오자 갑자기 모든 것이 아득해졌다. 이거 이렇게 막 써도 되나 싶은 것이, 비록 나는 일제시대 전공자는 아니었으나 역사공부란 것의 언저리에서 뒹굴 뒹굴 놀아본 경험도 있는데, 이렇게 무책임하게 그랬겠지 뭐 하면서 써도 되나... 그래서 일단 프로듀서와의 합의하에 작업을 중단하고 그 시대상을 잘 그렸다는 학자들의 글을 찾아 읽기로 하였다.  일단은 쉬운 마음에 개설서 같은 것을 찾았다. 그런데! 없었다! 나도 읽고 프로듀서도 읽고 장차 감독하실 분도 읽고 두루두루 읽으면서 감이나 잡아볼까 하는 책을 찾아보았으나, 없었다. 몇 권 있기는 하였으나 너무 세부적이었고 그다지 흥미롭지도 못한, 너무 자세한 내용들이 역사 대중서라는 이름으로 나와 있었다. 아니면 정말 날림으로 쓴 것같은, 믿기지 않는, 역사학자도 아닌 분들이 쓴 글들만 좀 있었다. 일단의 낭패감 이후에 그렇다면 개설서는 포기하고 디테일하게 찾아서 보자. 그렇다면 논문을 찾아 읽어 볼까. 오래 전 역사 공부할 때 이 시기를 연구하던 연구자들을 꽤 많이 봐왔으니 어느 정도 성과를 내시지 않았을까 기대로 몇 편 논문을 찾아 읽었다. 아아. 이번엔  너무 어려웠다!!! 지식이 딸려서 그렇겠지만, 어떤 것은 거의 서론의 첫 문장도 무슨말인지 모르겠다 싶게 어려운 것도 많았다. 이렇게 어려운걸 하시는 분들이 참 장하다 싶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국 몇 편의 논문을 읽고 내린 결론은 그 무엇도 영화로 그 시대상을 그려내기에는 도움이 안된다는 것이었다. 보통 사극에서는 그 시대의 소품이나 의상같은 것을 잘 재현해 내면 고증이 잘됐다느니, 시대적 근거에 충실했다느니 하고들 말하지만, 우리 팀이 원한 것은 그런 디테일한 문제부터 그 시대의 멘털리티라고 해야 하나, 뭐 그런걸 잘 그려내면서 그 안에 남녀의 사랑을 심어보자 뭐 이런 것이었는데, 읽어온 책과 논문들에서는 그런 것을 기대하기가 어려웠다. 뭐 능력부족이라 그렇겠지만.
  아무튼 나는 그래서 대략 6개월간의 조사기간을 끝내고 시나리오도 접었다. 그냥 훌떡훌떡 나도 몰라 하고 쓰고 싶지는 않아서였다. 그래도 뭐 역사공부한다고 덤볐던 기억도 있는데 무책임하게 쓰고 싶지는 않았던 게다. 그 후로 나는 혹시나 싶어 요즘도 책방에 가면 1930년대 관련 책들을 찾아보기는 한다. 그런데 나는 아직까지 쉽고 이해할만 하며, 아 1930년대는 대강으로 이러한 시대였구나 하고 감을 잡을만한 책을 찾아내지 못했다. 연구사에서는 길이 남을만한 논문들이 많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역사연구와는 전혀 관계없이 살다가 일 때문에 혹은 일말의 관심으로 인하여 역사책이나 한번 읽어볼까 하는 무지한 대중들에게 역사학연구자들이 내놓는 책들은 너무 수준이 높다. 따라가기 힘들다. 아주 오래 전 대학원 다닐 때 많은 연구자들이 대중들에게 쉽게 다가가는 역사학에 대해 고민하는 것을 지켜본 적이 있다. 그리고 그러한 고민에 무척이나 공감하였었다. 그 후로부터 10여 년, 많은 부분에서 역사학의 대중화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안다. 하지만 아직도 나는 영화 시나리오를 쓰는데 보탬이 될만한, 무지한 딴따라인 내가 이해할만한 수준의 책은 찾아내지 못했다. 빨리 그런 책이 나왔으면 좋겠다. 그런 책이 나온다면 역사학자들께도 욕먹지 않을 시대상을 잘 그려낸 멋진 사극 한편 만들고 싶다.    

필자 : 시나리오 작가, 이화여대 사학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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