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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비 내리던 날, 인왕과 백악의 사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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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4-08-16 조회수 : 1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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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인왕산 답사의 D-day는 7월 13일로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 12일, 13일 크게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11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 어쩌면 산행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답사 일정을 변경할 수도 없는데. 그렇다면 인왕산 산행을 단념할 경우를 대비하여 예비적으로 인왕산 주변 역사유적 답사를 특화하는 것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본래 인왕산 코스로 생각했던 구간은 “사직공원 - 황학정 - 인왕산 정상 - 현진건집터 - 무계정사 - 부암동사무소 - 자하문” 구간이었다. 이 구간은 인터텟 검색에서 확인되는 가장 무난한 산행 코스였다. 그런데, 이제 인왕산 산행 코스와는 별도로 인왕산 주변 코스를 마련해야 하는 상황에서 가장 상식적으로 사직공원에서 출발하여 자하문으로 끝나는 구간을 상정해 보았다. 주로 종로구청 종합자료실의 도움을 받아 “사직공원 - 황학정 - 필운대 - 송석원 터 - 선희궁 터 - 청풍계 - 운강대 터 - 청송당 터 - 자하문”으로 대략의 코스를 만들었고, 자하문을 지난 다음엔 “석파정 - 석파랑 - 세검정 - 홍지문” 구간을 추가하였다. 과연 어떤 코스를 밟게 될지, 산행을 할지, 유적탐방을 할지, 그것은 당일 판단할 문제였다.

8.
7월 13일.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아침이었다. 8시. 지하철 서울대입구역 안에 들어가 신문을 보며 일행을 기다렸다. 모두들 예정대로 왔다. 답사자료집을 찾는 관계로 조금 시간이 지체되었다. 지하철에 승차했는데 몸과 몸이 껴붙는 만원 지하철이다. 시간대로 보면 당연한 사실. 그렇지만, 너무나 오랜만에 타 보는 만원 지하철이라 그런지 거북하고 답답함을 어찌 인내해야 할지를 생각하기보다는 만원 지하철을 타고 다니던 그 시절의 풍경을 회상하기에 바빴다. 한데, 이 와중에도 바싹 눈에 책을 붙여 독서하고 있는 옆의 옆의 사람을 보았다. 저 사람은 정말 책을 읽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고난의 지옥철에서 수양을 하고 있는 것일까? 독서는 정신을 집중하는 수양의 한 방법이다. 거경과 궁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면 저 사람의 책 읽기는 현대 “지하철 거경(居敬)”의 실례를 보여주는 것이리라. 낙성대에서 같은 열차를 탄 일행 하나와 핸드폰 교신이 성사되어 교대역에서 상봉을 하고 일행은 3호선으로 갈아탔다. 3호선은 2호선보다 형편이 좋아서 준비한 자료집을 읽을 수 있었다. 다들 열심히 자료집을 공부하고 있었다. 몸도 마음도 인왕산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9.
경복궁역 1번으로 나갔다. 편의점에 들러 물, 김밥, 초콜렛 등을 구입하고 곧장 사직공원을 향했다. 가는 도중에 안개비를 맞으며 북쪽으로 백악산을 보았다. 순간! 백악산은 하얀 연무에 휩싸여 신비한 자태를 살짝 드러냈다. 아, 바로 이것이구나. 7월 우중(雨中) 답사의 묘미를 알겠다. 빗줄기는 안개비와 이슬비 사이에서 선율을 조율하고 있었다. 겸재 정선이 인왕제색도를 그리기 직전에 느꼈을 인왕산의 신비로움도 이런 것이리라. 마침내 사직공원에 도착하였다. 우리 일행은 다들 몽환적인 분위기에 들떠 멋진 답사를 예감하고 있었다.

10.
9시 30분. 답사를 시작하였다. 사직공원 안에서 좌측으로 가는 길을 밟았다. 아침 공기, 촉촉한 비, 어스름한 분위기, 고즈넉한 정경, 사직공원의 아침이 이렇게 좋은 줄은 몰랐다. 흡사 옛날 팔판동 살던 시절 삼청공원의 아침을 예찬하던 그 기억이 다시 날 정도. 하지만, 사직공원에 담겨 있는 사직의 원혼을 생각해 본다면 그렇게 공원의 정경에 취할 일이 아니다. 1911년 매일신문 기사에 의하면 사직단의 위패는 선농단 및 선잠단의 위패와 함께 불에 태워 소각되었다고 한다. 조선의 사직이 망한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사직단을 사직단공원으로 개조해 버렸다. 광복 후에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대한민국 국회는 사직공원에 국회의사당을 건립하려고까지 하였다 하니. 1960년대를 이해해 주자. 종묘 정전에까지 세종대왕기념관을 짓겠다고 극성을 부리던 시기 아닌가. 여하튼 중요한 것은 전국의 사직단이 서울, 남원, 광주, 안동, 성주의 5개 지역 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11.
사직공원은 더 이상 사직의 공원이 아니다. 일종의 역사문화 복합공간이라고나 할까. 복합의 원리는 난해하다. 무분별한 역사 합성의 현장에 원리라는 것이 있었던 것일까? 이를테면 사직공원 안의 사임당 신씨와 이이의 동상도 그런 경우다. 아니, 이들이 왜 사직공원 안에 있는 것일까? 이이가 살던 집은 교보빌딩 뒤편의 수진동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마 인왕산 주변에 西人이 많이 살아서 서인의 학문적 연원인 율곡을 인왕산 가는 길의 입구인 이 곳에다 기념했나 보다. 인왕과 백악 사이의 북촌에는 성혼도 살았고 송익필도 살았으며 정철도 살았다고 하지.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렇지도 않다. 그렇다면, 이이와 성혼의 동상을 세웠어야지 하필 이이과 사임당인가? 언제부터인지 이이의 이미지는 고유한 빛깔을 잃고 이이와 사임당의 관계에서 채색되고 있다. 아니, 심지어 이이의 이미지는 사임당의 이미지에 종속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지폐에서조차 율곡리가 오죽헌에 밀려난 것은 그래서가 아닐까? 동상을 유심히 보니 그 모습도 걸작이다. 졸업앨범에 보면 펜을 쥐거나 책을 보는 담임교사의 포즈를 볼 수 있듯이 꼭 그 모양으로 괜히 서안 위에 쌓인 책들을 손으로 만지고 있다. 표정도 흡사 사진사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경직된 표정이다. 한국 현대 역사문화의 전개과정에 대해서 탐구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해방 이후 역사인물에 대한 동상 건립의 역사를 추적하고 시기별 분석을 수행하면 어떨까? 우리시대의 흥미진진한 역사복합의 비밀이 어쩌면 그 안에 있을 것이다. 계단을 타고 오르며 그런 얘기를 꺼냈다.

12.
산책을 계속하니 단군성전이 나왔다. 이 단군성전도 사직공원의 역사 합성의 하나인데, 아무튼 문이 열려 있길래 슬며시 들어가 보았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단군상이 전각 안에 모셔져 있었고 어떤 남자가 수행을 하고 있었다. 한 눈에 단군 신앙인임을 알겠는데 건물만 보고 지나가기가 심심해서 내력을 물었다. 그랬더니 해방 이후 뜻있는 사람들이 모임을 만들어 단군을 기리는 성전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인왕산에 있는 국사당과도 관계가 있냐고 물었더니 정색을 하며 노기 어린 음성으로 하는 말이 사이비 종교단체와 우리 법인은 다르다고 신경질이다. 무언가 의식적으로 “그들”과 “우리”를 구별짓고 싶어하는 저 심리는 역설적으로 “그들”과 “우리”가 얼마나 밀착되어 있는지를 드러내 주는 증거가 되리라. 사무실에 단군성전과 관련된 책자가 있어서 그것을 주고 싶다는데 별로 내키지는 않았으나 한편으로 단군성전의 정체가 궁금하기도 해서 견문을 넓힐 겸 지하에 있는 사무실에 들어가 보았다. 사무실에는 과장이 막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를 맞이하였고 조금 있다가 연세가 든 이사가 들어와 인사를 나누었다. 그들로서는 우리 일행이 반가운 듯 차를 권하였지만 갈 길이 바쁜 우리들은 사양하였다.

13.
지난 3월에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삼일절 특집을 본 적이 있다. 대종교의 종사 나철을 다룬 것인데 무게중심은 나철이 아니라 대종교에 있었다. 다큐 내용 중에는 1942년 만주에서 벌어진 대종교의 “임오교난”과 역시 1942년 식민지 조선에서 일어난 “조선어학회사건”이 서로 긴밀한 연관이 있음을 지적한 부분이 있었는데, 사실 이 부분이 가장 흥미로운 대목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오늘 단군성전 사무실에서 설명을 들으니 이 법인체가 태동하는 데에 상당한 역할을 한 분이 이희승 선생이라는 것이다. 귀가 솔깃한 설명이었다. 이어서 우리 일행이 인왕산을 답사한다는 말을 듣고는 꼭 인왕산의 국사당에 가 보라는 권유까지 받았다. 하! 이래서야. 단군성전 사무실 안에서도 노장층과 연소층 사이에 세대간의 대화가 단절되어 있는 것인가? 누구는 국사당을 “그들”로 간주하고 누구는 국사당을 “우리”로 간주하고. 사무실을 나오면서 몇 가지 팜플렛을 받았다. 그 중에는 역시 단군단체답게 한단고기를 부연설명하고 있는 “태고사학”도 있었다. 단군은 인왕산에서 그렇게 현대를 살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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