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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여성 사회주의 운동가 정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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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4-05-06 조회수 : 12,8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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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회에 주세죽이 있었다면 북풍회에는 정종명이 있었다.

1920년대를 풍미했던 이 여성에 대한 개인사는 1929년 월간지 <삼천리>에 실린
회고담에 잘 밝혀져 있다. 매우 빈궁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녀는 아버지가
러시아로 일을 구하러 떠난 후 소식이 끊겨 어머니에게 길러져 왔다. 북감리파
전도사였던 그녀의 어머니는 어려운 살림에도 정종명을 배화여자학당에 보냈으나
결국 학비 문제로 4년만에 중퇴시켜야만 했다.

정종명은 17세 되던 해에 대한병원 통역관과 결혼했으나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않은 편이였다. 19세에 남편을 사별하고 시댁에서 나와 세브란스 병원
간호부학교를 졸업하고 조산원으로 활동하면서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이후 그녀는 ‘조선여자고학생상조회’의 집행위원장이 되고 조선여성동우회
결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이름이 알려졌다. 그녀는 북풍회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종로구 재동에 있던 북풍회관에서 김약수, 송봉우, 신철 등과
공동생활을 하였다.

그녀는 신철과 애인관계 였는데 신철은 그녀보다 5살 아래였다. 정종명과 신철의
사랑은 당시 저널리즘에 자주 고십거리를 제공하곤 했는데 1920~ 30년대는 젊은
지식인들 사이에 이른바 ‘자유연애’가 풍미했던 시기였다. 박헌영의 처였던
주세죽은 김단야와, 임원근의 처였던 허정숙은 송봉우, 최창익 등과 다시
결혼하기도 하였던 것은 좋은 예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신철이 소련으로 돌아가면서 둘 사이의 관계는 소원해졌고 그녀는 ‘정우회’에서
만난 천두상과 다시 결혼하였다. 그러나 1928년 재입국한 신철이 검거되자 그들은
공판정에서 재회하게 되었고 신철이 병보석으로 출감한 후 병상 곁에서 극진히
간호하는 등 그들의 동지적 관계는 한동안 계속 이어졌다.

정종명은 1927년 신간회 여성자매단체인 근우회 중앙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기도
하였으며 1929년 발족된 조공재건위원회에 참여하기도 하였으나 결국
체포되었으며 4년 남짓 복역하였다. 이 사건으로 체포된 사람 중 5명은 고문으로
사망하였고 그녀 역시 살인적인 고문으로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고 한다. 서대문
형무소를 출감한 그녀는 이후 모든 기록과 신문 등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다만
해방 후 서울에서 결성된 ‘조선부녀총동맹’(좌익단체)에서  함남 대표 자격으로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는데 이후로도 계속 북한에 머무른 것으로 추측된다.

그녀는 정이 많은 여자였지만 누구를 비판할때는 “ 번개같이 집어 세우는데 그
기세가 맹렬하야 어지간한 남성들은 물러선다” 고 했다.
1930년 3월에 발간된 <별곤곤> 이란 잡지에서는 그녀를 “ 능란한 구변과 풍부한
유머, 감상적인 인정미를 가져 약간 얽은 얼굴에도 호감을 갖게 하는
여성운동가” 라고 평했다.

‘약간 얽은 얼굴’임에도 많은 남성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았던 것은 아래와
같이 말할 수 있는 그녀의 매력 때문이리라.

“여자는 한번 결혼하면 그림자도 찾을 수 없다. 우리는 여성운동을 남자에게
의뢰하지 말고 가장 대담하고 용맹있게 싸워나아갈 아름다운 희생자의 출현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이 뒤에 내가 어찌 될지는 모른다. 그러나 이 한가지
사실만은 정확하다. 평안하게 와석종신은 못하리라고. 아니하리라고”


<위의사진: 정종명 (발굴한국현대사인물, 한겨레 신문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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