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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의 인사정책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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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4-06-07 조회수 : 13,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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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에서 발간하는
[동방학지] 120호(2003년 6월)에 게재한 논문입니다.

아래는 '맺음말'을 옮긴 것입니다.

보통문관시험은 원칙적으로 합격하면 판임관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주는 시험이었다. 그러나 각 관청의 수요에 따라 시험이 행해졌기 때문에 '합격=임용'이라는 오해를 응시자들에게 주기도 하였다. 각 都道府縣에서 돌아가면서 시행된 일본과 달리 1919∼43년까지 매해 시행된 조선의 보통문관시험은, '필요한 관리의 충원과 우수한 인재의 발탁' 외에도 구조적인 모순을 개인의 자질 탓으로 돌리는 기능을 수행했다. 식민통치의 질곡 속에 살던 조선인뿐 아니라 일본 내에서 밀려나 식민지에서 조차 주변인으로 떠돈 일부의 일본인은 경제력에 기반한 학력주의의 피해자였다. 조선총독부는 그들에게 극소수의 사례를 통해 누구든지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었다.
일제 강점기간 동안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에는 일상적인 차별이 존재했다. 시험을 통해 선택받은 소수의 조선인은 각자의 노력에 의해 차별을 극복하고 '충성'에 대한 댓가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보통문관시험 합격자들은 능력과 조건이 비슷하였고, 수험과정과 시험을 통해 조선총독부가 요구하는 관리로서의 의식과 자세를 갖추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인 합격자들은 '공정한 경쟁'을 기대할 수 있었으며, 특히 '문화정치'를 표방한 사이토 총독은 관리 임용과 승진에서의 차별을 시정하겠다고 공언했다. 실제로 몇 가지의 상징적인 조치가 이루어졌고, 1920년대에 조선인 보통문관시험 합격자들은 일본인보다 더 높은 임용율을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차별이 존재하지 않음을 조선 내외에 선전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비교적 관리 수급상황이 원할했던 1920년대와 달리 대공황 이후 만성적인 실업난에 시달리던 1930년대에는 일본인 합격자를 우선적으로 임용했다. 또 초임 발령할 때 관리로서의 미래를 전망할 수 있는 요직에는 일본인들을 우선적으로 발령했다. 60% 이상의 조선인 합격자들이 판임관으로서의 첫 출발을 일선 군청에서 시작하였음에 반하여 일본인은 전체의 30%만 군청에 배치되었다. 그리고 일본인 합격자의 30% 이상이 조선총독부 등 핵심 관청에 배치되었고 조선인으로서 조선총독부에 배치된 사람은 불과 5명뿐이었다.
초임 발령에서 예측할 수 있었던 것처럼 고등관 승진에서의 차별은 더욱 뚜렷했다. 일본인 합격자의 고등관 승진율은 조선인보다 2배나 높았다. 또 고등관으로 승진하더라도 조선인은 군수나 도이사관, 면장 등 극히 제한된 영역에 한정되었으나 일본인은 경시, 이사관, 사무관, 사세관, 부참사 등 그 직역이 다양할 뿐 아니라 조선총독부를 비롯한 각 요직에 배치되었다. 곧 조선인의 고등관 승진은 하나의 장식으로서 존재할 뿐 정책을 실질적으로 운용할 지위에는 배치되지 않았다.

* 관리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8-05-26 1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