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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4.30. 인천 개항장 답사 후기 (박소연, 신성고역사동아리 등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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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17-10-19 조회수 : 5,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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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문연 역사기행 : 근대의 교차로, 제물포에서 인천으로

 

2016년 4월 30일, 

4월 30일에는 인천 개항장 일대, 차이나타운, 자유공원, 답동성당, 구 인천부윤 관사를 지나 

애관극장을 거쳐 배다리에 이르는... 

그러니까 '개항'에서 오늘날까지를 한방에 돌아보는(!) 긴 여정으로 답사를 다녀왔습니다. 

40여명의 참가자가 함께했습니다.

아래 후기를 소개합니다.

 

 

제물포 속 인천찾기


박소연

 

    인천은 자주 못갔다. 멀기도 하고 배가 아파서다. 부산의 입지를 좁게 만드는 것 같아서이다. 같은 개항장인 부산은 그렇게 근대유산이 많이 안 남아 있다. 부산근대역사관 외에는 잘 모르겠다. 먼저 발달했기 때문에 싹 쓸어 담아버렸다. 인천 개항장은 볼 것이 참 많은 곳으로 관광사업으로 특화하려고 하고 있다. 인천 개항장답사에 사람이 과연 많이 올까? 답사 주제가 특이한 것도 아니고 인천시에서도 도보관광 답사 프로그램을 많이 운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역사문제연구소(이하 역문연) 답사에 많이 안 올것 같았다. 그런데 무려 40명이나 참가했다.  네살. 초등학생. 고등학생들이 온것은 솔직히 좀 당황스러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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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부윤의 사택. 염교수님의 사전 답사 사진 한장을 보고 역문연 답사를 가기로 결정했다.  인천 혹은 답동 모두 가본것도 아니고 안가본것도 아닌데 꼭 이타이밍에 답사를 가야할까 하고 망설이고 있었다. 그런데 인천부윤사택 사진을 보니 역문연 답사아니면 가보기 어려운 곳이라고 동했기 때문이다.


    주택을 몇번 고치고 개조한것은 분명하지만 일본식 가옥의 낮은 2층 목가옥의 모습이 남아있었고 멋진 향나무가 한그루 보였다. 개인적으로 향나무는 좀 특별해 보이는 나무다. 아마 7~80년이 되었을 법한 집. 서울에서도 돈의문 부암동등지에서 보긴했지만 그래도 신기했다.

 

 

백년짜장. 
    답사 첫 코스는 들뜨게 하는 차이나 타운이다. 인천 차이나타운 오랜만에 와서 정말 많이 변했다.  흐리긴 했지만 비도 안오고 날씨도 도와주었다.  짜장면 박물관인 구 공화춘(共和春)에서 코스가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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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바글바글 했다.  100년의 역사를 전해주는 짜장면 박물관은 인기가 많다.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바글바글 했다. 공화춘이 최초의 짜장면집인지와 연도는 분명하지 않지만, 산둥반도 사람들이 모였던 산둥회관으로서의 가치도 있는 곳이었다. 현재 화교의 몸 속에 중국인의 피는 6.25%라는 강사의 설명 재밌었다. 6.25세대 한국에서도 자국에서도 이방인. 그들을 연구하는 사람도 있겠지.....

 

    그리고 점심도 짜장이었다. 백년짜장. 짜장은 건강해질지도 모르는 맛이었고 예전 짜장면이라길래 열심히 먹었다. 또한, 탕수육이 너무 맛있었다. 탕수육이 없었으면 섭할뻔 했던 점심이었다. 차이나타운과 딱 맞는 점심! 공화춘- 우리가 먹는 한국식 자장면은 인천에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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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 조계지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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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이나 타운에는 중국식만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중구청 앞에는 일본식도 있었다. 조계지 계단은 왼쪽은 중국식 오른쪽은 일본식이었다. 여기가 개항장이자 조계지 인것이 아득하게 실감나는 공간이었다. 좀 제대로 만들지.... 돌은 너무 조악했다. 예전 차이나 타운 이라는 증거는 가짜 건물이 아니라 대만 화교 중산중학교(1934년) 에서 찾을 수 있었다. 청국영사관터에 생긴 학교다. 대만 국기도 꽂혀 있다. 현재도 차이나타운에는 중국 본토 사람보다는 대만 출신 사람이 많은 듯하다.

 

자유공원

   ​ 청일 조계지 경계계단을 올라가 자유공원으로 향했다. 자유공원은 개항기 각국공원(1888-The Public Garden)이다. 한국 최초의 공원이다. 인천에는 여러 가지 최초의 기록이 많은데 자의적이기 보다는 타의적이라 관심이 덜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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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공원은 예전 신사가 있던 곳이자 각국조계지가 있던 얕으막한 산이다. 서울 남산. 부산 용두산 공원과 같은 구조다. 신사는 신성한 공간이므로 높은 곳에 위치한다는 것을 실감한 곳이다. 부산의 조계지는 초량왜관. 즉 지금의 용두산공원이다. 남산에서는 한강이 용두산공원에서는 부산 앞바다가 시원하게 보인다. 모두 일본이 차지한 곳들이다. 그들이 남겨준 선물 씁쓸하다.

 

    자유공원 맥아더 장군 동상. 너무 멋지다! 맥아더 장군 동상자리는 세창양행 사택이 있던 곳이다. 세창양행은 무역상사인데 나로서는 바늘과 실로 기억한다. 박물관에서 세창양행 바늘 세트를 본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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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공원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자유 공산주의로부터의 자유였다. 맥아더는 미국숭배주의자들이 좋아하는 인물인데 과잉진압이라는 설을 들은 적이 있다. 우파들이 이용하기 딱 좋은 인물이다.

 

제물포 구락부 
    각국조계석을 지나쳐서 들어간 제물포구락부(1901년)에서 가장 편안한 휴식을 취한 것 같다. 안락한 응접실 의자가 있어서이다. 구락부는 영어로 클럽(Club)이고 일본식으로 표현한것이다. 구락부 용어는 알고 있었는데 어떤 공간인지 잘 피부에 와닿지 않았는데 이번에 보고 확실하게 감을 잡았다. 구락부 내부에 사교실, 도서실, 당구대, 테니스코트 백년전 제물포의 모습은 이렇게 화려했을까? 의문의 1패를 당하는 느낌이다.  상하이의 것등을 참고로 하여 재현한 것이라고는 한다. 제물포 구락부가 정말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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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교의 공간이 부족했던 당시 회원제 사교공간이다. 제물푸 구락부는 외국인을 위해서 주로 쓰이다가 전쟁기에는 북한군이 점령하기도 한 우리나라속의 외국공간이었다. 제물포구락부는 당시 상황을 재현해서 꾸며져 있었고 사진이나 영상물로 전시를 하는 곳이었다.  제물포 구락부에서 인천문화관광해설사 사무실이 보였다. 반갑다. 무료이고 재미있는 공간이어서 못 가본 분들에게 적극 추천하고 싶다. 그리고 점심시간은 꼭 피해서 가자. 그 인근에 인천시 사료관도 세트로 보아야 할 곳이다.

 


​인천 중구청
    중구청은 일본영사관으로 쓰인 건물인데 골격이 잘 남아 있었다. 조계지(組界地)는 일본지계, 청국지계, 각국지계로 나뉜다. ​일본 지계는 3개 지계 중 가장 좋은 위치를 점하고 있는데 항구로 볼 때 가장 중심에 있다. 중구청앞에서 보니 여기가 제일 좋은 위치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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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중구청에서 마신 시원한 커피가 압권이었다. 과거 개항의 역사성 있는 건물을 뒤에 받치고 앞에 부두를 바라보면서 쉬어가는 휴식이 달콤했다. 앉을곳만 보면 잽싸게 앉아야 하는 나이여서 더 반가웠는지 모른다. 현재의 중구청에서 시원하게 일본 영사관을 찾는 시간이었다.

 

 

대한통운 창고 
    대불호텔 부지를 지나쳐 왔다. 최초의 호텔이라고 알려져 있는 곳이다. 발굴을 완료하고 가려져 있었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한 질문을 했는데 강사 중 한명이 사유지로 빌딩이 지어질 것이라고 했다. 검색해보니 중구청이 사서 모종의 계획중에 있는 것이었다. 이럴때 아쉽다. 현지인인 문화관광해설사에게 해설을 요청하셔도 될것을.. 너무 내부에서 해결하려고 한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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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항장 창고를 보고 제일 이곳이 항구라는 것이 실감났다. 지금은 인천아트 플래폼으로 문화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희미한 대한통운 글자가 숨은 그림인것 같다. 일제강점기 컨테이너 창고가 현재도 연결되어 있다니 대단하다. 홋카이도 갔을때도 이런 개항장 창고가 멋있게 잘 남아서 활용되고 있었고, 부산에서도 영도에 이런곳이 있고 본적이 있는데 인천처럼 잘 남아 있지는 않다. 개항장 창고를 지나 미두취인소에서 설명들었다. 현재 은행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인천은 일제강점기 일본에 쌀을 수탈당했던 곳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애관극장

    인천 최고(最古)의 답동성당(1886년)을 거쳐 마지막 답사 장소는 애관극장이었다. 애관극장은 최초의 극장 인천 협률사(1898~1900)의 후신이다.  노란페인트로 칠해져 있어서 실감은 안 났지만 정말 말 안했으면 숨은 그림이었을 극장이었다. 한 마디로 너무 반가웠다. 이것도 인천시가 확보해서 활용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욕심이 난다. 인천부윤 관사와 함께 말이다. 애관극장은 인천 중구에 만들어졌던 복합공간이다. 영화도 보고 공연도 보고 멀티플렉스다. 대만에도 일본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이런 공간이 남아 있다. 시먼홍러우(西門紅樓)인데 공연도 하고 영화도 하던 곳이다. 현재 거기는 쇼핑공간으로 되어 있고 건물이 특이하게 생겨서 지나가다가 눈에 띈다. 아마 애관극장도 빨간 벽돌로 만들어졌을 것인지 아닌가 싶다.
    흑백사진만 남아 있어서 정확한 확인이 힘들다.
 

 

     역사문제연구소의 인천답사를 해보니 개항장 인천은 중구의 관심속에 관광에 대한 기대를 많이 품고 있는 곳이었다. 잘 단장해놓고 건물도 매입해 놓고 깨끗하게 잘 정리되어 있고 노력이 돋보였다. 그래서 화장해서 못알아 보겠는 옛 친구같다.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건물이 전시관으로 많이 바뀌었는데 물론 반갑지만 좀 낯설다. 뭐든 인천이 최초 인천이 제일 앞선다고 하는데 고증이 필요한 부분이 분명히 있다. 안남아있다고 역사가 없는것은 아니니깐 말이다.부산과 인천의 비교연구 필요하다.  청일 조계지 경계계단등을 보니 더 많은 고민으로 좀 천천히 갔으면 좋겠다. 그래도 부산의 근대유산 관리보다는 훨씬 낫다. 의문의 1패를 당한 기분이다. 

 

     개항 130주년 기념 개항장 답사는 한줄로 운영한 사람들의 정성이 보이는 답사였다. 하루 답사 치고 과도하게 두꺼운 답사 자료집 보고 빙그레 웃었다. 공부한거 다 보여주고 싶어하는구나... 공부하는 사람들답다 싶었다. 강사가 여러명이니 산만했다. 전달을 어떻게 할까에 좀 더 치중했으면 어땠을까 아쉽기도 했다.  

 

    답사 혹은 여행은 누구와 가는 것인가도 정말 중요하다. 답사 말미에 지쳐 떨어진 학생들과 어린이들은 끌려온것은 아닌지 무엇을 느꼈을지 궁금했다. 어쨌든, 역사에 관심있는 사람들과 함께한 답사 기분좋은 피곤함이었다. 뿌듯하달까. 다른 연구회도 답사 가는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역사문제연구소처럼 대중에 개방적이지는 않다고 본다. 준비하느라 고생 많은 연구원분들 진심으로 감사하다. 역사문제연구소의 기획이 돋보이는 근현대 도시 답사 많이 만들어줬으면 좋겠고 기회가 되면 또 참여하고 싶다.


글 : 박 소 연 
역사문제연구소와 가까운 학교,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졸업생이다. 온라인에서는 페북, 오프라인에서는 고양,파주를 근거지로 활동하고 있다. 문화원 연구원으로 해설사로 활동 중이다. 역사대중화라고 하기엔 부끄럽다. 전문가도 아닌 관심 많은 일반인도 아닌 어중간함 속에 고민하는 중이다.



출처: http://kistoryblog.tistory.com/216 [역사문제연구소 블로그] 

 

 

'근대의 교차로, 제물포에서 인천으로' 소감문
 

김성준 (신성고역사동아리 등불)

 

    아침 8시 안양역에 도착해서 선생님과 그리고 우리 동아리친구들이 모여 인천으로 출발했다. 이전까지 인천에 가본적은 없었지만 사회, 역사책에서 자주 언급되던 도시여서 내멋대로 인천을 상상하며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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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시간 동안 지하철을 타고 10시 쯤에 인천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보인 것은 한국철도 탄생역이라고 쓰여있는 열차모양의 특이한 기념탑 이였다 나는 저런 기념탑이 인천역 바로 입구 앞에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인천역 앞에서 답사를 같이 하시는 분들이 오시고 답사를 시작할 때 답사를 진행하는 선생님이 저 기념탑이 거짓이고 사실 인천역까지 철도가 안왔다고 하셨다. 그때 나는 어떻게 저렇게 당당하게 기념물까지 세우면서 한국철도의 탄생역이라고 할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하며 뒤통수 맞은 기분으로 건너편 차이나타운의 패루를 향해 횡단보도를 건넜다.


    그 다음으로 간 곳은 차이나타운의 자장면 박물관이다. 구 공화춘이 있었던 곳이고 자장면의 탄생지라 한다. 공화춘이란 이름은 중화민국을 세운 것을 축하하는 의미라 한다. 그리고 자장면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는데 중국의 된장을 기름에 볶아 국수 위에 얹어 먹는 음식인 작장면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물을 풀게 된 것이 그 기원이라 한다. 그리고 차이나타운 한가운데에 있는 공화춘은 가짜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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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장면 박물관 다음으로 우리는 인천화교중산중학교에 갔다. 인천화교중산중학교로 가는 중간에 나는 이상한 것을 하나 발견했다. 인천화교중산중학교안에 대만국기가 펄럭이는 것이였다. 처음에든 의문은 “차이나타운이 중화인민공화국이 아니라 중화민국이 세운건가?”였다. 중학교의 국기 뿐 만 아니라 경찰서도 대만국기의 상징이 있었기 때문이다. 답사선생님께 물어보니 우리나라가 중국과 수교하면서 차이나타운의 여러 가지가 중국에게 넘어갔는데 그렇지 않은곳중에 하나라고 설명해주셨다. 그리고 화교들에 대한 우리의 차별도 이야기 해주셨다. 몇 년마다 체류허가를 받아야하고 재산축적과 직업선택의 자유도 제한받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무리 조상이 중국인이라도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들에게 조금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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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화교중산중학교를 지나 조금만 더걸으니 청일조계지경계계단이 보였다. 정말 인상적인 모습이었다. 정확히 계단을 기준으로 좌우의 석등 가로등 조각이 달랐고. 뒤를 돌아 건물을 보니 왼쪽은 조금 가파른 느낌의 오른쪽은 아까 지났던 길을 따라 왼쪽과는 다른 느낌의 건물들이 있었다. 나는 곧바로 왼쪽이 일본식이구나 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왼쪽이 일본식이구나 라고 생각하고 답사선생님의 설명을 들었을 때 나는 다시 한 번 뒤통수를 맞은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저것도 지어낸 가짜라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조금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여러 조계지로 나누어져 여러 문화가 도시 하나에 축소된 인천을 기대했지만 그것이 가짜라는 사실에 힘이 빠졌다. 옛날에는 물론 진짜였겠지만 그래도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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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도 답사선생님이 저것은 진짜 일본건물이라 알려주신 입구에 나가사키 카스테라라고 적혀있던 건물이 나의 아쉬운 마음을 달래주었다. 

 

    그다음으로 우리는 기대하던 점심을 먹을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함께 답사를 하시는 분들의 자기소개를 들을수있었다. 베트남을 연구하시는분, 중학교 역사선생님, 극장을 연구하시는 분, 저 멀리 독일에서 오신분,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온 부부 등 여러 사람이 있었다. 물론 우리 신성고 역사동아리 등불도 한 명 한 명 자기소개를 했다. 그리고 드디어 100년 전 맛의 자장면이 나오고 맛을 봤을대 조금 미묘했다. 뭔가 맛이 밍밍했고 우리가 흔히 아는 춘장의 맛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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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년 전 자장의 맛이 이렇구나 하고 몸소 체험한 다음 청일조계지경계계단을 오르고 삼국지관련 글과 그림이 있는 도로와 벚꽃이 떨어진 길을 올라가 자유공원에 도착했다.

 

    자유공원은 한국최초의 공원으로 처음 명칭은 각국 공원이었다고 한다. 자유공원은 태어난 이후로 여러 번 이름이 그 용도에 따라 바뀌었던 것 같다. 특히 일본 때는 만국공원을 천황을 숭배하는 곳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날의 자유공원은 매우 바람이 세게 불었다. 바다가 눈앞에 펼쳐지고 월미도의 모습도 보였다. 거기에다가 시원한 바람까지 불어 매우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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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명을 모두 듣고 우리는 맥아더 장군동상으로 이동했다. 맥아더 장군상은 우리나라가 인천상륙작전을 기념하기 위해 지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맥아더 장군동상 의 이전 혹은 철거 문제로 대립하고 있다고 한다. 내가 맥아더 동상에서 인상 깊게 보았던 것은 다름 아닌 어떤 할아버지었다. 그 할아버지는 맥아더 동상 앞에 서서 맥아더장군에게 찬사를 보내시고 있으셨다. 그때 그 할아버지가 하셨던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장군님 이렇게 장군님을 다시 뵙게 되어서 감개무량합니다. 저는 장군님이 안계셨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금의 대한민국을 안겨주신 장군님께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 

 

    아무래도 맥아더 장군은 일부 할아버지들에게 영웅이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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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다음은 제물포 구락부 이나 마침 우리가 갔을 때 점심시간인 모양이라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먼저 들렀다. 그곳은 옛날에 일본인 상인이 지은 건물로 해방 이후에는 미군의 파티장이 된 모양이다. 이곳에서 시간을 보낸 다음 우리는 다시 제물포 구락부로 향했다. 구락부는 사교클럽으로 인천에 있던 많은 외국인들이 와서 놀던 곳이라고 한다. 합병이후에는 일본 군인회라는 곳이 쓰고 그 이후에는 일본 부인회가 구락부에서 모임을 가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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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락부의 내부는 술집, 바 같았다. 고급스런 나무들로 이루어진 가구들과 여러 명이 앉을 수 있도록 길게 늘어진 의자들 그리고 나무바닥이 마치 내가 그시대 사람처럼 느끼게 하였고 그 착각은 벽에 걸린 tv와 전시된 종이 모형들로인해 깨지게 된다. 

    우리는 그다음 중구청으로 향했다. 중구청에 도착한 우리들은 중구청 맞은편에 일자로 쭉 나있는 정돈된 도로를 볼수있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캔음료를 마시고 조금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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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다음 우리는 인천 최대 번화가였던 혼마치 일대에 갔다. 그곳에는 18은행과 58은행이 있었다고 한다. 답사 선생님이 18은행에 들어가면 나가사키 58은행에 들어가면 오사카인 이라 할 만큼 18은행과 58은행이 지역적 구분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근처에있는 개항박물관에도 들렀는데 그곳에서는 기차, 우표, 타자기, 우편함, 기차표, 지도, 동전, 등 여러 가지를 볼 수 있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서양인이 안경을 쓰로 조선식 관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었다. 아마 이름이 묄렌도르프 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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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은 국민은행으로 갔다. 그곳이 옛날에 미두취인소가 있던 자리라고 한다. 미두취인소는 지금으로 치면 증권거래소라고 한다.


 

    그리고 그다음엔 인천중동우체국으로 향했다. 가는 중에 답사 선생님의 경양식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도착했을 때 건너편에 인천중동우체국이 있었고 옛날에도 저곳에 우체국이 있었다고 한다. 

 

    다음은 답동성당으로 향했다. 답동성당에 도착하고 가장 먼저 설명 들었던 것은 답동성당의 종에 관한 이야기였다. 일본이 전쟁에 쓸 쇠를 구하려고 교회의 종을 공출해 가려고 했다는데 그것을 어떤 신부님이 종을 떼어내 다른 성당에 붙이는 것으로 지켰다는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를 들은 다음 우리는 조금 휴식을 취했다. 답동성당까지 가는데 너무 오래 걸리고 멀었기 때문일 거라 생각했다. 답동성당까지 멀긴 했지만 중간 중간 역사에 박식한 남자분이 여러 가지 알려주셔서 심심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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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다음 우리는 인천 부윤관사에 갔다. 부윤은 지금으로 치면 인천 시장이라고 한다. 지금은 개인이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저기에서 사는 사람도 나름대로 힘들겠다고 잠시 생각했다. 

    부윤관사 다음으로 우리는 애관극장에 갔다. 애관극장은 조선인 최초의 극장이라고 한다. 극장도 극장이지만 사업이나 예방접종, 여러 가지 모임들이 여기서 이뤄졌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 중에 극장을 연구하시는 분이 계셔서 그 분의 셜명도 들을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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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마지막으로 배다리마을에 갔다. 배다리라는 이름은 만조 때 바다가 불어나면 일시적으로 배를 엮어 건넜다. 그래서 배다리 마을 이라고 한다. 배다리 일대는 일본인과 청나라인 그리고 기타 외국인들에게 밀려난 조선인들의 주거지라고 한다. 그리고 개항장의 변두리이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가장 발달한 마을이었다고 한다. 최초의 공·사립 초등교육기관이 여기에 세워졌으며 노동력도 풍부하여 양조업이나 공장이 들어섰다고 한다. 

 

    우리는 배다리 마을에 있는 고양이 마크가 그려진 스페이스빔이라는 곳에 갔다. 그곳에 가니 어떤 밴드 같은 사람들이 먼저 있었다. 하지만 곧 그곳의 대표님이 직접 나와 주셔서 직접 설명을 해주셨다. 현재의 배다리는 신도시의 건설로 이미 구도심이 되었고, 현재는 신도시를 잇고 배다리를 두 토막 내는 도로건설문제로 도로건설 무효화를 위해 투쟁하고 있다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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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표님의 설명을 다 듣고 이것으로 답사가 끝이 났다. 답사 뒤풀이를 막걸리 집으로 간다고 했으나 우리 동아리 학생들은 아직 청소년이라 함께 갈 수 없었다. 그렇게 답사팀과 헤어지고 우리는 다시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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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이번 답사에서 인천을 걸으며 140년 전 인천을 함께 걸은 것 같았다. 답사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며 현재의 모습이 어떻게 구성이 되어 왔는지 과거의 모습이 현재 어떻게 드러나 있는지를 배웠다. 그리고 인천이 100년 전의 생활과 현재의 생활의 조화와 인천속의 일본인과 중국인 그리고 여러 나라의 생활의 어우러짐이 드러내지 않는 은은한 흔적들로 표현된 멋진 공간임을 느꼈다.



출처: http://kistoryblog.tistory.com/entry/근대의-교차로-제물포에서-인천으로-소감문-김성준 [역사문제연구소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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