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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주년 심포지엄 <'국정 교과서' 문제 이후, 기억과 역사 서술을 생각한다> 장면들, 후기 (최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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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17-10-20 조회수 : 3,7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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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제연구소 30주년 심포지엄 
<'국정 교과서' 문제 이후, 기억과 역사 서술을 생각한다>

 

2016.10.14, 관지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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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 교과서이후의 역사학 그리고 역사서술을 이야기하다

- 역사문제연구소 창립 30주년 기념 심포지움 참관기

 

최보민 (만인만색 연구자 네트워크)

 

 

 

201511월 박근혜정권은 본격적으로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추진했다. 2003년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가 검인정으로 전환된 이후 10여년이 넘는 시간동안 검인정 체제는 역사교과서 발행체제로서 자리매김했다. 물론 그 사이에 여러 가지 논란이 있었고, 자유발행제로 나아가야 한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역사교과서 서술과 선택의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검인정 체제는 최소한의 장치였다. 그런데 박근혜정권은 검인정 체제를 국가가 직접 발행하는 국정발행체제로 바꾸려고 한 것이다. 박근혜정권의 이러한 조치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유신으로 회귀하는 것 같은 퇴행으로, 어떤 사람들에게는 국가가 학문의 자유를 파괴하려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방점을 찍은 부분은 달랐지만 사회 각계에서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저지해야 한다는 의견이 쏟아졌고,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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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은 한국사학계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사학계 역시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에 한 목소리를 냈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전임교수부터 대학원생에 이르기까지 한국사학계에 몸을 담고 있던 사람들 거의 대다수가 역사교과서 반대에 한 목소리를 낸 것이다. 그리고 거리에서의 외침과 함께 한편에서는 역사교과서 국정화가 무엇이고, 이것이 한국사학계와 역사교육에 미칠 영향이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요구되었다. 2016년 역사문제연구소 30주년 기념 심포지엄은 이런 요구에 대한 응답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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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제연구소의 30주년 기념 심포지엄은 20161014일 역사문제연구소에서 개최되었다. 심포지엄은 김성보 소장의 개회사를 시작으로 1부와 2부로 그리고 3부 청중토론으로 나누어져 진행됐다. 1부에서는 세 개의 글이 발표됐다. 첫 번째로 발표한 이기훈은 현행 한국사 교과서의 구성과 서술체계의 보수성은 민족의 이야기라는 거대서사를 창출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았다. 이기훈은 이런 활용의 사례로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이 거북선과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제시했다. 그는 조선민족의 과학성과 문화적 우수성을 드러내기 위해 거북선이 세계최초의 철갑선 혹은 잠수함으로 규정되고, 김정호가 국가권력에 의해 부당하게 탄압받는 영웅으로 재현되는 것에 주목했다. 이때 소위 지식인들은 민족의 서사를 위해 역사의 왜곡을 침묵한다. 이기훈의 발표는 1920년대 역사담론의 형성을 보여줌으로써 현재 교과서에 내재한 보수성이 특정 정권의 문제가 아니라 민족사의 구성이라는 역사적 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것임을 잘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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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발표자 박명림은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불러온 것은 다른 무엇보다 한국 한국사학계가 가지고 있었던 문제들에 의한 것으로 보았다. 박명림은 한국의 역사학이 일국적 국사학에 머무르며, 실증, 민족, 이념이라는 굴레에 스스로 갇혀 다른 인접학문, 세계의 학술장과 소통하지 않다면 역사교과서 국정화 사태를 근본적으로 넘어설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박명림은 현재 한국사학계가 가진 문제는 보수적인 한국사학계뿐만 아니라 소위 진보적 한국사학계도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고 지적하며, 한국사학계 전반의 각성과 변화를 이야기 했다. 박명림은 현재 한국 한국사학계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문제를 지적했다. 그가 제기한 문제들은 모두 동의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현재 한국 한국사학계가 경청해야 할 만한 뼈아픈 지적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였다.

 

1부의 마지막 발표자 이봉규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역사교과서 국정화의 직접적인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박정희정권기 역사 교과서 국정화 논의를 분석했다. 이봉규는 박정희정권기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이끌었던 민족주체성에 대한 논의가 역사교육학계와 실제 교육현장에서 어떻게 다루어졌는지를 분석했다. 이봉규의 발표에 따르면 박정희정권기 일부 역사교육학계는 이전 사회과교육이 민족/국가 단위의 가치를 외면했다고 비판하며, 가치교육의 필요성이라는 측면에서 민족주체성 논의를 받아들였다. 민족주체성을 받아들인 역사교육학자들은 국민교육헌장 작성에 참여하거나 국정교과서 편찬에 참여했다. 이런 역사교육학계의 분위기는 당시 학계가 제시한 국사교육 방법과 연구전범을 활용해야했던 일선 국사교육 현장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봉규의 글은 박정희정권기 역사교과서 국정화의 강력한 논리였던 민족주체성이 실제 역사 교육현장에서 어떻게 자리매김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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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의 발표들이 역사교과서 국정화의 기원과 그것이 제기하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했다면, 2부의 발표들은 역사교과서 국정화이후를 생각하게 만드는 글이었다. 2부 첫 번째 발표자인 전영욱은 올바른 역사교과서라는 명명에 대한 학계의 반발에 주목하며, 한국 한국사학계가 가지고 있는 올바른 역사인식이라는 감수성이 어떻게 나타나는가에 주목했다. 전영욱에 따르면 80-90년대 나타난 젊은 역사학자들은 기존 학계가 역사를 국가나 국민, 민족 등으로 설명하는 것을 비판하며 등장했다. 그들은 역사발전의 주체는 민중이라는 명제아래 기존 학계와 다른 올바른 역사인식인 민중사학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했던 민중사학은 점차 국민을 시야에 넣고 민족을 대상으로 교육되어야 하는 것으로 변화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젊은 역사학자들이 올바른 역사인식을 확립하기 위해 전개했던 국정교과서 비판, 대중서 편찬, 제도권 내의 역사교육 강조 등은 학계와 사회의 관계를 국민과 헌법 속에서만 사고하는 것으로 변화됐다. 전영욱의 발표는 한국 한국사학계 특히 젊은 역사학자들로 대변되는 진보적 한국사학계가 가지고 있었던 올바른 역사인식이 어떻게 변화하고 어떤 방식으로 고정화되는가를 드러냈다는 점에서 많은 시사점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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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발표자로 나선 신주백은 기존에 일국중심의 역사서술에서 벗어나 동아시아라는 지역 차원에서 새로운 역사서술의 가능성을 제기했다. 신주백은 한국에서 동아시아라는 지역의 발견과 함께 동아시아사라는 새로운 역사담론이 등장하게 된 과정을 설명하고, 동아시아사 쓰기의 어려움을 인식하면서도, 동아시아사로 역사를 서술했을 때 만들어지는 가능성에 주목한다. 동아시아사 서술에서 만들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라는 것은 동아시아사를 통해 국민국가에 묶여있는 국민에서 다른 국가의 사람들과 소수자, 타자들의 다름을 인정할 수 있는 시민으로 변화할 수 있음을 지적했다. 신주백의 논의는 국민국가 틀에 갇혀있는 현재 역사서술과 교육의 틀을 동아시아라는 지역으로 확대함으로써, 새로운 방식의 역사서술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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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발표자인 이정선은 기존의 일본군위안부 운동과 역사서술에서 나타난 프레임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하는 글을 발표했다. 이정선에 따르면 지금까지 일본군위안부 운동과 역사서술은 많은 성과를 이뤘지만, 여전히 국가/민족이 중심이 되는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들은 무기력하고 순결·순진한 처녀로 고정시키는 문제를 만든다. 고정된 피해자 상은 피해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경험들 가운데 피해자답지 않은 부분들을 배제하며, 피해자 당사자의 주체성을 가리게 된다. 이런 방식의 운동과 역사서술을 넘기 위해서는 민족·계급·성 등의 권력관계를 위계화 하지 않고 복합적 중층적으로 역사를 해석하는 시각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정선의 글은 국가/민족에서 가려진 피해자의 주체성에 주목하고, 새로운 방식의 일본군위안부 쓰기를 모색한다는 점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물론 역사교과서 국정화 사태 이후의 역사서술을 고민하는데도 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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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의 마지막 발표자인 허영란은 민중/소수자의 저항적이고 진보적인 대항기억을 선별하고 복원하는 작업의 중요성을 지적하며, 중앙 중심으로 구성되어있는 현재의 역사서술과 교과서에 대한 비판을 전개했다. 허영란에 따르면 지금까지 한국에서는 서울의 역사는 국가의 역사로 취급되어 왔으며, 지방은 서울의 삭막함을 보완하고, 중앙의 수요에 부응해야 하는 배후지로 기능했다. 그러나 울산은 이런 일반적인 중앙과 지방의 관계와 다르게 국가의 기념비적 장소로서 자리매김했다. ‘산업수도’, ‘근대화의 메카라는 이름아래 울산의 과거는 한국이라는 국민국가의 발전을 기념하는 기억의 장소로서 사용된 것이다. 국가/중앙에 의해 전유된 기념비적 기억의 장소로서 울산의 기억을 극복하기 위해 허영란은 지방의 기억공동체의 대항기억을 역사화할 것을 주문한다. 국가와 중앙에 의해 기념의 장소로 소비되어 왔던 울산이라는 장소의 기억을 되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허영란의 주장은 국가/중앙으로 수렴되지 않는 장소의 기억들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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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발표들은 국정화문제를 생각하고 이후 역사연구와 역사교육이 어떻게 나가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다루었다. 각 발표가 주목한 지점은 달랐지만 여러 가지 부분에서 유의미한논의들이 많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국정 교과서문제라는 것에 대해 학술적인 측면으로만 접근한 것이 아닌가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사태는 단순히 교과서 발행체제 만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가 역사적 논의의 장을 장악하고 입맛에 맞는 학계만 취사선택하겠다는 뜻을 노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역사를 국가에 종속시키고 고정시켜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만들려고 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한국사학계는 어떤 식으로 대응하고 새로운 역사서술과 기억을 만들 것인가? 이것을 말할 때 언급되어야 할 중요한 문제는 국가와의 관계가 아닐까? 현재 한국사학계의 상황을 돌아보자. 현재 많은 연구자들이 정부에서 지원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고, 참여하기 위해 많은 공력을 쏟고 있다. 또한 많은 학술지들은 국가가 제시한 기준에 따라 등재지, 등재후보지로 나뉘어져있으며, 이 기준에서 탈락하지 않기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쏟고 있다. 이미 한국 한국사학계(물론 한국사학계만 그런 것은 아니지만)는 국가에 일정부분 종속되어 있고, 국가가 깔아 놓은 레일대로만 걸어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학계의 국정 교과서문제 비판과 이후의 대응이라는 것은 과연 어떤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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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국가가 중심이 된 프로젝트나 학술지 편제에 따라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다. 국가에서 지원하는 프로젝트가 아니면 대다수의 연구자들은 생계를 이어나가기 힘든 상황이며. 등재지 혹은 등재후보지가 되지 않는 이상 학술지의 생존을 담보할 수 없다. 이런 현실적인이유들로 인해 국가 중심의 프로젝트나 학술지 체계에 포함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글을 쓰는 필자 역시 국가 중심의 프로젝트나 학술지 체계에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당장 국가가 지원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하지 말아야 한다거나 학술지 체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현재 한국사학계에 국가의 영향력이 깊숙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자는 것이다. 현재 한국사학계의 위치성에 대해서 드러내고, 다시 점검할 필요가 있다. ‘국정 교과서 문제 이후를 생각한다는 것은 현재 한국사학계가 딛고 있는 물적 토대와 위치를 재점검하는 것도 함께 생각해야 할 것이다. 현재 한국사학계의 위치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국가권력과의 관계를 재검토하는 것이 국정 교과서를 넘어서는 첫 걸음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의문들은 이 심포지엄의 주제와 부합하지 않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한국사학계가 이런 문제를 도외시한다면, 한국사학계의 국정 교과서비판이라는 것은 숲이 아닌 나무를 지적하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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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아쉬움을 표명하긴 했지만 역사문제연구소의 이번 심포지움은 충분히 유의미한 문제와 논의들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라는 사건은 단순히 국정 교과서를 폐기시키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국정 교과서저지와 함께 한국사학계가 근본적으로 변화할 때 역사교과서 국정화라는 문제를 비로소 매듭지을 수 있을 것이다. ‘역사교과서 국정화사태를 매듭짓고 한국사학계의 변화를 만들어내는데 역사문제연구소가 좋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번 심포지움이 그런 역할을 하는데 시작점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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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역사문제연구소 회보>> 제60호에도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