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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9.26. [특강] 그들의 1960년대 ⎯ 대안적 앎의 공간으로서의 전공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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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17-11-15 조회수 : 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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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1960년대 ⎯ 대안적 앎의 공간으로서의 전공투 2

                                                                                                                                   

9월26일 역사문제연구소 후지이 다케시 전공투 강연후기

 

 심아정 (수유너머 104)

 

 

 

 

3. 가해자로서의 연구자, 자신이 편입되어 있는 권력관계를 부정하라!



     동경대의 경우, 엘리트로서의 자기자신에 대한 부정이 운동의 중요한 모티브가 되었다. 과거의 학생운동에도 자기부정은 존재했지만, 그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60년 안보투쟁때만 해도 학생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일본의 미래를 짊어져야 할 엘리트이기 때문에 싸워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다. 그런데 동경대 전공투 운동에서는 오히려 자신이 편입되어 있는 권력관계 자체를 직시하고 그것을 부정하려는 경향이 나타났고, 이런 점이 대학원생, 인턴, 조수 같은 사람들의 운동의 토대가 되었다. 그들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대학에 근거한 학문의 자유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우리는 무슨 권리로 특별한 위치에서 연구를 할 수 있는 것일까? 연구자 혹은 의사란 대체 무엇일까?

     특히 젊은 의사들의 경우, 산재를 당한 사람의 다친 몸을 고쳐서 그들을 다시 위험한 사업장으로 보내는 것 밖에 할 수 없다면, 의사가 하는 일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라는 식의 고민을 하게 되었다. 후지이 선생님은 극단적인 사례로 야전병원의 의사들을 언급했는데, '전쟁에서 부상당한 사람의 상처를 고쳐서 다시 죽음의 전쟁터로 보내는 모순 속에서 의사의 역할이란 도대체 무엇일까?'라는 물음이 던져져야 한다고 했다. 그야말로 권력의 재생산을 위해서, 이 억압적인 사회를 재생산하는 역할을 하고 있을 뿐 아닌가? 이런 점에선 연구자들도 마찬가지일 텐데, 특히 동경대 공대는 위탁 연구가 많았다고 한다. 그러한 연구의 결과물은 결국 기업을 위한 것 아닌가? 연구비 지원을 받으려는 연구자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기업이 원하는 연구를 하는 당시의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도 문제가 제기되었다. 지금-여기를 살아내는 연구자들 또한 여실히 절감하는 내용의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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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모토 요시타카의 젊었을 적 모습과 지금의 모습, 그리고 그가 쓴 책 『나의 1960년대』의 일본어판>
오사카자유대학에서 했던 그의 강의가 궁금하다면 동영상 링크를 클릭해 주세요.(2016/10/21)
https://www.youtube.com/watch?v=CBad2PPHu1o



 

     야마모토 요시타카도 이공계열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의식을 드러냈는데, 그의 책 『나의 1960년대』에서는 도시공학 대학원생들이 ‘연구자들에게 (공대)투쟁이란 무엇인가’라는 삐라를 만드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거기서 전개되는 주장은 ‘성직자’로서의 연구자에서 ‘가해자’로서의 연구자라는 의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연구자의 비판적 의식이 자신의 모든 생활 영역까지 걸친, 자기자신의 존립기반까지 문제삼고 있는 지에 대해 실랄하게 문제제기를 했던 것이다. 학문이라는 틀 속에서만 비판적일 뿐, 사실은 비판을 할 수 있는 자기의 자리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는 연구자들의 태도를 비판하면서, 이러한 이유에서 연구자는 가해자일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나온 것이 대학 해체다. 대학 해체는 단순히 대학을 부정하고 없애는 것이 아니라, 대학교육과는 ‘다른 앎’을 창안할 것을 고민하는 것을 말한다. 바리케이트 안에서 모색되었던 자주 강좌의 사례가 그러한 고민의 결과물 아닐까? 야마모토 요시타가도 대학 해체를 주장하지만, 그것이 연구자를 그만 두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연구자의 위치에 머물러 있으면서 자신들이 마주하고 있는 모순과 끊임없이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강연 시간에 나누어 준 자료에는 당시에 벽보로 붙어있던 자주강좌의 포스터 사진이 있었는데, 「김희로, 재일조선인과 일본」이라는 제목의 강좌가 눈길을 끌었다. 김희로는 일본의 한 온천 여관에서 총으로 그 주인을 인질로 삼아 농성을 해서 경찰에 맞섰던 사람이다. 민족차별적인 행동으로 자신을 모욕한 경찰에게 사과를 요구함으로써 재일조선인 문제를 본격적으로 일본에 알린 큰 사건이기도 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학 안에서 이런 사건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알려고 하는 태도는 없었다. 자주강좌는 바로 이렇게 일본 사회 내부에서 가장 배제되어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자 했다. 포스터 속에는 재즈에 대한 자주강좌도 있었는데, 실제로 당시 전공투 학생들이 재즈를 많이 들었다고 한다. 그들은 재즈를 단순한 미국의 소비문화로서가 아니라, 흑인들의 운동과 연계되는 것으로서 다루었다. 이런 사례들에 대한 설명을 듣고나니, 당시에 그들이 자주강좌에서 모색했던 대안적인 앎이 어떤 것이었는지 그 방향성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4. 소비자로서의 연구자, 지식생산의 현장에서 작동하는 권력에 제대로 문제제기하고 있는가?



     또 하나 흥미로웠던 에피소드는 동경대 투쟁 때 도서관 봉쇄를 둘러싼 일련의 사건들을 지식과 권력의 관계로 해석한 부분이었다. 동경대 도서관에는 귀중본이 많았고, 학부생에게 맡기기엔 좀 불안했던 지, 대학원생들의 모임이었던 전투련이 귀중본을 다루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 조수공투로 참여했던 사람이 나중에 어떤 자리에서 자아비판을 하게 된다. 동경대 도서관에 있는 모든 자료들은 사실 동경대나 연구자의 사유재산이 아니며, 모든 인민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 누구나 읽고 싶으면 가져가라고 말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이러한 자신들의 행동은 지식이 생산되는 현장에 대해서 제대로 문제 제기한 것이 될 수 없다는 비판이다. 사실 이런 문제는 지금 대학에서 연구를 하는 사람들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쉽게 자료를 볼 수 있다는 건 도대체 무얼 의미할까? 우리는 쉽게 볼 수 있는 자료에 대해서는 그것이 생성되고 전달되어 보존되는 구체적인 과정에 거의 관심을 갖지 않는다. 실제로 도서관을 이용하고 있어도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 지는 모를 뿐 아니라,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이렇게 연구자는 소비자가 된다. 심지어 국가권력의 정보수집능력에 의존하게 되는 경향까지 생긴다. 예를 들면 현대사 연구자들이 일제 시대 연구자들을 부러워하면서, 일본제국이 자료를 체계적으로 수집하여 남겼기 때문에 수월하게 연구를 할 수 있지만, 대한민국은 무능해서 제대로 된 자료가 없다는 불평을 늘어놓곤 하는데, 이것은 국가권력이 사람들을 확실하게 관리/통제하고 장악하는 것을 좋게 여기고 마는 착각이다. 독립운동 연구의 경우, 경찰이 사람들을 구속하면 할수록 많은 자료가 남는다. 그래서일까? 관련연구들은 관헌자료에 자꾸만 의지하게 된다.

     어떻게 보면 자료라는 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지 않을까? 도서관에 있는 귀중본도 예전엔 대부분 사적으로 유통되던 것들이었다. 그러나 연구자들은 이제 다른 방식으로는 찾아보려 하지 않게 되었다. 자료라는 것도 인간들의 행위를 떠나서, 인간관계를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마치 그것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역사를 연구한다는 것, 어떤 역사 자료를 접한다는 것은 그런 인간관계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번거로운 일을 건너뛸 수 있게 만들어 주는것이 도서관의 기능이 되었다. 우리는 더 이상 다른 루트를 통해서 자료를 찾으려고 하지도 않고, 자료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찾아가서 그 자료를 보여 달라고 설득하지도 않는다.

     동경대생이라는 특권 하나로 다른 데서는 쉽사리 볼 수 없는 자료를 간단히 접할 수 있다는 건 무얼 의미하는 것일까? 야마모토 요시타가는 전공투 운동 이후로 줄곧 과학사를 주로 연구했는데, 대학에 소속되지 않은 사람이 가진 자료 접근의 한계때문에 무척 애를 먹었다고 한다. 연구자들이 지식을 생산하는 장소는 어디이며, 도대체 어떤 장치 속에서 연구를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지식이 만들어지는 장소에서도 권력은 작동하고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거기에 들어갈 수 있고 어떤 사람은 배제된다.

     전공투가 제기한 문제들 중 중요한 것은 차별이나 억압의 형식이라는 것을 토대(계급구조)로 환원하지 않고, 구체적인 현장에서 그것과 대결하려는 자세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부분이 여타 신좌파 정치조직들과는 다른 점이다. 당시 신좌파는 차별과 억압 철폐를 위해 계급투쟁을 해야 되고, 계급투쟁을 위해서는 전위당이 필요하며, 따라서 자신들의 지도를 따라야 된다는 식이었다. 그러나 전공투는 지도부를 거부하고 모두가 자기 의지로 참여하여 토론을 통해 사안을 결정했기 때문에 구조로는 환원될 수 없었다.

     예를 들어 노동자계급이기 때문에 이렇게 행동하고, 부르주아이기 때문에 저렇게 행동하는 것이 아닌, 개개인의 주체성이라는 것을 문제 삼았고,  미시적인 부분에서 치열하게 싸웠다. 전공투가 만든 변화는 거시정치에서 미시정치로 옮겨가는 변화였다. 거시적인 권력, 국가권력하고만 싸우면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미시적인 차원에서 작동하고 있는 무수한 권력들과 싸우려는 태도를 그들은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대 전공투의 경우에도, 기본적으로는 일본대에 관한 문제를 다루는 조직이기 때문에 68년 10월21일에 열린 국제반전(反戰)대회에 조직적으로는 참여하지 않겠다는 결의문을 내고 거시정치에는 거리를 두려고 했다. 그러나 실제로 반전대회가 열린 날 바리케이트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모두가 개인 자격으로 반전 집회에 나간 것이다. 그날 일본대 전공투는 깃발을 가져가지 않았다.

     특히 미시적인 차원에서 정치를 문제삼을 때는 직접적인 역학관계에 있는 권력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헤게모니적으로 구현한 권위의 문제가 그들에겐 더욱 중요했다. 실제로 그들은 철저하게 권위에 대해 비판하고 그것을 해체시키고자 했다. 전공투를 계기로 그 전까지는 권위에 눌려서 나오지 못했던 다양한 목소리들이 나오면서 다양한 소수자 운동 또한 시작되었다. 이것은 일본뿐 아니라, 68운동의 전반적인 경향이다. 다양한 지역운동의 출발점이 되기도 했는데, 이 시기가 일본에서는 공해문제가 크게 사회문제가 되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지역주민들과 연대해서 싸우는 사람들도 많이 생겨났다. 그렇지만 결국 바리케이트는 해체되었고, 해방구는 폭력적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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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적군파에 의한 아사마 산장사건(1972년)을 다룬 와카마쓰 고지 감독의 영화 <실록연합적군(2007년)>의 한 장면과 포스터

 

     바리케이트가 철거되고 운동이 다시 정치적으로 전환되는 시기가 오고 말았다. 급기야 자기부정의 논리가 외부 정치에 의해서 규정되는 상황까지 벌어진다. 그 전까지는 전공투 내부에서 자기부정을 했는지의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권위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외부로부터의 정치나 권위가 그것의 여부를 규정하거나 혹은 자기부정이 모자라다고 지적할 수 있는 지도자가 조직 내에 등장하게 되자,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만다. 연합적군 사건이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무장투쟁운동을 위해 산장에 들어가 자기비판을 하는 과정 속에서 열 몇 명씩이나 되는 동료를 죽인 것은 자기부정의 가장 부정적인 측면이 드러난 사건이다. 자기부정을 했는가의 여부는 자기만이 판단할 수 있는 문제다. 판단자가 외부에 있을 때 최악의 상황이 생길 수 있다.

 

 

 

5. 우먼리브, 물음표 속에서 빼앗겼던 말들이, 주체가, 확실한 감촉과 더불어 되돌아온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전공투를 계승했을까? 후지이 선생님은 1970년에 시작된 우먼리브운동(women's liberation movement)에 주목했다. ‘리브’는 리버레이션의 앞글자다. 당시 미국에서 여성해방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일본에서도 1970년부터 우먼리브운동이 등장한다. 전공투의 바리케이트 안에서도 존재했던 자신들에 대한 억압과 차별, 그리고 성적 대상화에 대해서 여성들 스스로가 문제제기를 하면서 나타난 운동이다. 바리케이트 안에서조차 밥을 하고 설거지를 하는 건 대체로 여자였고, 전경들과 싸울 때에도 그녀들은 뒤로 물러서 있어야 했다. 우먼리브는 함께 싸우고 있으면서도 함께 싸울 수 없었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전공투로 인해 생겨난 감각들 덕분에 여성들 또한 목소리를 내기가 쉬워졌다는 점이다. 당시 리브에 관한 기록들 중에서 여성해방학생전선은 전공투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전공투 운동은 파장을 일으켰지만 문제제기로 끝났다. 

공투 운동은 과거의 이른바 거시정치로부터 일상을 문제 삼을 수 있는 미시적이고 새로운 정치로 이행하는 운동이며,
우먼리브는 그 새로운 정치를 계승하는 것으로써 존재한다.”

 

 

     실제로 그때 당시 여성운동을 했던 사람 스스로가 전공투에 대해서 ‘우리가 바로 그 계승자’라는 입장을 보였던 것이다. 리브와 전공투의 공통점은, 집단적으로 함께 생활하면서 토론하는 스타일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점이다. 1971년에는 ‘리브합숙’이라는 활동도 있었다고 한다. 전공투 운동에서는 바리케이트 안에서 함께 생활을 했기 때문에 신체에 대한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할 수 있는 공통감각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이것은 우먼리브 운동에서도 핵심을 이루었다. 자신의 신체, 즉 여자의 몸이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그래서 ‘에로스’라는 말이 끊임없이 소환되었고, 특히 섹슈얼리티에 관한 논의가 많이 소개되었다.

 

 

"이제까지 당연한 것처럼 생각했던 모든 것을 의심해보자.
계급투쟁을, 성을, 가족관계를, 맑스를, 프로이트를, 아름다움을, 상식을,
 교육을, 노동을, 그리고 여자임을.
물음표 속에서 빼앗겼던 말들이, 주체가, 확실한 감촉과 더불어 되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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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우먼리브운동 속 여성들의 모습>

 

 

 

      위의 인용문은 소식지 <리브합숙뉴스 1호> (1971년 일본)에 나오는 말이다. 모든 것을 의심하고 그것을 미시적으로 전복하는 행동은 전공투의 방식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우먼리브 운동은 전공투를 제대로 계승했다고 말할 수 있다. 전공투 운동은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하지 않는 운동이었다. 실제로 어떤 것이 대안적인 앎인지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비전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의 앎은 끊임없이 어떤 관계 속에서 생성 중에 있고, 우리는 그것을 바꿀 수 있다. 어떤 청사진 혹은 어떤 지도적인 비전이 먼저 있어서 그것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일단 시작해보면 그 뒤에 무언가가 만들질 것이라는 믿음에 의해서 그 운동은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 아닐까? 바리케이트 안에서 모든 가능성을 보았던 그들은 지도부도, 확실한 전망조차 없이 끊임없는 토론을 통해 함께 싸워 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 했기 때문에  그들은 그 시공간에서만큼은 권위주의적인 그물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자기안에 모든 가능성이 잉태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는 사람은 권위주의의 그물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

 

 

      지금-여기의 우리는 어떻게 이 촘촘한 권위주의의 그물망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러한 소박한 물음을 붙잡고 치열하게 고민하는 것이야 말로 우리가 대안적인 앎을 모색할 때 가장 중요한 지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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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우먼리브합숙 세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