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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심포지엄 후기 “1980년대, 혁명과 자본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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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18-12-20 조회수 : 5,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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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제연구소 2018정기심포지엄후기

“1980년대, 혁명과 자본의 시대

 

박동범

고려대 박사과정 수료,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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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의 판도라 효과’, 

그 복잡한 내력과 잿빛 귀결들을 어떻게 복기할 것인가

 

 

 

여기, 남한이란 데서, 이제껏 살면서 어쩌다 듣거나 번번이 들을수록 영 거슬리던 권력의 레토릭이라 하면, 뭐가 있으신가들? 모르긴 몰라도 저마다 한둘은 아니실 줄로 안다. 이 글의 취지에 맞춤해 꼽아보자면 일단 떠오르는 건 이렇다. 소위 산업화/민주화(운동) 경험에 관한 민족사적 자기서사’(혹은 자기표상이). 그러니까 세계사적 규모의 근대화 경험에 비춰보건대 포스트식민지 국가로서 보통 하나도 난망하다고들 하던 산업화와 민주화를, 그것도 쌍으로 이룩해냈다는 기적의 쌍끌이 발전서사 말이다.

 

‘(자유)세계 속의 한국을 고무한 미국발 발전 프로젝트의 반공-시장민주주의적 스펙터클 속에서, 이 서사는 지구북반부 권력블록으로부터의 상호인정과 자기준거적 지속을 동시에 노린 것이었다. 이런 자기표상은 실제로도 그렇게, 대한민국에서 독특하게 축적된 하부구조적 제도배열로부터 지구(북반부) 규모로 집적된 정치지리적 상징자본의 일부로 거듭났다. ‘Buy Korea!’란 슬로건 아래 이로부터 잔뜩 선양된 기업주의적 브랜드 가치의 세계화 과정은 그 단적인 귀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그 과정에서 수시로 불거지던 갖가지 살벌한 저발전양태는 거꾸로, 이런 발전 서사로부터 곧잘 정당화, 합리화되거나 그마저 어려울 경우 언젠가는 만회될 부수적 대가쯤으로 치부되곤 했다.

 

이런 서사로써 꽤나 성공적으로 축적돼온 자기준거적 지속의 뒷심은, 그러나 바로 그 성공의 바닥과 막장을 한창 드러내는 중이다. 단적으로, 다중불평등 양태가 각종 정량지표와 나란히, 대중미디어상의 살풍경한 사건사고 소식들로 최근 뚜렷해지는 점만 봐도 그렇다. 더욱이 이들 양태는 사뭇 첨예하다 못해 만성화하련 중인데, ‘헬조선이란 말까지 탄생시킨 살림살이상의 새로운 궁핍화압박들은 그만큼 더는 예외가 아닌 일상으로 굳어지련 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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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데 이런 현실보다도 역사-사회과학적 견지에서 훨씬 더 곤혹스레 마주해야 하는 건 아마도, 그런 현실이 어쩌다, 어떻게 초래됐냐는 질문이겠다. 최근 가일층 악화된 것으로 드러나는 살림살이 양태는, 들여다보면 볼수록 대한민국의 이름 아래 실제로 강력히 추진된 시장민주주의적 발전의 미달이나 일탈, 파행 따위가 아니라 그 내재적 귀결로 밝혀질 듯싶기 때문이다. 요컨대, 지난 40여년 가까이 더 많은(혹은 아직도 불완전한?) 민주화를 그 유력한 알리바이로 꾸준히 정당화되던 시장민주주의적 승리-진보서사의 달뜬 희망은, 이제 그 반공자유주의적 시장유토피아의 해묵은 미망과 제 풀에 맞닥뜨리게 됐다고 할까? 남한에서 경험된 자본주의 발전 패턴을 둘러싸고 포스트민주화 국면 이후로 줄곧 소위 민주화와 산업화의 성공적 절충이 이뤄진 양 기성 학술장과 시민사회, 영토적 경계 안팎으로 일정하게 합의됐던 기성의 자기표상-서사는, 문화-정치경제적으로 그 막다른 골목과 마주한 셈이다. 성공적으로 절충됐다던 발전의 자기표상-서사가 어렵사리 발휘해온 담론적 효력은 이제, 가령 치킨을 후라이드 반 양념 반으로 절충시킬 때의 기대효용보다도 훨씬 더 생겨나기 힘겹게 됐다.

 

 

이런 맥락에서, 여기 남한에서의 1980년대를 지금 다시 본다는 건 어떤 걸까? 그건 아마도 기적적 발전서사의 사회통치 효과가 결과적으로 한층 더 공고해지기까지의 ()역사적 사건연쇄 과정을 좀더 길고도 폭넓은 시공간적 국면 속에서 복기하되, 무엇보다 자기비판적으로 복기하는 작업일 거다. 이번 행사의 초청장  모시는 글에서도 밝혔다시피, 이는 일단 “[19]80년대를 착취해 오늘의 현실을 정당화하려는 모든 시도및 그 귀결들과 역사-사회과학적으로 씨름한다는 건 실제로 어떤 것인지 그 윤곽을 잡아가는 일이겠다. 하지만 그것이 동시에 자기비판적 복기 작업이자면, 이것만으로는 확실히 불충분하다. 이곳 남한에서 응축, 유폐, 유예된 모순들의 포스트식민지적 장기지속 효과를 거듭 유예하려던 모든 시도들로부터 생겨난 이중의 기적서사가 그간의 이른바 비판사상/사회운동적 입지들과는 또한 어떻게, 얼마나 연루돼 있었고, 그 문화-지성사적, 정치경제지리적 귀결과 유산은 어떤 것이었는지까지 아울러 충분히 되새겨봐야 하는 건 이 때문이다.

  

이런 사회사적 연루됨의 계보를 그에 앞서 언급한 오늘날의 막다른 골목 효과 속에서 ()역사적으로 추적하는 것, 내가 보건대 이는 1980년대의 판도라 효과를 정치지리적으로 좀더 폭넓고도 중층적으로 재역사화하는 일과 맞닿는다. ‘판도라 효과란 말이 시사하듯 1980년대에 걸쳐 남한 안팎으로 생겨난 정치지리적 다중스케일의 기회구조들은, 이를테면 때아닌/때늦은 사회혁명 전망에서 섣부른 청산의 부박한 자기맹목과 나란히 예방혁명적 사회발전 전망의 창조적 파괴구상에 이르기까지, 미시제도적으로 중첩된 갖가지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시공간대들이 서로 불균등하고도 모순되게 삼투, 길항하는 가운데 그 열림과 닫힘의 투쟁 효과들을 크고작게 만들어낸 것이었다. 역사문제연구소의 이번 2018년도 정기심포지엄은 바로, 이들 ()극적인 열림/닫힘 효과가 복잡한 미로와도 같이 남한 안팎으로 어떻게, 어떤 사회정치적 사건연쇄 과정들로부터 생겨났는지에 관한 재역사화 작업의 시작을 알린 자리였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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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혁명적 대중투쟁 전망과 예방혁명적 사회발전 전망의 이중주,

또는 유폐-유예된 모순들의 사건연쇄 과정들

 

 

이번 심포지엄은 1부와 2, 종합토론으로 구성됐다. 1부가 사회혁명적 대중투쟁 전망을 둘러싼 사회정치-문화적 자기표상과 그 사상이론/담론 지형을 다루고자 했다면, 2부에선 예방혁명적 사회발전 및 그 지속 전망을 둘러싼 총자본의 자기표상과 시민사회 안팎의 생활윤리 지형을 다루려 했다고 하겠다. 하여 전자와 후자가 어떻게 그 이중주적 모순들의 사건연쇄 과정 속에서 교차, 분기했나 되짚어보려는 틀거리였던 것 같다.

 

우선 1부에서 박치현은 사회학자 니콜라스 루만이 정식화한 사회의 자기기술개념을 이론적·방법적 렌즈로 삼아, 1980년대 명멸한 여러 정치적 주체성들의 자기표상-전망들이 상호분기, 삼투, 수렴하던 양상을 다시 보려 했다. 남한에서의 포스트식민지적 근대화 과정 내내 지배적으로 호명, 상상되던 정치적 변동의 주체로 국민 개념이 시민 개념을 압도적으로 지배하게 되는 경위가 무엇이었냐는 질문엔 발표의 기본 관점이 압축돼 있다. 소위 자주적임을 천명할 때조차 그것은 대체로 당대의 현실에 내던져진쪽에 가까웠던 1980년대의 사정 전반에 비춰, 그 내적 완성도를 떠나 적절하고도 흥미로운 시도였지 싶다. 그래선지 그 시절 쟁론하던 사상이론/담론들을, 가령 과학사회학자 브뤼노 라투르의 행위자연결망이론(ANT)의 문제설정에서처럼 인간행위자들과 대칭적·적극적 교섭-동맹관계를 맺는 비인간행위자 중 하나로 다뤄보면 어떨까도 싶었다.

 

이런 필요성은 사실 사회구성체 논쟁의 발생사를 사상사적으로 복기하려 한 홍정완에게서 더 두드러졌던 것 같다. 당시 논쟁들의 진리투쟁 자체를 의미론적으로다루는 것의 쓸모를 의문에 부치면서, 비판-좌익사상적 단편들의 뒤늦은 범람 효과로부터 생겨난 국지적 번역행위들의 화용론적 수행 효과들과 그 예기치 않은 문화-정치적 귀결들에 주목하려 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1980년대의 비판사상-이론자원들이 주된 비인간-행위자 중 하나로서 부침, ‘팽만하는 가운데 생겨났다 이지러진 다중의 연결망 효과(또는 세력화 과정)들은 오늘날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이제 와 가만 복기해보면 비판사상-이론자원의 때늦은 과잉(또는 그 폭발의 소용돌이 효과) 속에서, 사상이론적 장소감각 및 준거틀의 때이른 과소(또는 그 만성적 실조) 또한 갈수록 두드러진 국면 아녔을까?

 

이런 맥락에서 이한빛과 옥창준은 각각 노동문학장에서 생산된 ‘1980년 사북사태 이후의 탄광소설속 노동자재현 양식과 나란히, 제도권 학술장에서의 종속이론수용 및 번역 양상을 살핀 경우다. 사회비판/혁명적 입지의 자기준거들이 문학/사회과학장에서 어떻게, 어떤 경로로 도입, 검토되고 그 국면적 수행 효과들 및 실제 귀결들은 어떤 것였는지 저마다 살핀 이들 논의는, 비록 불충분하게나마 1980년대의 혁명적(아니면 예방혁명적) 주체성들이 마주한 내-외적 곤경 또는 자기모순적 낭패 지점을 잘 환기해준 것 같다. 특히 “1980년대 진보학술운동이 생산한 새로운 변혁적 지식의 동태가 사회운동론적 관점에서 경제사적·경제학적 기초를 앞세워 그간 유폐·절맥돼 있던 비판사상의 지적 저변을 크게 되살리긴 했지만, “과연 이들의 연구가 세계사적인 맥락 속에서 한국의 [자본주의 발전, 즉 식민근대화] 경험을 잘 설명해냈다고 볼 수 있겠느냐는 옥창준의 답변 같은 질문은, 1980년대를 자기비판적으로 복기, 반추하는 데서 두고두고 의미심장하게 다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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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2부에서는 1부에서의 여러 동태를 조건짓고 또 부추기기도 했던 자본(이라기보단 더 정확히 말해 그 자본으로 표상되는 지구화된 가치관계들’)의 예방혁명적 전망 및 사회통치 전략들과 그 실제 귀결들을 구체적으로 살피려 했다. 1980년대 초중반 전두환정권에서 추진한 ‘(사회)안정화정책의 폭넓은 대내외적 맥락과 그 부작용’(또는 모순적 귀결들)을 살핀 김수향, 피터 드러커 식 기업경영담론의 전략적 수용 양태를 기업계 쪽의 정기간행물 위주로 살핀 이봉규의 논의가 주로 협의의 국가행정기구-부처들과 준독점적 기업권력조직 블록 쪽의 동태에 주목하고 있다면, 같은 시기 소위 중산층적 소비문화 진흥의 담론 형세를 살핀 송은영과 그 연장선상에서 불거진 생활폐기물 처리의 생활윤리문제를 살피고자 한 정무용의 논의는 시민사회의 지배적 헤게모니 블록 쪽 동태에 주목했다고 할 수 있겠다.

 

달리 말하면 2부는 1970년대까지의 이른바 자유경제체제와 그 불만들속에서 창조적 파괴를 희구하며 부상한 사회안전또는 내적 평정의 정치경제적 욕동들이 문화적·시민사회적으로는 어떻게 이른바 중산층 담론들에서의 평범한 삶의 꿈’, 또는 환경오염에 예민한 노동/생활윤리감각으로 변주되는지 다루려 했던 것이라고도 하겠다. 1980년대 이후 지금껏 진보를 자임하는 이들 사이에서 빈번히 접할 수 있는 바, “경제적 안정성을 바탕으로 한 정치적 급진성의 계보를 이렇게 좇는 한편으로, 그 미시제도적 저변의 환경주의적 문명화 과정에 주목하는 일은 어쩌면 노농대중의 잠재역량에 대한 기업주의 경영담론의 반공헤게모니적 포획 전략이 1980년대의 민주화요구와 실제로 어떻게 절합했는지 되새기는 작업일 듯도 싶다. 그것은 예컨대 이한빛도 언급하고 있다시피 집집마다 수도가 놓이고 대우 봉세탁기를 설치하게하겠다던 탄광지역 노동운동의 자기전망이 어떻게 실질적인 살림살이 반전의 필요조건이 아닌 충분조건으로, 나아가 먹고사니즘의 알리바이로 그 너머의 미시정치적 상상력을 틈틈이 가로막게끔 열화되고 말았나 되새기자는 것일 테다.

 

2부의 구성이 가진 함축을 부러 부풀려 해석하자면 이런 질문으로 압축해볼 수 있잖을까? 1980년대 민주화의 이름으로 때늦고도 때아니게 생성된 생활세계상의 여러 사회변혁적 요구들은, 결과적으로든 헤게모니적인 사회통치 효과로서든 어쩌다 기회의 균등이나 절차적 공정성을 중시하는 미국식 대중소비주의 근대성의 선망(내지 그 포스트식민지적 내면화의 열망)으로 말려들어가고 만 걸까?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해지는 건, ‘평범한 삶의 꿈’(과 더불어, 그 어떤 환경오염도 용납 못하는 민주시민적 생활윤리 감각)은 그 광범한 정치적 반전의 잠재력이 무색하게도 어떻게 그 내적 자기파탄의 계기들 속에서 헬조선의 악몽으로 귀결, 진화중인 건지 세밀하고도 철저히 반추하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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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축과 토론: 아직 부치지 못한/않은 편지들?

 

 

지금 1980년대를 다시 본다는 건 이제, 그 국면적 경험들의 복잡다단한 전모를 낭만화된 국민적 승리서사 속에서 사실상 사유화하거나 고작해야 복고-상투적으로 재정치화(이를테면 어게인, 1987’?)하는 데 그칠 수 없게 됐다. 외려 그것은 대한민국이 이미 마주했거나 필시 마주하게 될 막다론 골목 효과의 ()역사적 계보를 두루 반추하는 가운데, 그 속에 숨겨진 다른 가능성의 차원/지평(내지 자본주의의 틈새들’)을 새롭고도 낯설게 불러내려는 쪽에 가깝겠다고 해야잖을까. 20세기 후반 이래로 줄곧 지구남반부적인 가치관계들로 두루 공고화된 살림살이 저변을 지구북반부적인 상징권력관계들로 정당화해왔던 따른 사회정치적 업장들과 어떻게 씨름할 것이냐는 질문이, 여기 남한에서 역사-사회과학적으로 갈수록 더 중요해지리라 보는 나 같은 입지에서는 더더욱 그렇지 싶다.

 

그래서 나로선 이번 역문연발 탐색의 시작이 무척이나 반갑고, 또 고맙기 그지없다. 그렇다고 발표주제 간의 전반적 짜임새와 세부구성상의 난점들이 없다고까지 할 순 없는데, 말 그대로 이제 시작인 만큼 불가피했으려니 웬만하면 너그러워지고 싶다. 다만 앞서의 반가움과 고마움이 그래도 무색해지진 말았으면 하는 맘으로 몇 가지 이견과 제언을 덧붙여보겠다.

 

먼저, 관계론적 접근 시각 또는 그 방법의 중요성은 향후의 보강, 보완 작업 속에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듯싶다. 가령 이봉규의 발표문에 대해 토론자 김보현은 총자본의 자기혁신 전략과 총노동의 자기조직화 운동 패턴은 양자택일적이기보단 관계론의 지평에서 병행되고 결합돼야 한다고 지적했는데, 이 같은 지평은 사실 개별 주제 속에서뿐 아니라 주제들 사이에서도 좀더 또렷해져야지 싶다. 이는 옥창준의 경우, 이른바 종속 문제에 관해 기성 학술장에서의 이론수용사적 동향뿐 아니라 운동권에서의 사상이론적 쟁투 동향이 학술장의 동향과 시민사회를 그 제도적 매개로 어떻게 삼투, 교섭, 참조했(거나 안 그랬)는지도 일부나마 다뤄야겠다는 요청일 수도 있겠다. 가령 맑스-레닌주의적 입지의 정치운동 조직에서는 국가독점자본주의 단계하의 신식민지적차원을 정세적으로 중시하면서도 역시나 권력의 식민성차원을 중시하던 세계체계 분석 류의 문제설정과는 왜 불화, 내외했는지, 그 쟁론 과정은 실제로 얼마나 과학적이고 이론적였으며 정치적으로도 유효했는지 같은 질문을 통해서 말이다. 이에 관해선, ‘지구사적 전환의 문제설정에 힘입어 최근 들어 생겨난 연구성과들이 유용하게 참조될 수도 있겠다. 관계론적 접근(또는 문화론적 정치경제 비판) 시각을 중시하면서, 근대세계 형성의 사회적 계보와 그 혁명사적 사건연쇄 과정들 전반에 관한 인식론적 전복의 지평을 크고작게 넓힌 것으로 평가받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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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는, 시기화의 문제가 있다. 이는 1980년대가 역사-사회(과학)적으로 어떤 연대기적 자기완결성을 가진 시기로서 다뤄질 수 있느냐, 내지는 그래도 되냐는 질문이기도 하다. 답은 무척 부정적인 것 같다. 특히 김수향과 이봉규의 논의가 그랬는데, 토론자들도 이들 논의에서 ‘1980년대적이라고 규정된 내용은 1970년대 중후반 무렵 생겨난 산업체제적 위기를 계기로 양적 확대가 두드러지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질적인 차이는 크게 발견하기 어려움”(이정은)을 지적한다. 이전과 차이가 뚜렷하다고 해봐야 1970년대 중후반기 동향의 단순한 양적 확대 내지 누적으로만”(김보현) 비칠 뿐이란 거다. 적어도 내게 이런 지적은 비/반연대기적인 시기화 작업의 필요성을 환기, 요청하는 것으로 읽힌다. 1980년대가 특정한 사회적 시공간대 또는 그 일부를 이루며 다른 시공간대들과는 어떤 계기적 차이를 만들어낸 건지 뚜렷이 하기 위해서도 그렇다. 이를테면 근대자본주의로의 유로-아메리카적 이행이 벌어진 시공간대를 뜻하는 16세기개념만 해도, 그 시기화 규정은 1450~1640년을 아우른다. 남한에서의 1980년대 같은 경우는 그럼 어떨까? 1972~1998? 아니면 1957~1995? 아니면 1977~2001? 이도 아니면 1894~1987/91년일까? 여기서 요점은 이 중 그래서 어떤 게 맞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준거로 삼든 이런 시기화 작업이 필요하다는 점이겠다.

 

또 하나의 이견은, 1980년대 들어서 출몰한 여러 주체()성 사이의 상호분기와 갈등, 경합, 재수렴 및 선택적 절충 양상을 사회이론적으로 어떻게 재역사화할 것이냐에 관해서다. 이는 국민적인 것은 왜 시민적인 것을 압도했을까란 질문 자체를 문제화하잔 것이다. 보다 명시적으로 그것은, 예컨대 민중에서 시민으로테제(최장집)의 사회이론적 유효성과 그 정치지리적 몰역사성이나 식민성을 문제삼자는 것일 수도 있다. 바꿔 말해 실정적 국민동일성으로서 소위 보편/표준시민됨에 할당된 기본 위치에서 봉기적·제헌적 주체화의 차원이 (설사 가능하더라도 얼마나) 소환가능하겠냔 건데, ‘민중에서 시민으로테제에서는 이들 주체화(또는 계급적·비시민적 탈동일화) 차원의 미시정치-제도적 말소-배제 효과가 더 두드러질 것 같다.

 

 

무엇보다도 내가 보건대, ‘국민적인 것은 그 조직원리상 시민(사회)적인 것의 대외적 표상 형태다. 예컨대 사회학자 장경섭이 개념화한 발전주의적 시민됨의 정치지리적 발전 궤적들이 바로 그렇다. 여기서 국민/시민됨 양자는 상호대립적이기보다 동일한 주체성의 상보적 차원들을 이루곤 했다. 이렇게 양자의 관계를 재맥락화하게 되면, 1972년의 10월 유신도 조국근대화의 국민총화앞에서 시민됨이 전면부정된 사태라 보긴 힘들다. 외려 그것은 어디까지나 미국의 베트남전 패배 및 이른바 데탕트 등 동아시아의 반공지정학을 둘러싼 예외상태적 압박들과 그 장기화에 맞춤한 국민()화 전략으로, 시민됨의 조건부 인정(또는 유예)’ 조치에 가까워진다. 국민됨의 진흥 없이는 지속불가능한 시민됨의 미시제도적 보편성, 또는 국민화 차원을 정치적으로 늘상 불러들여야 성립하는 보편시민됨의 기본 자질들에 이젠 주목해야 하는 셈이다. 요컨대, 가령 부르주아 때문에 민주주의 없다는 비교정치학자 로쉬마이어의 테제가 특히나 포스트식민지적 근대화(내지 자본주의 발전) 경험-패턴들 속에서 가질 사회이론적 유용성은 앞으로 한층 더 커질 듯싶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도 가능하다. 담론/이데올로기적으로 당연시되던 지구북반부적 보편-표준시민됨의 부분적·단편적 미덕들은 어떻게 그 시민됨의 전반적 난점 및 그 자기파멸적 효과들에 압도돼왔거나 지금 한창 그리 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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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한편 이 질문은, ‘민족적인 것계급적인 것’, ‘민중적인 것여성적인 것등의 정치지리적·국면적 상호중첩 양태(와 그 국민주의적 포획의 장기지속 효과)를 좀더 섬세하게 다뤄야 함을 함축한다. 사회적으로 타자화됐거나 주변화된 이들의 조직화된 자기표상 움직임들 속에서 정치사적으로 두드러지는 바, 계급/성차/민족(또는 종족)적인 것 사이의 내재적 교차관계들에 좀더 민감해지자는 거다. 한데 이러자면, 1980년대 중후반 이후 인식론적·당파적으로 당연시되곤 했던 이른바 NL(민족해방)-PD(민중민주) 구도와 그 과학-이론주의적·좌익보편주의적 물화의 유산에 관한 저마다의 자기비판적 복기 작업은 아마도 불가피, 불가결하지 싶다. 그것은 이런 지적 유산으로 생겨난 비판사상-이론적 개입의 불모화 효과들은 실제로 (가령 신체적으로 고양된 정치지리적 장소감각의 만성적 부실 혹은 빈곤처럼) 어떤 것이었으며, 이들 효과는 1980년대 이후 정파주의적 자기정당화를 앞세워 어떻게 지금껏 약화되기보다 되려 만성화하려는 참인지 차분하고도 겸허히 되새기는 일이어야 하지 않을까. ‘민족의식의 함정을 말하되, 민족적인 것이 특히나 지구남반부적인 포스트식민지적 제약조건들로부터 사회해방의 필요조건 겸 문턱으로 가지는 위상을 강조한 프란츠 파농, 그리고 민족경제적 근거지로의 사회재조직화 전망이 계급의식화된 민중적 주체형성 과정에서 지닌 정치지리적 중요성을 부각한 박현채 같은 목소리를 새삼 반추해봐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해야지 싶다. 어쩌면 이런 반추 작업은 가령 1955년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천명되는 한편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초/탈국민국가적 연방주의 구상이 모색됐던 바, 대륙-권역간 국제주의 정향의 사회해방 전망을 오늘에 되살리잔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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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19805이 민중사적으로 사실상 특권화된 지위를 획득함으로써 초래된 난점 내지 곤경들은 오늘날 정치적으로 어떤 것인지 이 참에 복기하는 일도 불가결할 듯싶다. 이렇게 바꿔 질문해봐도 좋겠다. 19805월의 광주를 둘러싼 그간의 기억투쟁은 그 이전과 이후로 종횡하며 벌어진 권역사적인 기억투쟁들과는 사회정치적으로 어떻게 접속해왔고, 접속하고 있는가? 5.18 광주의 권역사적 차원들은, 바로 그 특권화된 지위에 힘입어 예컨대 <화려한 휴가><26>, <택시운전사> 같이 어느 때부턴가 역사 없는 역사주의로 귀착하는 국민사적 자기서술의 숙주로 물화된 것 아닌가? 19805월 광주의 기억은 이제라도, 최소한 동아시아 스케일의 다중분단 체제가 정치지리적으로 공고화되기까지 그 체제화된 야만의 (식민)근대성을 거듭 환기, 소환해내며 광범하게 생겨났던 온갖 국지적 사건-기억투쟁들의 사회적 성좌星座 중 일부란 사실로부터 새삼 겸허해져야 하지 않을까? 1980년대에 관한 역사-사회과학적 복기 작업은 바로 이런 점에서 혁명과 봉기, 그리고 항쟁과 학살로 표현되는 광주”, 그 기억투쟁의 권역사적 단절 및 그 장기지속 효과와도 자기비판적으로 마주하는 일이어야 할 듯싶다.

 

1980년대의 사회정치적 판도라 효과, 그 과정의 끝자락에서 우리에게 이제 남은 것이라곤 주지하다시피 희망-일 거다. 루쉰의 유명한 시구처럼, 그것은 없다고 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있다 할 수도 없는 땅위의 길과 같아, 본래 길 같은 건 없던 땅 위에 많은 이들이 내딛는 발걸음으로 생겨나는 걸 테다. 이번 정기심포지엄 또한 이런 희망-함의 발걸음을 일단 내디딘 것이겠고. 하여 가만 희망하고 싶다. 이번 심포지엄에서의 중간성과물들이 후속보강작업 속에서 그런 길목으로 드넓어질 수 있기를. 마치 미처 부치지 못한 편지들 부치듯, 희망-함의 적막을 무릅써가며 가리워진 길을 내려는 또 다른 누군가들과 언제고 서로 마주치게 될, 그런 길목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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