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문제연구소

이야기들

2019. 10. 31. 기획강좌 제4강 "[국제관계] 동아시아 불화의 기원, 샌프란시스코 체제와 미국 헤게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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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19-11-28 조회수 : 3,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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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31일에 있었던 기획강좌 제4강의 후기를 이경민 선생님께서 보내주셨습니다. 좋은 글을 보내주신 이경민 선생님 감사합니다. 

 

쌀쌀해진 날씨에도 열정적으로 강의에 참여해주신 여러분과, 알찬 강좌를 준비해주신 권혁은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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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지헌의 이야기

 

 

대부분의 공간들은 실체가 있는 장소로 사람을 처음 만난다. 내가 속해 있는 문과대학 자치언론 문우편집위원회 역시 그렇다. 문우 동아리방은 문과대학 건물 지하 1, 제일 낡고 삐걱거리는 구석에 있는데 심지어 건물이 산자락에 있는지라 아주 한여름이 되기 전까지는 냉기를 몰아내기 위한 라디에이터가 꼭 있어야 한다. 한여름이 되면 냉기 대신 다리가 셀 수 없이 많은 손님들이 몸소 방을 찾아주시기까지 한다. 그렇지만 오래 쓰느라 상처가 많이 난 책상, 문우의 과월호 및 다른 학교 교지들이 꽂혀 있는 책장, 벽에 붙어 있는 슬로건과 포스터 등은 문우라는 공간의 정체성과 분위기를 보여주는 얼굴이라고 나는 늘 생각해왔다. ‘원하는 만큼 편히 쉬다 가세요. 당신이 어디서 온 누구이든 환영합니다하고 속삭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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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제연구소의 관지헌 역시 그랬다. 불이 꺼진 도로와 골목길은 흔한 한국 영화의 도입부를 생각나게 만들었다. 이대로 갑자기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고나 할까. 이제나 저제나 나쁜 놈들의 이야기라는 소재를 놓아주지 못하고 있는 한국 상업영화를 생각하면 내게 일어날 일은 나쁜 일일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 어딜 가고 있는지를 생각하면 조금 더 즐거운 상상을 해볼 수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실체 없는 설렘이 발끝에서 올라와 나를 들뜨게 만들었다.

그러나 관지헌에 들어섰을 때는 차분한 긴장과 두려움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입구 바로 앞에 있는 크고 낯설고 두꺼운 책들이 그 기분에 한몫했다. 내가 정말 이 강의를 들으러 온 게 잘 한 걸까? 그것도 처음 오는, 이렇게 어색한 곳에 혼자? 그 두꺼운 책들은 여기는 네가 있을 곳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했다. 하지만 입구에 몇 발을 더 디뎌 놓고서야 발견한 벽면에 가득한 포스터, 책장 위에 얌전히 놓여 있는 과월호와 다과, 노란리본이 옹기종기 담겨 있는 자그마한 통은 꼭 내게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사람 대하는 게 익숙하지 못해 너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여긴 누구에게나 열린 곳이고 우리는 너를 환영한다고. 그러니까, 마치 내가 속해 있는 문우 동아리방처럼 말이다. 이 공간 자체가 원체 묵묵하고 말도 없는 친구, 마음씨 곱고 다정하지만 사람에 서툰 친구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어떤 공간에서 따뜻함을 느끼는 것은 생각보다 자주 있는 일이지만 관지헌은 그 서투름이 오히려 더 마음에 들었다.

강의 시작 전부터 품고 있었던 설렘은 시작 후에도 얕게 계속됐다. 학부를 절반 이상 다니니 그동안 내가 헛공부를 하지는 않았다는 걸 깨닫는 지점이 많아지곤 한다. 이전에 수업을 들을 때는 분명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채로 한 귀에서 한 귀로 흘린 것 같았는데, 지금 수업에 나오고 있는 내용이 지난 학기에 배웠던 것의 연장선임을 발견하는 순간이 점점 늘어가는 것이다. 지난 앎을 다지고 늘려 그 위에 새로운 앎을 쌓고 연결할 때, 그걸 바탕으로 해서 시야가 새로이 확장될 때 느끼는 즐거움이 확실히 있다. 앞서 느낀 설렘은 그런 즐거움의 다른 이름이었다. 지금 극단으로 치닫는 한일 갈등의 많은 부분이 1962년에 맺어진 한일협정 때문이라고 많이들 이야기하지만, 이 한일협정은 자국의 부담을 줄일 수 있는 방향으로 동아시아 안보 체제를 구축하려고 했던 미국의 구상의 일부이기 때문에 1951년의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실 때 새로운 시야가 열리는 기분이었다. 간단하고도 완벽한 것처럼 보였던 미국의 동아시아 구상은 상상하지 못했던 변수들이 개입하면서 완전히 무너졌으며 미국은 황급히 새로운 구상을 짜야 했다는 말을 듣고서는 세계를 제 원하는 대로 재단할 수 있는 권력이란 대체 어떤 것일까 가늠해보기도 했다. 미국을 대표한답시고 나선 백인 시스젠더 남성이 자국도 아니고 무려 세계를 구하는, 어벤져스 따위의 히어로물을 할리우드에서 계속 만들어내고 있는 것도 이런 정서려니 생각했다.

제일 흥미로웠던 부분은 베스트팔렌 조약부터 베르사유 강화조약까지, 근대 세계의 전쟁은 대부분 그 전쟁과 관련된 모든 당사자들이 모여 지역 내 정치질서 재편을 합의하는 조약을 맺으며 종결되었으나 한국전쟁의 정전협정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조약의 내용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았거니와, 선생님께서도 짚으신 부분이지만 한국전쟁과 정전협정을 세계사의 맥락에 놓아 본 적이 드물어서 더욱 그러했다. 따라서 이와 같은 근대 평화조약의 문법을 따른다면 남한과 북한 사이의 내전, 중국공산당과 국민당 사이의 국공내전, 중국과 미국 사이의 국제전이라는 세 가지 성격을 모두 갖고 있는 한국전쟁의 정전조약은 당연히 동아시아의 모든 정치질서를 새로 세우는 조약이었어야 했다. 이에 동의한 나라가 중국과 영국 외에 제법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주장은 관철되지 않았고 미국은 근본적이면서 총체적인 안보체계와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대신 부담할 수 있는 만큼만 부담하려는, 이기적이고도 비겁한 선택을 했음을 알고 나자 상당히 허탈했다. 미국의 선택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나, 전쟁 당사국이며 그러한 결정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고 또 받고 있는 나라의 주민으로서 어처구니가 없기까지 했다. 그 이기적인 선택은 샌프란시스코 체제와, 협상 의지가 제로에 가까웠던 한일 양국을 이끌어다 거의 억지로 체결한 한일협정이라는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났고 마디마디가 분절된 유연한시스템이 동아시아에 자리 잡았으며 그 체제의 연장선이 지금 이 세계라는 것까지 들으니 갑자기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꽃다지가 당부에서 노래했던 것처럼 세상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단단하고 복잡한구조임을 깨달으니 막막함이 밀려왔다. 물론 샌프란시스코 체제 대신, 한국전쟁에 관계된 51개국 모두가 모인 테이블에서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를 정초했다고 한들 평화가 극적으로 이루어졌을 리는 없다. 이 땅에 유토피아가 도래하지 않는 한 모든 불화와 갈등이 해결된 완벽한 평화는 있을 수가 없다. 당연하다. 그런 회담이 이루어진 세계에서는 또 다른 갈등이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역사가 바뀌고 다른 세계의 가능성이 생기는 순간을 목도할 때 아쉬워지는 것이 비단 나뿐이겠는가. 박완서가 말했듯이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게 보이니까, 이런 기분은 아마 자연스러운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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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가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넘어서는 새로운 체제를 구축할 수 있을까. 관절이 고정되어 있지 않아 얇은 실로 잡아주지 않으면 힘없이 허물어지는 마리오네트 대신, 제 힘으로 꿋꿋하게 서 있을 수 있는 더 나은 관절인형을 동아시아에 세울 수 있을까. 강의가 끝나고도 이와 관련한 질문이 길게 이어졌으나 마땅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이에 대한 토론이 이어졌다면 즐겁게 들었을 테지만 이러한 구조를 확인하는 정도로 강의는 마무리되었다.

구조는 거대하고 전망은 회의적이었으나, 설렐 만큼 새로운 공간에서 그동안 알지 못했던 분야에 대해 공부하고 앎을 넓힌 것 자체는 매우 즐거웠다. 내가 지금 발 딛고 살아가는 세계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고 거기에 어떤 문제들이 도사리고 있는지 짚어가는 것을 항상 흥미로워 했는데 오늘의 강연으로는 동아시아 불화의 뒷면에 무엇이 자리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어서 좋았다.

오늘 들은 것과 앞으로 남은 강의를 생각했을 때, 처음에는 묵묵한 다정함만을 보여주었던 관지헌이 강의가 끝나고 나니 다양한 담론과 넓은 시각을 품어내는 넉넉한 공간으로 다시 보여서 새로웠다. 다음에 찾아왔을 때의 관지헌은 어떤 이야기를 보여줄지가 기대된다.

 

 

 

** 필자소개

연세대학교 사학과 학부생. 한국현대사와 그것이 지우고 가려온 것들, 그리고 여전히 가려지고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좀 더 세밀하고 섬세하게 살피고 싶어서 계속 고민하고 공부하고 있다. 연세대학교 총여학생회 모음, 페미니즘 학회 앨리스를 거쳐 지금은 문과대 자치언론 문우편집위원회에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