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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_2018.03.05] 전쟁학살 책임, ‘자기 부정’ 아닌 ‘피해자와의 연대’에서 출발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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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18-03-05 조회수 : 3,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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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3일 연구소 관지헌에서 있었던 공개 강연회 <'가해국 국민'으로 살기 : 베트남전쟁, 국가 그리고 '나'>에 대해 한겨레에 기사가 실렸습니다.

 

 

[한겨레] 후지이 ‘가해국 국민으로 살기’ 강연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시민법정 앞두고

한국현대사 연구자 후지이 다케시 대중강연

“죽을 죄” 개인적 윤리의식은 시야 좁혀

‘국가폭력’ 추상화는 외교문제로 변질

세월 흐르면 뒷세대들 “내가 왜?”

피해자-가해자 현재의 삶 연결할 때

‘과거청산’이 ‘미래생산’으로 이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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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중남부 빈딘성 떠이선현 떠이빈사에 세워진 ‘빈안 학살사건’(1966년) 추모비의 모자이크 그림.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의 학살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구수정씨 제공.


 

1999년 5월 <한겨레21>에는 충격적인 르포가 실렸다. ‘아, 몸서리쳐지는 한국군!’이란 제목의 기사는 베트남전 당시인 1969년 10월 베트남 남부 전선의 여러 지역에서 한국군이 민간인들을 집단성폭행하고 살해했다는 내용이었다. 파월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이 국내 언론의 보도로 처음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은 역사적 사실로 속속 확인되고 있지만 후속 조처는 여지껏 미미하다. 이런 가운데 시민사회에서 비극적인 진실을 규명하고 ‘가해국’ 국민으로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를 모색하려는 대중강연과 토론회가 열려 눈길을 끌었다.

지난 3일 오후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에 있는 역사문제연구소 5층 강당 ‘관지헌’에는 100여명의 사람들로 빼곡히 들어찼다. 한국 현대사 연구자인 후지이 다케시 연구원의 강연을 들으러 온 시민들이었다. 강연 제목은 ‘‘가해국’ 국민으로 살기-베트남 전쟁, 국가, 그리고 ‘나’’. 다음달 18일부터 일주일간 열리는 ‘베트남 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을 앞두고 마련된 자리였다.

시민평화법정준비위원회와 역사문제연구소가 공동주최한 이날 강연의 주제는 여전히 정치적으로나 학술적으로 민감하고 어려운 문제다. 그러나 강연장을 찾은 시민들의 관심과 열기는 뜨거웠다. 사전 신청자가 일찌감치 수용 인원을 넘어서자 주최 쪽이 양해를 구하고 페이스북 생중계를 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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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오후 서울 제기동 역사문제연구소에서 후지이 다케시 연구원이 ‘‘가해국’ 국민으로 살기-베트남 전쟁, 국가, 그리고 ‘나’’라는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후지이 연구원은 먼저 “일본인인 내가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망설였지만, 오래도록 ‘가해국 국민’이자 한국 현대사 연구자로 살아오면서 이 문제가 한국 사회가 좋은 방향으로 바뀌는 데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밝혔다. 그는 “1990년대 일본에서 대학에 다닐 당시 천황제 반대 운동에 참여하면서 과거 일본 제국주의의 아시아 각국 침략사를 비롯해 다양한 인권 문제에 눈을 뜨게 됐다”며 “스무살 즈음 내가 일본인, 남성, 비장애인 등 모든 면에서 ‘가해자’의 지위에 있다는 걸 인식하고 ‘나는 죽어 마땅하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말해 폭소를 자아냈다. 그는 그러나 “그런 생각은 피해자들과는 상관없이 강한 윤리주의에 바탕한 개인적 결단에 그치고 시야를 좁히는 것”이라며 “책임을 진다는 것은 ‘자기 부정’이 아니라 가해자 및 피해자들과의 ‘연대’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전쟁에서 야만적 폭력의 직접 행위자는 국가에 동원된 개인들에 의해 이뤄지는 만큼 ‘국가 폭력’이란 추상적 표현으로는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 구체성을 잃고 어떤 집단으로 환원되면서 ‘외교 문제’가 되고 만다”며 “이는 국가가 시킨 폭력으로 맺어진 관계를 바꾸는 일조차 국가에 귀속되는 결과를 낳는다”고 지적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세월이 흘러 직접적인 가해자와 피해자들보다 그 뒷세대가 많아진 상황에서, ‘가해국’ 국민들 상당수는 ‘왜 내가 하지 않은 일에 책임을 져야 하는지’ 의문을 갖게 된다. 후지이 연구원은 이에 대해 “‘가해자-피해자’라는 대치 구도로 접근할 경우 ‘주체’가 ‘구조’로 환원되면서 쌍방간에 실질적 변화 가능성은 실종되고 만다”며 “개인적 윤리의식의 경계(선)를 넘어설 때에만 그런 한계를 딛고 ‘과거 청산’이 ‘미래 생산’이라는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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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오후 서울 제기동 역사문제연구소에서 후지이 다케시 연구원이 ‘‘가해국’ 국민으로 살기-베트남 전쟁, 국가, 그리고 ‘나’’라는 주제로 강연을 마친 뒤 한 고등학생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그는 또 “국가의 책임을 묻는 것은 필요하고 중요하지만, 그런 행위 자체가 무엇을 만들어내는지, 무엇을 왜 하는지에 대한 ‘자각적 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민평화법정은 국가 폭력을 입증하는 자리이지만 단순히 피해 사실을 듣는 것은 피해자들의 삶을 놓치는 것인 만큼, “현재 우리의 삶과 그들의 삶을 연결시키는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오늘날 베트남 삼성전자 공장 노동자들은 주 평균 70시간을 일하고, 한국인의 국제결혼 배우자의 70% 이상이 베트남 여성(평균 연령 20대)인데다 맞선 사흘 이내 결혼 비율이 60.6%에 이르는데, 후지이 연구원은 “이건 사실상 인신매매”라고 지적했다. 후지이 연구원은 결론적으로 “과거 청산은 결과보다 과정이 더 중요할 수 있으며, 그 과정 속에서 누구와 함께 어떤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라고 강조했다.

글·사진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