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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이처럼 천진한, 하늘같이 맑은.... -이이화 선생님을 기리며, 윤해동(한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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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2020-04-14 조회수 : 2,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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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이화 선생 추모글/ 2020. 4. 8/ 윤해동(한양대)



                아이처럼 천진한, 하늘같이 맑은....
                    -이이화 선생님을 기리며


    "내년부터 대중을 대상으로 한 한국사 통사를 쓰기로 했다네. 이미 한×사에서 선인세 조건으로 매월 생활비를 대주기로 했고...."
    "예, 그렇군요. 정말 잘 되었습니다."
    "아마 한 10년은 걸리지 않을까 싶네. 한 20권 정도는 써야 할 테니까..."
    "와, 그렇게 오랫동안요? 혼자서 그게 가능하시겠어요?"
    "남은 인생을 여기에 걸어봐야지. "
    "그런데 선인세로 생활비 조달이 가능할까요?"
    "이래 봐도 내가 원고료 하고 인세로만 생활하는 사람 아닌가? 그런 사람으로 한국에 황모, 이모 등이 있지만, 이들은 모두 소설가고 소설가 아닌 사람은 나밖에 없다구...."
    "아 그렇지요. 저희들이 도와드릴 일이 있으면 무엇이든 도와드리겠습니다."

    1993년 세모의 어느 추운 저녁, 장소는 대한극장 건너편 인현상가 건물 옆에 있는 유명한 갈비집이었다. 식당에 모인 사람은 이이화 선생과 박종기 교수(국민대) 그리고 나 셋이었다. 말하자면 이 선생이 20권짜리의 대중적인 통사를 본격적으로 집필하기 전에 가까운 사람에게 협조를 구하기 위해 모은 자리였다. 당시는 역사문제연구소가 중구 필동에 자리하고 있을 때였고, 대한극장 주변은 연구소에 출입하는 연구자들이 모임을 갖기 위해 출몰하는 곳이었다. 전북 산골의 '국민학교' 폐교 한 구석을 집필실 삼아 집필 작업을 시작한 것이 1995년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준비에 1년여 시간이 소요되었던 것이리라. 이렇게 나는 이이화 선생의 큰 집필작업의 한 면모를 엿보고 있었다.

    이 대작의 집필작업은 말 못할 고투의 연속이었던 듯한데, 대략 1995년에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하여 2004년에 종결한 것으로 되어 있으니 옹골차게 10년이 걸린 셈이다. 하지만 예정한 기간은 물론이고, 전체 22권으로 출판되었으니 분량도 계획대로 얼추 맞춘 꼴이 되었다. 그 동안 얼마나 고생이 심했던가를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다. 박종기 교수는 잘 모르겠으나, 나는 이 작업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했다. 다만 시대별로 집필이 종결될 때마다 원고를 검토할 사람을 소개했던 정도의 ‘역할’을 했을 따름이다. 고대사는 전덕재(단국대 교수), 고려시대는 최연식(동국대 교수), 조선시대는 염정섭(한림대 교수) 그리고 근대사는 장용경(국사편찬위원회) 등을 소개하였던 것인데, 이들은 당시 박사논문을 막 집필했거나 집필하고 있던 후배들이었다.

    집필이 아직도 다 끝나지 않은 시점에서 이이화 선생은, 책의 판매가 여의치 않아서 통사 선인세를 받고 있던 출판사 사장으로부터 압박을 받고 있다는 점, 또 이로 인해 가정경제가 받는 고통도 만만치 않다는 점 등을 털어놓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어서 귓등으로 들어넘길 수밖에 없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뜻하지 않은’ 일로 가정 형편에 ‘개벽’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천진하게’ 전해주기도 했다. 이이화 선생은 듣는 사람도 기분이 좋을 정도로, 아무런 꾸밈없이 자신의 좋고 궂은일을 모두 이야기할 수 있는 장기를 갖고 있었다. “이거 봐, 내가 집필로 호구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요컨대 『(이이화 선생이 들려주는) 만화 한국사 이야기』(삼성출판사, 전 9권)가 2천년 대 초부터 조금씩 출판되기 시작하였고, 이것이 요즘 말로 하면 ‘대박을 쳤다’는 것이었다. 어린이용 만화책이 입소문을 타서 엄청나게 팔리기 시작했고, 여기에서 들어오는 수입으로 갑자기 통사의 선인세 문제가 해결되었을 뿐만 아니라 필경 가정 형편도 피이게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어쩌면 이것이 계기가 되었던 것일 수도 있겠는데, 통사 즉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한길사, 연표 등 포함 전 24권)도 완간 이후에 대단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한다. 얼마 전에 이 책을 소개하는 글을 보니, 20년간 300쇄를 거듭하며 50만 권을 팔았다고 되어 있었다. 정말 대단한 판매 기록이 아닐 수 없다. 통사와 만화 그리고 이에 따르는 부수적인 출판물을 합치면, 10년 동안 공을 들인 통사는 20여년 사이에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것이다.   

    이로써 이이화 선생은 통사 집필이라는 평생의 소망을 이루고 가신 셈이 되었는데, 기실 이런 생각은 그 전 5년 동안의 일종의 ‘허전함’ 때문에 더욱 간절해진 것이었다. 1988년은 동서 냉전의 일각이 소리 없이 무너져내리기 시작한 해였을 뿐만 아니라, 국내의 파시즘적 금기도 민주화의 열기로 급속히 녹아내리던 시기였다. 그러나 역사문제연구소로서는 1986년 개소 이후 가장 어려운 고개를 넘기고 있던 때였다. 민주화의 진전과 함께 사람도 돈도 함께 썰물처럼 연구소를 빠져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초기에 연구소에 참가하고 있던 여러 사회과학 분야의 연구자들은 본격적으로 분과학문별 연구단체를 결성하게 되었다. 게다가 초기의 관심이 시들해지면서 지원금도 아울러 줄어들게 되었다. 사무국장의 활동비는 이미 지급을 중단한 상태였고, 연구소의 임대료 월세를 대는 것조차 허덕이고 있었다. 연구소로서는 1988년, 1989년의 ‘보릿고개’를 넘기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 되었다.

    이이화 선생의 또다른 장기 가운데 하나는 감히 말하건대 ‘약주’였다. 만날 때마다 거의 매일 그리고 자주 새로운 날이 밝을 때까지, 연구소 사람들은 무던히도 많이 술을 마셨다. 그 중심에는 언제나 이이화 선생이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그토록 술을 많이 마셨는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하루라도 술을 마시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술 없이는 살 수 없는 시대’였던 것이리라! 그토록 열정적이지만 막막한, 또 쇠처럼 의지적이지만 무모한 날들을 술과 함께 견디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와 함께 무르익은 열정도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동학농민전쟁 백주년 기념사업’ 추진 그리고 ‘연구소 기금 마련을 위한 서화전’이었다. 경기대학교 근처 충정로 뒷골목의 맥주집에서, 이이화 선생과 몇몇 ‘無謀漢’들은 이를 통해 연구소의 새로운 ‘역전’을 기도하고 있었다.

    1980년대 그 ‘황폐한’ 시절에 민주화운동 단체들이 기금이나 운영비를 마련하기 위해 벌였던 행사 가운데 하나가 ‘서화전’이라는 것이었다. 값이 나가는 서화나 골동, 명품 등을 모아서 주변에 비싼 값을 받고 파는 행사였던 것인데, 팔 물건을 모으는 것도 또 그것을 파는 것도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우리는 감히 서화전이라는 시대풍조에 막차를 타기로 결정했다. 연구소 운영이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어찌할 수 없이 시도해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이화 선생은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네트워크를 망라하여 ‘돈이 되는’ 혹은 ‘돈도 안 되는’ 서화를 모았으며, ‘돈이 좀 있는’ 혹은 ‘돈도 없는’ 사람들을 모두 불러서 서화를 팔았다. 다른 모든 일을 제쳐놓고 그는 서화전 관련 일에 몰두했다. 서화전이 진행되는 기간 동안에는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인사동의 화랑에서 살았다. 이런 그의 충정 어린 활동으로 1990년 3월 서화전은 성공리에 막을 내렸고, 연구소는 1억원 이상의 현금을 손에 쥐게 되었다. 이와 아울러 이사장을 맡은 모 변호사가 1989년 연구소에 사무실 건물을 기증함으로써 매월 빠져나가던 임대료를 절약할 수 있게 되었다. 연구소 형편은 이제 간사들 월급은 줄 수 있는 정도로 호전되었던 것인데, 이것이 1990년부터 동학농민전쟁 백주년 기념사업을 가동할 수 있게 된 전후사정이었던 것이다. 
     
    농민전쟁 기념사업은, 특히 다소 거리를 두고 있던 ‘문외한’이 보기에는, 이이화 선생의 ‘독무대’처럼 보였다. 농민전쟁을 전공하는 연구자가 그다지 많지 않은 상태에서 ‘판’을 크게 벌인 탓도 있겠으나, 이 선생이 워낙 이 시기 연구에 내공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대중에 호소할 수 있는 능력을 겸비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심포지움을 위한 논문 작성만이 아니라, 각종 대중사업에도 발을 뻗지 않은 분야가 없을 정도로 그는 농민전쟁에 대한 열정도 함께 갖고 있었다. 2천년대 들어 과거청산 작업의 일환으로 농민전쟁을 끼워넣기도 하고, 전봉준 동상 설립에도 전면에 나섰던 것은 이런 열정과 사명감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농민전쟁에 대한 열정과 독무대 활동의 이면에서 그와 함께 커가고 있던 것은 대중을 위한 통사 기술에 대한 열망이었다. 그것은 제도권에 들어갈 수 없는 자신이 이루어야 할, 어쩌면 하늘이 내린 사명과 같은 것이었으리라. 술을 마시거나 틈이 날 때마다, 이이화 선생은 내게 그런 열망을 호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그는, 내게 ‘하늘처럼 맑고 높은’ 사람이었다. 거기에 개인의 욕망이나 이해는 끼어들 틈새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한편 그 시기 그는 어떤 자리에서건, 동학농민전쟁에 관한 개설서 혹은 입문서를 써야 한다는 의무감도 아울러 피력하고 있었다. 결국 그 작업의 성과는 내지 못하고 말았지만, 대신 이 선생이 인생을 걸고 추진했던 것이 통사 집필작업이었다.
     
    ‘동학농민전쟁 백주년 기념사업’ 성공이 낳은 허전함이 대중적 통사 기술이라는 새로운 모험을 잉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후세에 자신의 이름이, 제도권의 연구자로서보다는 통사를 기술한 ‘역사학자’로 남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는 그런 자신의 사명과 원망(願望)을 훌륭히 수행하고 떠났다. 그는 늘 아이처럼 천진하고 하늘같이 맑고 높은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