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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이화’의 결정적 장면, 허영란(울산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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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2020-04-14 조회수 :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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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이화’의 결정적 장면

    허영란(울산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지난 1월 중환자실로 찾아갔을 때 선생님과 대화를 나눌 수가 없었다. 진통제와 수면제 등으로 폐렴의 고통을 다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깨어계셨다면 아마도 ‘곧 집으로 돌아갈 수 있어’라고 호언하셨을 것이다. 조금 더 기운이 있었다면 당시 시끄러웠던 선거법 개정이나 총선에 대해 의견을 묻거나 주장을 하셨을 것 같다. 누구에게나 그렇게 했을 것이다. 선생님은 상대에 따라 태도를 바꾸거나 꾸미는 분이 아니었으니까.
    선생님을 처음 만난 것은 1990년대 초였다. 석사과정을 마치고 필동의 역사문제연구소에 드나들기 시작했을 무렵, 나로서는 잊을 수 없는 장면을 목격한 적이 있다. 예닐곱 명이 둘러앉은 작은 호프집 술자리에서 나는 막내였고 오십대 후반의 이이화 선생님은 제일 연장자였다. 김지하가 생명사상 어쩌고 하며 변절 논란에 휩싸인 직후였다. 선생님은 김지하를 신랄하게 비판했고 좌중의 누군가는 김지하를 변명했다. 취기가 오르고 옥신각신하면서 논쟁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원경스님이 테이블 위의 안주접시와 맥주잔을 절도 있게 들어 바닥으로 하나씩 내리 꽂았다. 그리고는 말했다.
    “이이화 열 명이 와도 김지하한테는 못 당해!!”
    이리저리 파편이 튀고 순간 정적이 흘렀다. 동석했던 선생님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긴장감이 좌중을 휘감았다. 나는 당황해서 어찌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순간 이이화 선생님이 일어섰다. 눈 깜짝할 사이에 테이블 위에 흩어져있는 유리조각을 손바닥으로 쓸어 쥐더니 허공으로 던지며 외쳤다.
    “신비주의 따위는 우리 역사에 필요 없어!!”
    그제서야 주변에서 선생님을 말리기 시작했고, 원경스님은 무릎을 꿇었다. 단도직입적으로 사과를 하며 멋진 말을 했던 것 같은데 구체적인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거구의 원경스님과 자그마한 선생님의 연극적 대조. 마치 무협지의 한 장면 속에 들어온 것 같았다.
    이튿날 연구소로 나가면서 고민에 쌓였다. ‘손 치료는 받으셨을까. 연구소 사람들에게는 어제의 일을 함구해야 하겠지. 싸운 일 소문내서 좋을 것도 없고.’
    어지러운 마음으로 사무국 문을 열었다. 그런데 상상 외의 장면이 펼쳐졌다. 선생님이 소파에 앉아 총무부장과 역사비평 직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역사비평 출판사가 연구소와 같은 건물에 있던 시절이었다.
    “아~~아~~ 신경이 잘못되었는지 엄지손가락 움직이기가 힘들어~”
    아프다는 듯 인상을 찡그리며 사람들에게 붕대 감은 손을 내밀어 보이고 계셨던 것이다. 부끄러움이 많고 다른 사람의 시선에 민감한 이십대에게 선생님의 모습은 파격 그 자체였다.
    돌이켜보면 선생님은 누구에게나 꾸밈없고 진솔한 분이셨다. 아이 같은 면도 있었다. 취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 시국에 대한 의견을 물을 때나, 전봉준 동상 만드니 기부 좀 하라 하셨을 때나, 동상 만드는 일 도와주는 아들이 대견하다 하셨을 때나, 타국에서 아르바이트하며 공부하는 딸내미 자랑할 때나, 아닌 척 꾸미거나 속마음을 감추는 일이 없었다. 전봉준 동상 크게 만들면 안 된다고 간곡하게 말씀드렸을 때도, “알았다, 알겠다” 하시고, “그래도 어느 정도는 커야지”하며 양보하지 않으셨다.
    선생님이 처음으로 출간한 책이 『허균의 생각』(뿌리깊은나무, 1980)이다. 나는 늘 이 책이야말로 ‘이이화다움’을 상징한다고 생각해왔다. ‘사상’이 아니라 ‘생각’! 40년 전에 이런 제목을 붙일 수 있었던 선생님의 각성과 그것이 가능했던 비주류적 위치. 만일 선생님께 ‘지도교수’가 있었다면 그런 제목을 못 붙이게 하지 않았을까. 이 제목과 더불어, 허균은 죽은 과거의 유령이 아니라 뜨거운 현실을 살았던 구체적 인간으로 다가온다. 선생님을 기억하며, 역사학자로서 선생님처럼 정직하고 살아있는 글을 쓸 수 있기를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여러 해 전부터 호(號)를 지어주겠다 하셨는데 그냥 가셨다. 좀 더 곁에 계실 줄 알고 조르지 않았다. 그렇게 아쉬움 속에 이별하는 것이 살아가는 일인가 보다.
    선생님, 안녕히 가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