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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이화(李離和) 형을 추도함, 이만열(전 국사편찬위원장, 역사문제연구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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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2020-04-14 조회수 : 1,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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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이화(李離和) 형을 추도함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 역사문제연구소 고문)


    3월 18일, 이 형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두 군데서 받았다. 역사문제연구소에서 전한 부고는 이랬다. “연구소의 제일 웃어른이신 이이화 선생님께서 오늘 오전 11시5분에 영면하셨습니다. 여러 단체들이 뜻을 같이 해 시민사회장으로 진행하되 '코로나 19' 상황으로 인해 장례식은 간결하게 하고 이 상황이 호전된 이후에 별도의 추모행사를 하려고 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부고는 이어서 고인의 빈소가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이며, 발인은 3월 21일(토) 오전 10시라고 했다.

    그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들리자 언론은 고인을 두고 '재야사학의 별' ‘민중사학 개척자’ 등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그의 업적은 ‘한국사 연구’에만 그치지 않고, ‘역사운동’을 비롯하여 사회 문화 인권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있었다. 그가 입원하여 중환자실에서 혼수상태로 지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 시민운동계와 학계가 그의 마지막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숙의하면서 ‘시민사회장’ 이야기가 나왔던 것도 그의 이러한 여러 방면에 걸친 생전의 활동과 깊은 관련이 있다.
    고인을 두고 '재야사학의 별'이라고 한 것은, 그가 역사학자들이 일반적으로 밟았던 배움의 과정을 밟지 않고 거의 독학으로 연구, ‘별’과 같은 위치에 서게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으로 안다. 『주역(周易)』의 대가로 알려진 이달(李達) 선생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보통 사람들이 밟는 교육과정을 제대로 밟지 못했다. 그 때문에 어릴 때 집을 뛰쳐나와 전전하다가 고학으로 광주고등학교를 마쳤고, 서라벌예술대학에 입학했으나 그마저 끝내지 못했다. 이렇게, 흔히 말하는 ‘정규교육과정’을 제대로 밟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학술전문지에 많은 논문을 게재했고, 100여권이나 되는 저작도 남겼다. 통상적인 학문 훈련을 쌓은 ‘학자’분들도 제대로 이룩하지 못한 업적을 쌓았으니 가히 '입지전(立志傳)적이라고 할 수 있다. 고인이 원광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수여(2014) 받은 것은 이같은 학문적 업적을 평가했기 때문이다. 고인은 그 밖에 인권운동에도 힘을 썼고, 제대로 된 인물을 국회에 보내기 위한 정치 분야에도 관여한 바 있다. 정부는 그의 역사대중화와 역사정의 실현에 끼친 공적을 기려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다. 
    고인을 두고 ‘민중사학의 개척자’라고 한 것은 그의 학문의 방향과 내용에 비춰볼 때 크게 벗어난 평가는 아니라고 본다. 그는 역사에서 소외되고 평가받지 못한 인물과 사실을 역사 인식 전면에 드러내려고 노력했다. 비교적 초기의 학문적 성과라 할, 허균(許筠) 연구는 그 뒤 그의 역사 연구의 지향을 보여준 방향등이었다. 그가 남긴 『한국사 이야기』(22권, 한길사)도 민중의 이야기를 빠트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또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위치를 오늘날처럼 정립한 데에는 김상기(金庠基) 정창렬(鄭昌烈) 등의 연구도 큰 몫을 했지만, 고인의 이에 대한 업적 또한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동학농민혁명’과 관련해서는 학문적 성과뿐만 아니라 그의 역사운동가로서의 면모도 잘 드러내 주었다. ‘역사운동가’로서 그가 남긴, 아마도 마지막 주도적인 역할은 종로 네거리 서남측에 건립한 전봉준(全琫準) 장군의 좌상일 것이다. 필자는 그가 <전봉준장군동상건립위원회> 이사장으로서 그 일을 위해 몇 년 동안 행정당국을 찾고 모금활동을 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70년경이다. 서울대 도서관이 규장각 도서를 해제할 그 무렵에 처음 만났고 그 뒤 교제를 넓혀갔다. 우선 작으마한 체구가 인상적이었다. 어릴 때 아버님으로부터 『주역(周易)』을 익히면서 배운 그의 한학 실력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고인의 한학은 규장각 도서 해제뿐만 아니라 그 뒤 연구활동에도 크게 활용되었다. 그가 『창작과비평』에「허균과 개혁사상」(1973), 뒤이어 「북벌론의 사상사적 검토」(1975)를 발표하게 된 것도 그의 탄탄한 한문 원전 이해의 터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전자가 그의 민중연구에 신호탄이 되었다면, 후자는 “주체성의 한국적 정의, 존명배청의 역사적 전개, 북벌론과 대의의 소재 등으로 나누어” 정리한 이 논문은 당시 박정희의 유신정권이 내세웠던 ‘한국적 민주주의’ ‘한국의 주체성’ ‘우리식의 민족주의’를 통론한 것이어서 체구도 작은 그의 당찬 기개를 보여준 것이었다.
    그의 발표는 당시 학계에서도 “역사 상황을 바르게 판단한 글”로 평가했다. 그 뒤 『한국사연구』18호(1977)에 발표한 「척사위정론의 비판적 검토-화서 이항로의 소론을 중심으로」는, 당시 최창규·홍순창·유승국 등의 교수들이 “19세기 중·후반기 전통 유림들이 벌인 서학(기독교)의 배척·서양문물의 거부·개항의 반대 곧 척사위정운동을 두고서도 민족 주체의 확립과 정학의 수호라는 관점에서 논지를 편”, 말하자면 당시 유신의 정당성(당위성)을 그런 식으로 호도하려는 데 대한 비판적 논문으로 학계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또 그가 1996년부터 10여 년 간에 걸쳐 집필한 『한국사 이야기』는 한국 근현대 사학사에서 역사관의 일관성이나 분량 면으로 볼 때 한 개인이 집필한 한국전사(韓國全史)로서는 그만한 것이 없을 정도다. 중요한 것은 이 책을 통해서도 그가 그 전에 거의 역사 연구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 민중의 존재를 역사의 전면에 부각시켰다는 점이다. 그를 두고 ‘민중사학 개척자’라고 한 것은 이런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생전에 그와 나는 자주 만날 기회가 있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을 만들 때 내가 초대 편찬위원장을 맡았는데 그때 많이 도와주었다. 여러 차례에 걸쳐 학술상 심사위원으로 만났는데, 한길사가 제정한 <단재상>과 민족문제연구소가 제정한 <임종국상>에서 특히 그랬다. 2004년 「동학농민혁명명예회복특별법」이 제정되고 국무총리가 위원장을 맡은 <동학농민혁명명예회복심의위원회>가 발족되었을 때, 내가 <결정및등록심사분과위원장>을 맡고, 그는 <명예회복추진분과위원장>을 맡아 몇 년 동안 보조를 맞추어 ‘동학농민혁명’에 가담한 본인과 그 후손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일에 나름대로 노력했다. 그때 그 위원회에 관여한 위원 몇 분이 해외의 민중민족운동 사례를 참조하기 위해 1주일간 필리핀과 싱가포르 등지를 방문, 조사한 적이 있다. 필리핀에서는 그곳의 전봉준 격이자 국부에 해당하는 호세 리잘(José Rizal)의 유적도 찾았고, 싱가포르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과 영국군이 전투를 벌였던 지역을 돌아볼 수 있었다. 이때 이 선생과 동행, 인간적으로도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었다. 또 박근혜정권이 국사교과서 국정화 시도를 강행할 때 우리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광화문 언저리에서 거리 변강좌를 개설, 국사학계의 입장을 알렸는데, 이때도 우리 둘은 나이 들었지만 열정을 쏟았고, 『거리에서 국정교과서를 묻다』(2016, 민족문제연구소)를 간행했다.

    그와의 인연 하나를 더 소개한다. 2000년대에 들어와 내가 책을 출간할 때에는 책 끝부분에 가까운 선배 동료들의 글을 교우기(交友記) 형태로 남겼다. 그렇게 함으로 생전에 맺었던 인간적·학문적 인연을 남기려고 했다. 여기에는 조동걸 교수를 비롯하여 손봉호 한영우 김경희 임한순 형의 글을 실었고, 2015년에 간행된 나의 산문집 『잊히지 않는 것과 잊을 수 없는 것』(포이에마)의 끝에는 「내가 만난 이만열 교수」라는 제목의 고인의 글도 실었다. 나보다 두 살 위인 이 형이 쓴 이 글은, 지금 생각해보니, 고인이 나와의 인연을 간단하게 적었지만 그러나 아주 소중한 선물이었던 셈이다.

    고인은 생전에 술과 담배를 ‘아주’ 즐겼다. 이런 저런 일로 자주 만난 우리는 공식 회합이 끝난 후 저녁 식사라도 하게 되면 고인은 식사보다는 술에 관심이 더 컸다. 거의 그랬다. 빈속에 술만 들어가면 좋지 않을 터이니 밥과 반찬을 안주 삼아 먹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걱정스럽게 권해도 그는 식사가 끝날 때까지 거의 술만 들곤 했다. 그만큼 술을 즐겼다. 10여 년 전 그가 고려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는데, 문병차 방문하여 농담을 곁들여 잡담도 나누었다. 우리 둘 사이는 심한 농담은 물론이고 아무리 비판적인 말을 해도 서로 웃음으로 넘기던 터라, 작심하고 술과 담배를 끊어야 한다고 강권했다. 그도 자신의 건강이 술 담배와 관련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내게 굳게 약속했다. 그런 후 이 형은 술 담배를 할 때에는 한동안 내 눈치를 살피는 듯했다. 그러나 한 때의 절주(節酒) 금연(禁煙)은 그 뒤 급속하게 주선(酒仙)의 경지로 더 몰아넣었고, 그것이 그의 건강을 크게 해쳤을 것으로 생각한다.

    고인은 2017년부터 전봉준 장군의 동상을 세우는 데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1년 여의 노력 끝에 동상이 완성된 뒤, 그는 나의 대학 동기이자 역사문제연구소 초대 소장이었던 정석종(鄭奭鍾) 교수 20주기 추모문집 간행위원장을 맡았다. 그에게 주어진 대부분의 일이 그렇듯이, 이 일도 떠밀려서 맡았을 것이다. 입원하기 전에 자신은 그 추모문집에 게재할 두 편의 글도 미리 준비하는 등 위원장으로서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조선 후기 전공자였던 정석종 교수 역시 생전에 민중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하는 많은 논문을 남겼던 터라, 이 형과도 학문적 지향이 상통하는 바가 있었다. 거기에다 이 형은 정 교수의 뒤를 이어 역사문제연구소 소장을 역임한 바 있어서 정석종 교수와는 특별한 인연을 갖고 있었다.

    지난 해 말, 고인은 12월 2일과 그 달 22일에 두 차례에 걸쳐 일산 백병원에서 대수술을 받았다. 수술결과가 좋지 않아 중환자실로 옮겼고, 산소호흡기에 의존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 소식을 듣고 부인 김 여사께 전화로 문병 일시를 조율해 보았으나 "선생님, 절대 오지 마시이소"라는 경상도 특유의 억양이 섞인 당부만 들었다. 그 무렵 환자가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 경지여서 문병이 무의미하다는 말도 누가 귀띔해 주었다. 그 뒤에 다시 문병의 기회를 엿보았으나 이제는 ‘코로나19’ 사태로 가족들도 중환자실 출입이 힘들다는 소식만 들렸다.
    오늘 비보(悲報)를 듣고 귀천(歸天)하기 전에 대면하지 못한 마음이 짠하게 아려온다. "먼저 가서 기다리고 계시게"라는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한 채 이별하게 되었으니 그 비감(悲感) 또한 후회로 남는다. 삼가 앞서 가신 이이화 형의 명복을 빈다. [2020.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