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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리운 친구야, 이제부터 연구에 매진하겠다고 했는데, 이이화( 『정석종, 그의 삶과 역사학』, 역사비평사,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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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2020-04-14 조회수 : 2,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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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운 친구야, 이제부터 연구에 매진하겠다고 했는데
     
    이이화( 『정석종, 그의 삶과 역사학』, 역사비평사, 2020)

    내가 정석종 교수를 처음 만난 건, 1970년대 첫 무렵 서울대 도서관 규장각 열람실이었다. 당시 서울 동숭동의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구내에 있는 규장각 열람실에서는 한국사 관련 소장학자 몇몇이 열심히 사료를 뒤지면서 씨름하고 있었다. 나는 이종석 선배의 주선으로 그곳에 드나들면서 고전 해제의 원고를 써서 푼돈을 버는 일종의 아르바이트를 할 기회를 얻었다.

    나는 서울대 출신이 아니어서 해제를 열심히 쓰면서 간간이 부정애 같은 사학과 대학원생이나 사서인 이상은 씨와 대화를 나누는 처지였다. 꾸어다놓은 보릿자루였다. 그럴 때 정석종이 먼저 인사를 건네 왔다. 아마 내가 신동아 부록인 『한국의 고전 백선』을 편집했던, 한문에 능숙한 사람이라는 말을 들은 모양이었다. 나는 서울대학과 아무런 연고가 없었으니, 그와 대화를 나누는 게 반가웠다. 그는 인삿속도 좋고 말도 사근사근하게 했다. 처음에는 어릴 적부터 서울내기인 줄 알았지만, 함경도에서 피난온 월남 동포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와 더욱 친해진 동기가 있었다. 그는 박사학위논문을 비롯해 여러 논문을 쓰면서 조선 후기 민중사에 집중하고 있었다. 나에게 “한국사를 연구하려면 무엇부터 하려고 하오?”라고 묻길래, 내가 민중운동사에 집중해보겠다고 말하자, 그가 내 손을 덥썩 잡았다. 뜻이 통한 것이다. 내가 관악구로 옮긴 규장각에서 해제집 책임을 맡아 일할 때, 그는 『추안급국안』을 자주 뒤적이고 있었다. 그가 이미 먼지에 덮인 이 사료를 조사해 목록을 만들어두고 있었다.

    나도 이 사료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때때로 내용을 검토하고 있었다. 그럴 때 이 사료가 강만길·정석종·정창렬을 편집위원으로 해서 1983년 아시아문화사에서 영인 출판되었다. 표면적으로는 세 교수가 편집한 걸로 나와 있었지만, 실제로는 그가 모든 걸 정리하고 제목을 달았다. 그가 여기에 담겨 있는 의적 장길산에 관련된 내용을 소설가 황석영에게 전달해, 『한국일보』 연재 소설의 바탕이 되기도 했다. 또 내가 이 사료에 실린 정약용 재판 기록을 복사해 한창 다산 정약용을 공부하고 있던 박석무 선생에게 전달했고, 박석무 선생은 이를 활용해 『다산기행』을 써서 주목을 받았다. 이 글을 읽어본 그는 박석무 선생에게 자신의 의견을 곁들여 장문의 편지를 써서 격려해주었다.

    우리 두 사람은 이 사료에 등장하는 장길산, 이필제, 정약용 등에 대해 자주 얘기를 나누었다. 더욱이 그는 홍경래를 연구하면서 『관서평란록(關西平亂錄)』 등을 조사해 영인본으로 펴냈고, 나와 신용하 등과 함께 편집위원이 되어 『한국민중운동사대계』를 간행하기도 했다. 그러다 한동안 소식이 끊어졌다. 그가 미국에 교환교수로 건너가서 한동안 만나지 못했던 것이다.

    1987*년에 역사문제연구소가 발족했다. 젊은 박원순 변호사는 6월 민주항쟁의 열기에 고무되었는지, 역사 연구자 모임을 주선하면서 원경, 임헌영, 이수인 등과 짝짝이가 된 모양이었다. 내가 옥인동** 개소식에 나갔을 때, 임헌영 선생으로부터 ‘이수인이 적극 추천해 정석종을 초빙하려 한다’는 말을 들었고, 나도 서슴없이 찬성하면서 설명을 곁들였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그 모임의 멤버라면 노장, 소장을 가리지 않고 군사 정권의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원로들과 중견 인사들 사이에서는 몸을 사리는 분위기가 은연중 팽배했다. 그래서 정석종을 추대했고 그가 이를 수락한 것이다. 학술 단체로 이름을 확정지으려고 원경 스님이 주지로 있는 안성 청룡사에서 임헌영·안병욱·천희상 등이 모임을 가졌다. 투표 끝에 연구소 명칭을 ‘역사문제연구소’로 확정지었다.

    정석종이 미국에서 돌아온 뒤 박원순의 집 거실에서 회합을 가졌다. 그날 밤 박원순·임헌영과 함께 서중석, 이균영, 반병률 등이 참석했다. 아마 확실하지 않지만 정석종과 안면이 있던 사람은 내가 유일한 것 같았다. 연배로 보나 교류 관계로 보나 그랬다. 그는 미국에서 정약용 사료를 확인했다고 말했고, 다산의 여전론 등 다산 연구에 매진하겠다고 했다. 나는 그가 너무 선진적이고 참신해서 듣고만 있었다.
    그는 역문연 운영위원 회의가 있을 때마다 자주 서울로 올라왔다. 그 무렵에는 교통이 매우 불편했다. 운영회의가 끝나고 나면 우리는 자연스레 저녁식사 자리로 옮겼고, 술이 거나해서 떠들어댔다. 그런 자리에서 나도 말이 많지만 그도 별로 빠지지 않았다. 임헌영 부소장이나 박원순 이사장은 그저 맞장구만 칠 뿐 비교적 조용했다. 학자들이 모인 딱딱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때로 군사 독재, 유신 얘기가 나오면 너나 할 것 없이 흥분했다.

    발표회나 토론회가 있을 때 그 주제는 주로 근현대사 관련 내용이었다. 그동안 그는 조선 후기사에 집중해왔었다. 이는 서울대 사학과의 특징이었다. 원로 교수들은 한사코 근현대사를 강의해주지 않았고 기피하는 분위기였다. 정석종 교수와 나는 바로 역문연이 이런 학문 작업을 해야 한다는 공감대를 지니고 있어서 더욱 의기가 상통했다. 이는 또 이승만, 박정희, 그리고 미국 문제의 고리를 푸는 열쇠이기도 했다. 군사 정권의 감시가 촘촘한 상황에서 때로는 위험을 느끼기도 했다.

    또 하나, 『역사비평』과 관련된 일화가 있다. 역문연에서는 학술 활동의 대중화를 표방했는데, 그러려면 우리의 지향과 의사를 발표할 매체가 있어야 한다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를 계간으로 발행하려면 문광부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그 무렵에는 이 허가를 얻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석종 교수가 문광부 담당관으로 있던 자신의 친구에게 간곡하게 부탁까지 했지만, 불가능하다는 회답을 들었다. 정 교수는 이 소식을 우리에게 알려주면서 아쉬워하고 분노했다. 다만 무크지 형식의 발행은 가능했다.

    그리하여 1987년 겨울에 먼저 무크지 형식의 『역사비평』을 발행하기로 하고, 발행인은 이사장인 박원순, 편집인은 소장인 정석종으로 명의를 올려 발행했다. 다음 해 어렵사리 계간지 발행 허가가 나와서 이 형식에 따라 발행인은 경비를 대고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사장제를 채택해 원혜영(현 국회의원)을 발행인(뒤에 장두환), 역문연 소장인 정석종을 편집인, 전공 연구자인 서중석을 주간으로 내세웠는데 이 관례가 지금까지 지켜져오고 있다.

    그 무렵 어느 날, 정 교수가 아치울에 사는 나에게 전화를 해서 서울로 불러냈다. 수유리에 있는 아카데미하우스 발표회에 참석하고 우리 집으로 와서 밤을 새면서 술을 마시고 담소를 나누었다. 주로 동학농민혁명에 관련된 얘기를 나눈 것 같다. 그는 정읍에 대학원생을 데리고 답사를 가서 손화중 손자를 만나 증언을 들었다고 했다. 나는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앞두고 이를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그가 나에게 ‘영남대 사학과 교수 자리가 비어 있으니 이 선생을 초빙하려 한다’는 제의를 해서 나는 손사래를 쳤다. 그의 방문 목적이 이 말을 하려는 것이었다. 다음 날에는 갓 낳은 나의 딸 응소를 안고 아주 귀여워했는데 알고 보니 그는 딸부자였다.

    그는 당시 건강도 나쁘고 가정 문제 등 여러 가지로 힘이 드는 것 같았다. 자세한 내막은 털어놓지 않았지만 대화하는 중에 그런 낌새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이들이 많아 학비 대기가 힘들다’라는 말도 했다. 그런 탓인지 역문연 소장 일을 사양해 내가 대신 2대 소장을 맡게 되었다. 어느 날 그는 나에게 조금 진지하게 부탁의 말을 했다.

    “역문연이 주체 사상을 연구하는 곳은 아니잖아? 근현대사를 심도 있게 연구하고 발표해 반독재 민주주의 실현에 기여해야 할 것이네. 사회주의운동사와 동학농민혁명 등 우리 민중운동사도 더욱 정리해야 하고….”

    어떤 교수가 자신에게 들려준 말을 전해준다고도 했다. 이를 나도 수긍했다. 일부 경향성을 띤 젊은 연구자들을 향한 우려인 것 같았다. 하지만 역문연 연구자들의 기본 흐름은 이런 경향에 깊이 천착하지 않았다.

    이제는 내가 대구로 내려가는 일들이 생겨났다. 영남대 박물관에서 시민대학을 개설하여 내가 자주 강사로 불려 나갔다. 그 무렵 박현수, 유홍준 등 교수가 관장을 맡아 나를 추천했다고 했다. 내가 대구에 내려가면 주로 신동근 교수가 연락을 해서 술자리 모임을 가졌다. 그럴 때면 정석종 교수가 좌장이 되어 대화를 나누었고, 건강이 좋지 않을 적에는 자택으로 찾아가서 대화했다.

    나는 1994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행사를 마치고 장수 산골인 연화마을에서 한국사 통사 집필에 매달리고 있었다. 다음 해 여름 역문연 수련대회를 이곳에서 가졌는데 정석종 교수가 참석했다. 건강이 괜찮을 무렵이었다. 그는 우리 몇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조금 진지한 모습으로 “나는 오래 못 살아. 역문연을 잘 꾸려주기 바라요”라고 말했다.

    그때 이미 그의 건강이 아주 나쁘게 보였다. 안색이 밝지 못하고 배가 더욱 나오고… 마침내 뇌일혈로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1997년 역문연 10주년 기념 행사를 세종문화회관에서 가졌을 때, 담당자가 그에게 참석 여부를 묻자 그는 굳이 참석해 격려의 말을 하겠다고 나섰다. 그가 지팡이를 짚고 단상에 올라갈 때 우리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이게 그의 말을 마지막으로 들을 기회인 것 같다. 나만 그런 느낌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마침 외국 답사에 나가 있어서 안타깝게도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 뒤 말수가 적은 정창렬 교수가 나를 보고 “너무 아까워. 이 선생과도 좋은 친구였을 텐데…”라고 말했다. 아마도 그를 가장 아끼는 이는 정창렬 교수인 것 같았다.

    이 짧은 너스레는 글쓴이의 개인적인 친분과 역사를 바라보는 눈이 비슷한 친구로서 추억에 못 이겨 대충대충 끄적인 얘기임을 밝혀둔다.



    ##원문의 오류를 바로잡습니다.(2020.04.14 17:03 홈페이지 관리자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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