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문제 연구소


          
  제36호-2016년 하반기 535
   관리자   2016-12-06

 






***책머리에: 『역사문제연구』 20년을 돌아보며

  올해 2016년은 학술지 『역사문제연구』가 탄생한 지 정확히 2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에 이번 『역사문제연구』 36호 ‘책머리에’에서는 이전처럼 특집이나 기획을 중심으로 수록한 글들을 소개하는 대신, 2016년 2월 『역사문제연구 회보』 59호에 필자가 쓴 「역사문제연구소 30년, 『역사문제연구』 20년」이라는 글을 조금 손질하여 다시 소개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지난 20년 전 『역사문제연구』가 어떻게 처음 시작되었는지 또 이후 20년 동안 『역사문제연구』가 어떻게 만들어져 왔는지, 그 20년의 역사를 간단하게 살펴볼 것이다.


역사문제연구소 10년의 결과물 - 1996년 『역사문제연구』 창간
  역사문제연구소(이하 ‘연구소’로 약칭) 창립 10주년이었던 1996년을 단 하루 남긴 12월 31일 학술지 『역사문제연구』가 탄생했다. 『역사문제연구』는 창간호에서 학술지가 만들어진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역사문제연구소는 창립과 함께 두 가지 목적을 제시하였다. 하나는 근현대사의 바르고 깊이 있는 연구를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런 연구성과를 대중에게 올곧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 목적 중 지금까지 연구소가 주력한 일은 계간지 『역사비평』과 대중강좌 <한국사교실> 등을 통한 연구성과의 대중화 문제였다. 그만큼 1980년대는 역사를 바로보기 위한 갈증에 목말랐다. 이후 연구소에 소속한 유능한 전문 연구인력의 성과를 독자적으로 집약할 수 있는 전문 연구지(논문집) 간행의 필요성이 꾸준히 논의되었다. 자기 소리를 내야한다는 현실적 요청이기도 하였다. 이에 연구소 창립 10주년을 즈음하여 전문 연구지의 발행을 추진했던 것이다.”

  즉 ‘역사연구의 대중화’라는 연구소의 지향과 관련하여,『역사비평』을 통한 ‘대중화’와 더불어 전문적인 ‘역사연구’를 병행하기 위해 『역사문제연구』를 만들었다는 얘기다. 그래서 학술지 이름도 처음에는 그냥『역사문제연구소 논문집』으로 하려고 했다고 한다.

  『역사문제연구』의 창간이 단순히 ‘역사연구’와 ‘대중화’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겠다는 연구소의 의욕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이는 창립 이후 역사문제연구소 10년 역사의 결과물이었다. 1986년 개소 직후 초창기 연구소 활동은 연구회원들의 세미나가 중심이 되었다. 1987년 연구소 내에 ‘연구실’이 독립된 단위로 설치되었지만, 이후에도 연구소의 활동은 여전히 연구회원들의 세미나가 중심이 되었다. 세미나를 통해 축적된 연구역량을 더 높은 수준으로 발전시켜 구체적인 연구성과를 내는 데까지 발전하지는 못했다. 그러다 1988년 말 정도가 되면 학계에서 소장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분과학문 별 연구회들이 조직되기 시작하면서, 연구회원들도 조금씩 연구소를 떠나게 되었다. 이에 연구소는 1989년 2월 상임연구원 제도를 도입하여, 연구원들을 중심으로 연구사업을 계획․추진하고 수준 높은 연구성과의 산출을 꾀하기 시작했다. 1990년 방기중 연구실장이 취임하면서 보다 체계적으로 상임연구원 제도가 갖추어졌고, 이후 상임/비상임의 구분과 통합 등 약간의 변동을 거쳐 오늘날과 같은 연구원 제도가 확립되었다.

  그러나 연구실 체제의 확립 과정에서 그동안 연구소가 간행하던 『역사비평』과 연구실의 관련성이 약화되었다. 또 분과학문 별 구심력이 더욱 강해지면서 연구소에서 사회과학 전공자들이 많이 빠져나가 연구실은 역사전공자 위주로 축소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연구소, 특히 연구실이 돌파구로 찾은 것이 전문적인 역사연구 학술지를 발간하는 일이었다. 즉 연구자의 풀(pool)이 한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실천적으로 요구되는 과제들에 일일이 대응하려면 외부의 명망 있는 연구자들에게 계속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며, 그러면 ‘내적인 연구역량’은 축적되지 않고 연구소는 겉모습만 외화내빈의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었다. 이러한 위기의식 속에서, 일단 차분히 연구소의 내적 연구역량을 쌓아 나가기 위해 전문학술지를 발간하고자 했다.

  연구실을 중심으로 연구소의 전문학술지를 간행하자는 구상은 1994년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먼저 편집위원과 편집간사가 선임되었고 그들은 1994년 9월 경 몇 가지 원칙에 합의했다. 한국 근현대사를 중심으로 한 역사 일반을 다루는 전문 연구논문집으로서의 성격을 지향한다는 것, 연구소의 학문적 특성을 반영할 수 있는 ‘특집’을 중심으로 발간한다는 것 등이었다. 학술지의 간행은 1995년 하반기부터 1년에 1번 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러나 창간호 특집을 책임질 연구반 구성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논문집의 참신성 등이 문제가 되면서 간행시기가 연구소 10주년인 1996년으로 미뤄졌다. 그리고 드디어 1996년 12월 31일 『역사문제연구』가 창간되었던 것이다.

  창간호 특집인 ‘근대 한국의 지식인과 사상’은 방기중 부소장이 주도한 3년 공동연구의 성과였다. 이후 2호부터는 연구소의 각 분과(경제사분과, 운동사분과, 현대사분과)가 돌아가면서 ‘논문집특집연구반’을 구성해 ‘특집’을 맡았다. 또한『역사문제연구』의 초대 편집위원회에는 당시 소장, 부소장, 운영위원, 연구위원, 연구원들이 모두 망라되어 있었다. 이러한 편집위원회 구성 방식은 이후 한동안 계속되었다. 학술지 지면 구성의 경우 창간호와 2호는 ‘특집’과 ‘논문’만으로 이루어졌고, 3호에는 그 외 ‘기고’와 ‘자료소개’ 코너가 등장하기도 했다. 그런데 처음 『역사문제연구』가 간행되었을 때 외부의 따가운 시선도 있었다고 한다. 여러 역사연구 단체에서 논문집을 발간하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역사문제연구소에서 또 논문집을 내려는 의도가 뭐냐, 정말 특색 있는 논문집을 만들 수 있겠냐, 논문집이야 말로 ‘파벌성’의 한 단면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었다.


『역사문제연구』의 기틀 마련 - 연구원 중심의 반년간 정기간행물화
  1996년 12월 31일 창간호 발행 뒤 정확히 1년 후 1997년 12월 예정대로 『역사문제연구』 2호가 간행되었다. 그러나 3호 간행은 1년 뒤가 아니라 1년 반 뒤인 1999년에야 이루어졌다. 그런 의미에서 2000년대 초는 『역사문제연구』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 시기다. 우선 그동안 1년에 1번이었던 학술지 간행이 2000년 4호부터 연 2회로 늘어났다. 연 2회(반년간) 출간의 정착은 『역사문제연구』의 발전에 중요한 기초가 되었다. 또한 여전히 연구소 주요 보직자를 망라한 편집위원회가 유지되었지만, 4호부터 편집위원회 내에 정병욱 연구원을 중심으로 한 별도의 편집팀이 꾸려지면서 사실상 연구원들이 『역사문제연구』의 기획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연구원들의 기획력이 강화되면서 학술지 지면 구성도 보다 다채로워졌다. 5호부터는 ‘심포지엄’ 발표나 ‘연구반’ 공동연구는 물론, 당시 막 시작된 ‘토론마당’을 지상중계하기 시작했다. 또 6호부터는 소통의 장으로 ‘광장’이라는 코너를 마련하여, 토론마당과 더불어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 연구방법론, 연구동향, 자료소개 등 다양한 내용의 글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서평’도 실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특집’, ‘기획’, ‘논문’, ‘광장’, ‘서평’ 등이 『역사문제연구』 지면의 기본 구성으로 자리 잡았다. 이후 ‘광장’ 코너가 없어지면서 대신 ‘자료소개’나 ‘연구동향’ 코너가 부정기적으로 생기기도 했다.

  2001년 11월에는 『역사문제연구』가 정기간행물로 정식 등록을 마치고 7호부터 정기간행물로 발간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정기간행물 등록을 미루었던 것은 ‘일정함’과 ‘연속성’에 대한 고민어린 신중함 때문이었다. 정기간행물 등록과 더불어 『역사문제연구』는 명실공이 전문학술지로서 위상을 분명히 할 수 있었다. 또한 7호부터는 표지를 비롯한 책 디자인 전체가 전면적으로 바뀌었다. 이 디자인은 이후 13년을 지속하면서 『역사문제연구』의 얼굴로 각인되었다.

  2002년 8호부터 편집팀장이 박종린 연구원으로 바뀌면서 그동안 연구소의 주요 보직자들로 구성되었던 편집위원회가 전면 개편되었다. 그리고 『역사문제연구』는 연구소 2세대(주로 80년대 학번) 연구원들만으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동시에 편집위원회에 연구소 외부 연구자들도 결합하기 시작했다. 보다 젊어지고 다양해진 『역사문제연구』 편집위원들은 『역사문제연구』가 역사학은 물론 인접 학문분야와의 적극적인 교류 속에서 다양한 역사연구 방법론과 역사이론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갖고 토론하는 장이 되도록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당시 한국사학계에서는 다소 생경한 주제들이 인문학 연구자들의 공동연구를 통해 ‘특집’이나 ‘기획’으로 가시화되었다.

  그런데 이전과는 달리 2000년대 이후에는 연구소 자체의 공동연구가 단행본 형식으로 거의 외화 되지 못했다. 이러한 현상은 『역사문제연구』가 제자리를 잡으면서 연구소 심포지엄 등의 연구성과를 『역사문제연구』에 게재하는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다. 물론 더 본질적으로는 연구원 중심의 연구실 활동이 침체해 있던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일례로 『역사문제연구』의 ‘특집’은 상반기의 경우 연구반의 공동연구를 외화하고, 하반기의 경우 정기심포지엄 결과물을 외화 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었는데, 8호가 처음으로 ‘특집’ 없이 출간되는 아픔을 겪었다. 이는 당시 연구소 연구반 활동의 부진을 그대로 노출하면서 동시에 『역사문제연구』 편집진의 기획력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역사문제연구』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연구소의 연구역량과 활동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척도였다.

  2004년 12호부터는 이승렬 연구위원이 편집위원장을 맡아 새로운 편집위원들과 함께 『역사문제연구』를 이끌었다. 새 편집진은 각국의 역사인식을 비교할 수 있는 장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일례로 12호에는 총 7편의 논문이 실렸는데(서평과 부록 제외), 그 중 3편이 일본, 대만 등 외국 사례에 대한 외국 연구자의 논문이었다. 2006년 16호부터 다시 편집진이 크게 개편되어 류시현 연구원이 편집주간을 맡았다. 이때 해외편집위원이 처음으로 영입되었고, 2세대 연구원들 이외에 3세대(주로 90년대 학번) 연구원들도 조금씩 편집진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이들 새 편집진은 『역사문제연구』를 통해 새로운 문제의식과 연구방법론을 담고자 했던 그동안의 노력을 계속하면서, 이러한 방향성에 덧붙여 보다 자유로운 형식으로 학계에 기여할 수 있는 연구성과를 지속적으로 담아내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특히 시론적이지만 새로운 관점과 방향을 제시하는 글이나, 기존 연구성과에서 공백으로 남아 있는 부분을 언급하거나 우리 학계가 놓치고 있는 외국의 사례에 주목한 성과물을 담겠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역사문제연구』, 등재지가 되다
  2006년 16호 간행 때 새로 꾸려진 편집진은 곧바로 2007년 17호 간행과 더불어 다시 한 번 완전히 개편되었다. 이는 『역사문제연구』의 한국학술진흥재단(이하 ‘학진’으로 약칭, 2009년부터 한국연구재단으로 통합) 등재신청 여부와 관련하여 연구원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이어졌던 논란이, 마침내 등재신청을 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기 때문이었다. 『역사문제연구』의 학진 등재신청과 관련한 논란은 이미 2000년경부터 있었다. 등재신청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에서는, 학진 등재지 및 등재후보지에 실린 논문이 여타 지면에 실린 논문보다 유리하게 평가되는 상황에서 등재신청을 하지 않으면 『역사문제연구』에 지속적으로 양질의 원고를 확보하기가 어렵다는 현실론을 주장하였다. 그렇지만 당시 결론은 소위 ‘학진 등재지 체제’에 구애받지 말고 『역사문제연구』를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연구와 발표의 공간으로 살려 나가자는 원칙론으로 기울었다. ‘등재지 체제’가 강요하는 치열한 실적 쌓기 경쟁이 연구자들을 논문의 ‘대량 생산자’로 전락시키는 가운데, 연구의 독창성과 인문학․역사학의 생명인 긴 호흡이 사라지는 현실을 거부했던 것이다. 당시의 분위기와 고민을 반영해 2001년 7호의 ‘책머리에’는 “적어도 『역사문제연구』를 통해 소통의 장에 임하는 연구자들은 실적 쌓기 전쟁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생각, 색깔, 냄새를 자유롭게 펼쳐 보이기 바란다. 정기간행물로 등록한 마당에 한마디 더 한다면 좀 더 불순하고 기존 질서를 어지럽히는, 난을 일으키는 글들이 나오기 바란다”는 소회를 피력했다.  

  그러다가 2004년부터 『역사문제연구』의 등재신청 문제가 다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등재신청의 필요성은 이전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다만 당시 연구소 내에 박사 연구원이 늘어나게 된 상황을 반영한 것인지는 몰라도, 이전과 달리 원고의 수합문제를 원고 투고자의 입장까지 시야에 넣고 논의가 진행되었다. 즉 대학 전임 임용 등을 고려한다면 박사를 받은 연구자들이 비등재지에 투고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는 곧 연구주체의 재생산 문제와 직결된 문제였다. 『역사문제연구』의 등재신청 여부를 둘러싸고 제기된 ‘자유로운 모색’이라는 원칙론과 ‘연구주체의 재생산’이라는 현실론은, 이제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모두 잡아야 할 ‘두 마리의 토끼’가 되어 버렸다. 결국 2007년 연구원들은 치열한 찬반 논란 끝에 『역사문제연구』의 학진 등재신청을 결정했다.
우선 2007년부터 발행되는 17호부터 20호까지 2년간 4개호를 학진이 요구하는 기준에 맞춰 발간함으로써 ‘등재후보지’가 되는 것이 1차 목표가 되었다. 편집진의 경우에도 학진이 요구하는 틀에 맞춰 개편이 필요했다. 이에 17호부터 이승렬 편집위원장, 류시현 편집팀장 체제를 확립하고, 연구소 외부에서 지역 및 연구소와의 관계 등을 고려하여 교수급 편집위원들을 다수 영입했다. 그리고 등재신청의 실무를 담당하기 위해 ‘유급’ 편집간사로 홍정완 연구원을 임명했다. 결국 2008년 등재심사를 통과해 19호부터 『역사문제연구』는 ‘등재후보지’가 되었고, 2011년 다시 등재심사를 통과해 25호부터 ‘등재지’가 되었다. 학계의 상황을 고려했을 때 등재지가 됨으로써 『역사문제연구』는 학술지 발간에 운신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2009년 21호부터 편집위원장과 편집팀장을 통합하여 류시현 연구원이 편집위원장을 맡았다. 또 22호부터는 편집위원에 연구소 2세대들이 다시 대거 포진하였다. 2011년 25호부터 편집위원장이 황병주 연구원으로 바뀌면서 편집위원회도 개편되었다. 새 편집진은 26호부터 ‘연구노트’ 코너를 신설하고 오랫동안 중단되었던 ‘서평’과 ‘토론마당’ 코너를 다시 살렸다. ‘연구노트’는 논문쓰기의 부담을 덜면서 참신하고 도발적인 문제제기를 활성화하기 위해 마련된 공간이었다.


등재지 이후『역사문제연구』의 발전과 고민지점
  2013년 29호부터 이상록 연구원이 새롭게 편집위원장을 맡으면서 편집위원회에도 대폭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2015년 34호부터 편집위원장이 오제연 연구원으로 다시 바뀌었지만, 연구소 3세대가 주도해 나가기 시작한 2013년 이후의 흐름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3세대 중심의 새로운 편집진은 보다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역사문제연구』만의 색깔을 갖추기 위해, 『역사문제연구』를 연구자들 간의 소통을 중계하고 토론을 자극하는 장으로 만들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역사문제연구』에 몇 가지 큰 변화가 생겼다. 우선 외형적으로 2014년 32호부터 『역사문제연구』 간행 출판사가 창간호부터 31호까지 출판을 계속 담당해왔던 ‘역사비평사’에서 ‘소명출판’으로 바뀌었다. 출판사 변경과 함께 지난 2001년 7호 이후 13년 동안 이어지던 책 디자인 역시 전면적으로 개편되었다. 또한 지면상에 ‘저작비평’, ‘주제비평’, ‘현실비평’, ‘집담회’와 같은 새로운 코너를 마련하여 지금까지 계속 이어오고 있다. ‘저작비평’의 경우 주요 저작의 저자를 초청하여 지정된 토론자들과 3시간 정도의 심도 있는 토론을 벌이는 자리이다. 이는 ‘서평’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서평이 의례적인 내용소개와 상찬으로 끝나버리는 고질적인 관행과, 또 소위 논문 카운트에서 서평이 제외면서 연구자들이 서평 쓰기를 꺼려하는 현실을 극복위해 기획된 것으로, 현재도 『역사문제연구』가 가장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학술적 소통 기획이다.

  ‘주제비평’과 ‘현실비평’의 경우 특정 주제, 특히 시사적인 주제에 대해 학술적인 접근을 모색하는 자리이다. 일례로 30호 ‘현실비평’ 코너에 수록된 정대훈의 ‘일베’ 분석 글은 디비피아(DBPIA) 조회 수 최상위권을 기록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또한 『역사문제연구』는 젊은 역사학자들의 다소 거칠지만 감각적이고 도발적인 문제제기에 대해 꾸준히 지면을 할애하였다. 31호부터 시작된 ‘집담회’는 이러한 젊은 연구자들의 목소리들을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한 시도이다. 집담회와 같은 기획을 통해 『역사문제연구』는 흡사 논문제조공장과도 같은 학제 시스템과 권위주의, 엄숙주의로 숨 막히는 학계 풍토 속에서 오아시스와 같은 역할을 하고자 했다. 이러한 다채로운 지면 구성과 더불어 등재지가 된 이후에는 일반 투고 논문도 많이 늘어나 책의 볼륨이 자연스럽게 커졌다. 그 결과 30호까지 300페이지 정도였던 책 볼륨이 31호 500페이지를 넘어 32호부터는 600페이지에 육박하게 되었다.

  최근의 특징 중 하나는 연구소 밖 연구자들의 글이 『역사문제연구』에 갈수록 많이 실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역사문제연구』는 이제 ‘역사문제연구소’만의 학술지가 아니라 학계 전반을 아우르는 학술지로 성장했다. 특히 편집위원회의 기획력이 더욱 강화되면서 시의성 있는 특집 및 기획과 다양한 지면 구성 등으로 비교적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 속에서도 고민해야할 지점들은 여전히 남아 있다. 가장 큰 고민지점은 『역사문제연구』와 연구소, 특히 연구실의 관계이다. 『역사문제연구』에 연구소 밖 연구자들의 글이 많이 실리고 있다는 것은, 결국 반대로 연구소 구성원, 특히 연구실 연구원들의 글이 상대적으로 적게 실리고 있다는 얘기다. 창간 이후 한동안 『역사문제연구』에는 연구소 소속 연구자들 글들만 주로 실렸다. 등재신청 이후에도 연구소 소속 연구자들의 글이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일례로 등재후보지가 된 2009년에 간행된 21호와 22호에 실린 21편의 글 가운데 당시 12편(57%)의 글이 연구소 연구위원, 연구원의 글이었다. 그런데 2015년 33호와 34호에 실린 22편의 글(저작비평회와 집담회 제외) 가운데 8편(36%)만이 연구위원, 연구원의 글이었다. 특히 가장 최근에 간행된 34호는 저작비평회를 제외한 11편의 글 중 단 2편(18%)만이 연구소 구성원의 글이었다.

  이러한 현상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역사문제연구』가 등재지가 된 이후 외부 연구자들의 투고가 자연스럽게 많아진 것과 더불어, 편집위원회가 특집과 기획을 준비하면서 필자를 연구소 밖에서 섭외하는 경우가 많아진 것이 하나의 이유이다. 시의성 있는 특집과 기획 주제를 선정하고 이에 적합한 필자를 연구소 외부에서 섭외하다보니, 최근 『역사문제연구』가 『역사비평』과 비슷해졌다는 평이 나오기도 한다. 『역사문제연구』 편집위원회가 자율성을 갖고 특집과 기획을 하며 이에 적합한 필자를 찾기 위해 섭외 범위를 연구소 밖으로 범위를 넓히는 것 자체는, 좋은 학술지를 만들기 위한 당연한 노력으로 문제 될 것이 없다. 단 『역사문제연구』가 애초 연구소의 전문학술 기관지로 출발했다는 점을 생각했을 때, 특집과 기획의 필자 섭외 과정에서 손쉽게 이미 ‘준비된’ 필자만 찾기 보다는 연구소 내에서 새로운 필자들을 계속 발굴할 필요가 있다. 특히 조금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젊은 연구원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어야 한다. 연구소 밖에서 필자를 섭외할 경우에도 참신하고 도전적인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젊은 연구자들에게 더 주의를 기울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역사문제연구』는 소위 ‘등재지 체제’ 속에 안주하는 기성 학술지와 큰 차별지점을 갖지 못할 것이다. 이는 앞으로『역사문제연구』 편집위원회가 연구소, 연구실과 함께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지점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역사문제연구』는 역사문제연구소의 연구역량과 활동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척도이다. 『역사문제연구』가 연구소 전문학술 기관지로서 계속 역할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연구소, 특히 연구실의 학술활동이 활성화되고 『역사문제연구』를 통한 그 결과의 외화가 더 조직적, 적극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는 20년 전 『역사문제연구』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의 문제의식과 통하는 지점이며 『역사문제연구』를 『역사문제연구』답게 만드는 길이다. 역사문제연구소 내 연구반인 ‘6070연구반’의 워크숍에서 발표된 3편의 논문을 묶어 이번 『역사문제연구』 36호의 ‘특집’ <1960~70년대 ‘자본주의 인간형’의 창출>을 기획한 것도 이와 같은 문제의식의 발로라 할 수 있다.  앞으로 『역사문제연구』는 그동안의 성과를 바탕으로 이러한 고민지점을 해결하기 위해 연구소, 연구실은 물론 학계 전반과의 접점을 넓혀나가고자 한다. 많은 분들의 관심과 성원, 그리고 참여를 부탁드린다.



***목차***

[특집1 1960-70년대 ‘자본주의적 인간형’의 창출]
1960~70년대 ‘인간관리’ 경영지식의 도입과 ‘자기계발’하는 주체 / 이상록
산업화 시기 여성 노동자들의 숙련과 ‘작업장 질서’의 전복 / 장미현
갈채와 망각, 그 뒤란의 ‘산업 전사’들 -‘국제기능경기대회’와 1970~1980년대의 기능인력 / 김태호

[저작비평회]
만주모던은 1960년대 한국에서 실현되었는가?
- 한석정, 『만주모던: 60년대 한국 개발 체제의 기원』(문학과지성사, 2016)

[일반]
지역 ‘번영단체’의 개발 프로젝트와 그 사회정치적 의미 - 원산시영회와 원산시민협회의 활동을 중심으로 / 오미일
미시나 쇼에이(三品彰英)의 신화연구와 근대역사학 - 식민주의 역사학의 사상사적 재구성 / 심희찬
일제시기 일본질소비료주식회사의 산업공해문제와 ‘식민성’ / 양지혜
한국전쟁 전후 조선인민군의 월남병(越南兵)과 분단체제의 강화 / 김선호
북한의 ‘신해방지구’ 주민 편입 정책과 그 특징 / 한모니까

[자료소개]
해제: 『中․高等學校 國史敎育改善을 爲한 基本方向』 / 장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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